유일신론보다는 문화상대주의를 선택한 나

협상론적 세계관 몸으로 배우기

by 안영회 습작

<동물로 인간사회에 살아야 하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신앙>에 이어서 김기석 목사님이 쓰신 <고백의 언어들>을 읽고 쓰는 글입니다.


유일신론보다는 문화상대주의를 선택한 나

<고백의 언어들> 127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유일신론은 포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벗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기초입니다. 문제는 유일신론을 자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와 다른 것은 다 배제하려는 데 있습니다. 가르고, 잘라내고, 혐오하고, 박해합니다. 그 결과 아주 작아졌습니다.

저는 개신교에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어릴 적에 그곳에서 느낀 위선과 배척이 그 이유입니다. 당시 목사들은 하나님 말씀만큼이나 '이단'에 대해 설교하는 데에 에너지를 썼습니다. 나이 마흔이 된 이후에 교회 다니는 지인들을 보면, 어릴 적 교회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구나 싶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미신 아니냐고 묻는 교인도 있었으니까요.'


그와 같은 바탕에서 읽은 김기석 목사님의 글이 그러한 교인들에게는 놀라울 수 있지만, 저에게는 자연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글은 제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된 '문화상대주의'에 대응되는 태도로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2015년 10월 고미숙 선생님께 명리학을 배울 당시 선생님의 '문화상대주의' 소개와 사례는 단번에 제 마음에 자리한 것 같습니다.


각자의 뇌가 만드는 현상적 세계와 우리의 개성

김기석 목사님은 또다시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플라톤은 그 중간 세계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이것은 이데아 이론과 연결되는데,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가 실재이며 우리가 살 고 있는 현실은 가상이라고 설정합니다. 우리가 큰 삼각형이나 아주 작은 삼각형을 보고 삼각형으로 인식하는 것은 삼각형의 이데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붉은색의 이데아가 있습니다. 이데아에 가장 가까운 게 완전히 붉은색이라 할 수 있겠지만, 조금 옅은 붉은색도 있고 그보다 더 옅은 붉은색도 있습니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론보다는 제가 쓴 <우리는 처음부터 개성을 가진 존재다>가 저에게는 더 와닿습니다. 조금 더 객관적으로 설명한다면 고대 그리스 이론보다는 과학을 차용해서 '각자의 뇌가 만드는 현상적 세계'를 설명하는 편이 더 낫고요.

그래서, 저는 이 내용을 보며 신앙인들과 과학을 믿는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지점이 있구나 싶은 '문화상대주의'적인 희망을 느꼈습니다.


윤어게인과 서북청년단 그리고 사유의 필요성

교인에 대해서는...

주위를 보면 배중률적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 삶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편 아니면 적, 좌파와 우파라는 이분법이 한국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중간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자기와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타인은 부정되어야 할 사람, 비진리로 규정됩니다. 비진리는 물리쳐야 하고, 가끔은 폭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형 교회의 원로 목사를 따르는 교인들이 문재인 전 대통령을 혐오하는 내용을 보며 깜짝 놀랐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대로 변화 없이 늙어서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돈(슈처챗)으로 다루는 모습은 '서북청년단'이라는 역사가 이미 실증한 종교의 악용 사례라 하겠습니다.


정치세력으로 이들을 다룰 때 '반지성주의'라고 말하곤 합니다. 사실, 어릴 적 교회에 다닐 때 저는 목사님 말에 대해서는 전부 다 '반지성적'인 것으로 확실히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김기석 목사님이 사유를 말한다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부터 저는 '회색인'의 사유에 익숙했습니다. <중략> 사유한다는 것은 자기와의 대화입니다. 대화가 단절될 때 발생하는 것이 클리셰liché입니다. 남이 한 말을 자기 말로 삼는다든지, 남이 심어 준 가치를 자기 신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백이 없습니다.


여유를 만들려면 스스로를 믿는 용기가 필요하다

한편, '여백'이라는 말을 보자 2004년 겪은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그 일에 대해 썼던 내용을 인용합니다.

발표가 끝나자마자 대표님 전화가 왔다. 어땠냐고 물으셨다. 발표 결과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여유가 어떤 조건에 다다르면 그때야 생기는 것인 줄 알았는데, 노력해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고맙다는 말을 했다. 아니, 그렇게 기억하지만, 실제로 뭐라 답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벌써 18년이 지난 일이니까.

그리고 돌아보면 그 여유를 만들기 위한 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하게 억압하는 사회와 교회의 힘에서 한 발 나아갈 수 있는 용기 말이죠.


일상과 거룩함을 '워라밸'처럼 구분하지 말자

반가운 내용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일상과 거룩함이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삶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총이 유입되는 통로라고 믿습니다. 거룩함은 예배를 위해 구별된 특별한 장소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끌림으로 제가 밑줄 친 내용을 토대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 분명해졌습니다. 비록 제가 교인이 아니라도 말이죠. 배척할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서로 종교를 구분하는 일을 지인에게 '사투리'라고 묘사한 일이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완전히 알 수 없는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 다양한 시대와 지리적 환경에서 사투리처럼 펼쳐졌을 뿐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도리어 중요한 사실은 교회나 성경을 다루는 시간을 도피 장소로 여기지 않고 '삶을 직면(直面)'하는 일입니다. 신앙은 바로 그 직면을 위한 지혜를 알려주는 것이죠.


기독교가 내포한 최대의 아이러니는 다음 문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적인 언어를 하나도 쓰지 않으면서도 가장 빛나는 거룩의 세계를 열어 보이셨습니다.


생명체인 우리에게 시간은 가치 측정의 전제 조건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웃사랑을 실천한 현신일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 종교를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종교는 로마에 의해 만들어져서 지배 계급의 수단으로 쓰였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에 또다시 부패한 극우 개신교를 보면 '종교'가 과연 '신앙'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들기까지 합니다.

자칫하면 오늘의 한국 교회와 세계 도처에 흩어진 한인들의 교회가 이런 조롱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밀레의 「만종』과 『이삭 줍기』가 보여주듯,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은총이 유입되고 있는 거룩한 장소임을 자각하고 일상을 거룩함으로 채워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밀레의 그림을 좋아했다는 고흐가 떠오릅니다.

이 그림은 단순히 낭만적인 그림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던 까닭은 제3계급이 들고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사회는 일종의 위계사회였습니다. 제1계급은 사제 계급이고, 제2계급은 왕과 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일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제3계급인 일반 서민들은 제1, 2계급을 떠받들기 위해 고단한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중략> 노동하지 않고 사는 계층에 대한 원한 감정이 그렇게 폭발 적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밀레는 다른 계급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노동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의 모습은 남루하거나 천박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스러워 보입니다.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
노자의 『도덕경』 48장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노자는 배움에 대해서 다소 부정적인 입장입니다만, 저는 제 나름으로 받아서 이 구절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배움을 위해서는 날마다 쉬지 않고 더해가야 하고, 마음공부를 위해서는 자꾸 덜어내고 또 덜어내 가벼워져야 한다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노자가 배움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그것이 자기 확장과 관련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커지면 자기 이외의 세계를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인간의 병통입니다. 자기를 비운 이들은 타자들의 존재를 자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뜻밖에 노자를 자주 인용합니다.


(글이 길어져서 다음 내용은 뒤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백의 언어들>을 읽고 쓰는 글

1. 동물로 인간사회에 살아야 하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신앙

2. 바울의 기독교적 영성과 협상론적 세계관 배양의 돌파구


협상론적 세계관 몸으로 배우기 연재

1. 협상이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2. 토론의 입장권인 경청은 왜 실천하기 어려운가?

3. 바울의 기독교적 영성과 협상론적 세계관 배양의 돌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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