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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Apr 09. 2023

유화를 계승한 광고 그리고 유화와 광고의 차이

존 버거 Ways of Seeing을 읽고 쓰기

지난 글에 이어 존 버거의 <Ways of Seeing>의 7장을 읽고 영감을 주는 내용을 옮기고 그에 따르는 생각을 기록한다.


하나의 자연현상처럼 되어 버린 광고

고등학교 때 아주 막연하게 광고홍보학과가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후에 광고는 (그저 가능한 정도에 한해서) 기피 대상이었다.

광고는 끊임없이 새로워야 하고 유행의 최첨단을 걸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역시 지금 이 순간에 속해 있다. 그러면서도 광고는 절대로 현재에 관해 얘기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과거에 관해 언급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항상 미래를 얘기하고 있다. 이처럼 광고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데는 매우 익숙해져 있는 반면에 우리는 그것이 주는 전체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고 있다.

매우 그렇다.

우리는 광고라는 시스템 전체를 마치 철 따라 변하는 기후의 한 부분인 양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Benedict Evans라는 a16z 출신의 독립 분석가의 2003년 기술 전망 <The New Gatekeepers>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가 말하는 문지기(Gatekeepers) 중에는 광고를 지배하는 미디어가 있다.


그리고 저자의 견해는 아니지만 오늘 페북에서 본 노암 촘스키의 문장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앞선 은유 탓인지 광고가 있어야 따뜻한 지역(자유세계)을 알아본다는 사실이 기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광고는 대개 궁극적으로 대중(즉 소비자)이 가장 유능한 제조업자들에게 이익이 되고, 따라서 국민경제에도 이익이 되는 자유경쟁적 매체라고 설명되고 평가된다. <중략> 자본주의 도시의 그 거대한 광고판들과 네온사인들은 '자유세계' 임을 금세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시각적 표지물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기 전까지 나에게 광고는 거추장스럽지만 공존해야 할 무언가 정도였다.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매력을 제조하는 광고

이제 본격적으로 광고에 대해 이해할 차례다.

상품 중에서 고를 수는 있으나 한 시스템으로서의 광고 자체는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은 채 오직 한 가지 제안밖에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무엇인가를 더 사들임으로써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생활이 변하게 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중략> 광고는 겉보기에 전과 딴판으로 변화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고, 그러한 변화의 결과로 그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중략> 광고는 바로 이런 매력을 제조해 내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제 광고 자체와 그 광고가 선전하고 있는 것들로 얻을 수 있는 쾌락과 이익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은 다소 계몽적인 느낌이 든다. 다행스럽게 나는 계몽되고 싶다.

광고는 쾌락을 찾으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일깨워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광고는 쾌락의 실제적인 대상을 제공할 수 없다. 어떤 쾌락을 얻는 본래의 방식을 떠나서 정말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에서 읽은 내용이 떠오른다. 그 책의 저자는 광고가 만드는 매력에 견디면 다음과 같은 시간을 아낄 수 있다 경험을 전한다.

쇼핑하는 시간

가사 시간

이사하는 시간

빈둥거리는 시간

물건을 찾는 시간

행복을 뒷받침하는 시간의 여유


쾌락이 아닌 선망받는 행복을 약속하는 광고

간단하지 않은 듯하지만 다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듯하다.

광고란 결코 쾌락 자체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미래의 구매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중략> 자신이 매력적인 인물이 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중략> 자신의 변한 모습을 부러워하게끔 한다. <중략> 그건 바로 다른 사람들의 선망이다. <중략> 광고가 약속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행복이다. 즉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외부적으로 판단되는 행복이다. 선망받는 행복이 곧 매력(glamour)인 것이다.

그리고 철학적 표현이 뒤따른다.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신감의 고독한 형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당신을 부러워하는 사람들과 당신의 경험을 나눠 갖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은 당신을 관심을 갖고 보지만 당신을 그들을 관심을 갖고 보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그렇다면 선망을 덜 받게 될 것이다. <중략> 바로 이 점이, 광고 속 그 많은 매력적인 인물들의 시선이 비어 있고 초점이 맞지 않은 듯이 보이는 이유의 설명이 된다. 이들은 그들을 매력의 대상으로 만들어 주는 다른 사람들의 선망의 시선을 무관심하게 관망하는 것이다.


광고 언어와 유화의 관계

뒤이어 <유화는 왜 존재했는가?>편을 쓸 때 눈치챈 느낌에 대해 설명한다.

광고 언어는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까지 사 세기 동안 서구적인 시각 방식을 지배해 왔던 유화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은 단지 질문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 있게 한다. 두말할 것 없이 오늘의 광고 언어와 유화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속성이 있다. 단지 문화적인 품위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 때문에 이 연속성이 모호해지는 것이다.

와우... 정말로 멋진 표현이다. 400년 동안 서구적인 시각 방식을 지배한 유화라는 표현도 그렇고, 질문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 있게 한다는 말도 그렇다.

미술작품은 거의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얘기할 수 있다. 즉 그것은 물질적인 부와 정신적인 것을 한꺼번에 의미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미술작품이 광고에 쓸모 있게 인용되는 것이다.)

유화의 진정한 계승자는 광고구나 깨닫는 문장이다.

사실상 광고는 대부분의 미술사가들보다 더 철저하게 유화의 전통을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광고는 미술작품과 그 관객(소유자) 간의 관계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아차렸고, 그 점을 이용하여 광고를 보는 관객(구매자)을 잘 설득하고 비위를 맞춰어 물건을 사게 만드는 것이다. <중략> 광고는 굉장히 많은 부분을 유화라는 언어형식에 의존하고 있다. <중략> 그것은 사용된 기호체계의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중략> 두 종류의 매체를 통해 얼마나 비슷한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는지 주목해 보라.


광고를 통해 귀족 문화가 계승되나?

왜 광고는 이렇게 유화의 시각적인 언어에 깊게 의존하게 되었을까. 광고는 소비사회의 문화다. 광고는 이미지를 통해 바로 이 소비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신념을 선전한다.

위 글을 읽는데 '귀족 문화'가 떠올랐다.

유화란 무엇보다도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형식이다. 광고가 르네상스 이후에 유럽의 시각예술을 대신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그 시각예술이 마지막으로 소멸해 가는 형태가 광고인 것이다. 본질적으로 광고는 무언가에 대한 향수다. 그것은 과거를 미래에 팔아야만 한다.

과거를 미래에 판다니, 봉이 김선달이 울고 갈 사업이다.

광고는 광고 자체가 요구하는 기준을 스스로 채울 수 없다. 게다가 광고가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모두 복고적이고 전통적인 것에 근거를 둔다. 광고가 단순히 당대의 언어만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확신과 신용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유화가 만들어낸 역사적 차원의 시각언어

유화의 언어에서는 이러 모호한 역사적 시적 도덕적 참조물들이 언제나 현재로 존재한다. 그것들은 진짜로 이해할 필요가 없이, 단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문화적 유산들을 회상하게끔 해 주기 때문이다. 광고는 모든 역사를 신화처럼 만들지만, 정말로 이 일을 효과적으로 해내기 위해서는 역사적 차원의 시각언어가 필요하다.

아... 공부가 필요 없게 하는 시각 언어를 말하나?

사진은 실물들의 색과 질감 및 입체감까지도 실감 나게 재현해 낼 수 있다. 과거에는 유화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유화가 그 그림을 소유하는 사람과 관계되어 있는 것처럼, 컬러사진은 광고를 보는 구매자들과 관계를 갖는다. 이 두 가지 매체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고도로 촉각적인 수단으로써, 그 이미지들이 보여 주는 실제의 사물들을 획득했다는 느낌을 보는 사람에게 준다.

카메라의 등장은 유화 제작을 쉽게 해 준 것이란 생각이 들게 하는 문장들이다.

이 느낌이 그로 하여금 진짜 물건을 소유하거나 소유한 것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광고와 유화의 기능적 차이

다시 몰입하게 하는 문장이다.

언어로서의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광고의 기능은 유화의 기능과는 꽤 다르다. 광고를 보는 구매자와 세계와의 관계는, 유화를 소유한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와는 아주 다르다. 유화는 소유주가 자신의 소유물들과 생활방식을 통해 이미 향유하고 있던 무언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자신이 가치 있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더욱 확고하게 갖도록 한다. <중략> 그것은 사실들, 즉 그의 생활의 실제에서 시작되었다. 그림은 그가 실제로 살고 있던 저택의 내부를 꾸며 주는 것이다.

유화는 사실주의를 따른다.[1]

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자기의 현재 생활방식에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 데 있다.

요즘 뉴스들이 광고랑 목적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화는 시장을 통해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것이었다. 광고는 시장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광고는 유화를 계승하여 귀족이나 부르주아들의 시각언어를 사용하지만, 광고주를 이롭게 할 뿐 정작 광고를 보는 사람들을 수탈한다.

그러므로 두 배의 이익이 이들로부터 뽑아진다. 광고에 대해 비교적 영향을 덜 받는 사람들은 갑부들뿐이다.

두 배의 이익이란 바로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노동자)인 관계에 따른 것이다. 오늘 출근길 지하철 광고가 너무 화려해서 보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생겼는데, 위 문장을 보니 처음으로 진지하게[2] '갑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광고에 의하면 현재란 불충분하다고 단정적으로 얘기된다. 유화는 영원히 남는 기록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림이 그 소유자에게 주는 기쁨 중 하나는 그것이 자신의 현재 이미지를 미래의 후손에게 전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유화는 자연히 현재 시제로 그려져 있다.

유화의 기능은 개인의 앨범이나 액자 속 사진에 의해 계승된다는 생각이 드는 글이다.


글래머는 현대의 발명품

광고의 진실성이란 광고가 주는 환상이 그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품는 환상에 얼마나 적절하게 들어맞느냐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광고는 본질적으로 현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백일몽에 적용된다.

저자는 뒤 이어 매력(glamour)이라는 관념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글래머는 현대의 발명품이다. 유화의 전성기에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아함이라든지 고상함, 권위라는 관념이 겉으로 보기에는 글래머라는 관념과 어느 정도 비슷한 것 같으나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렇지. 쉽게 돈으로 획득할 수 있는 매력이어야 소비를 하지!

그녀의 참된 본질은 다른 사람들이 그녀처럼 되었으면 하는 소원과는 무관하다.
글래머라는 것은, 한 개인이 사회에 대해 갖게 되는 선망이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진 공통의 정서가 됨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로 향하다 중도에 멈춘 산업사회는 그러한 정서를 만들어내기에 안성맞춤의 사회다.


민주주의로 향하다 중도에 멈춘 산업사회

갑자기 제시된 정치적 표현 '민주주의로 향하다 중도에 멈춘 산업사회'라는 말이 묘한 인상을 준다.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는 만인의 권리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사회적 환경은 개인으로 하여금 무력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그는 그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상태와 현재 그 자신의 상태와의 모순 속에 살고 있다.

내가 이해하기에는 체제로서 자유는 주어졌지만, 자연현상처럼 뿌려진 광고(혹은 대체제)로 인해 만들어진 거짓 욕망에 의해 실제로는 자유롭지 못한 사회를 뜻하는 듯하다.

모순과 원인을 충분히 깨닫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인 투쟁에 참가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의 무력감과 함께 뒤섞여서 백일몽으로 융해되어 버린 선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야 한다.

전자가 촛불집회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후자는 이대남 등으로 분류되는 부류인 듯하다. 하지만, <욕쟁이 예수>를 보면 양자택일이 아닌 또 다른 길을 제시하는 '우리 시대의 선지자들'도 있다.


또한, 광고의 기능을 꼬집는 다음 문장을 보자.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 자신이 느끼는 현재의 처지와 그가 되고 싶어 하는 처지 사이에 벌어진 간극과 일치한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의 저자는 '미니멀리즘으로 얻는 나 자신의 귀환'이라는 표현으로 일종의 디톡스 혹은 면역 기술(?)을 제시한다.


민주주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미디어인가?

말미의 내용은 정치적은 논조로 급변한다.

의미 없는 노동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끝없는 현재는 꿈속의 미래에 의해서 '상쇄돼 버린다.' 이 미래의 꿈속에서 노동하는 순간의 피동성은 상상적인 행동에 의해 대치된다. 백일몽 속에서 피동적인 남녀 노동자는 능동적인 소비자로 바뀐다. 노동하는 자아는 소비하는 자아를 선망하는 것이다.

소비하는 자아를 위해 의미 없는 노동으로 자아를 소외시킨다는 말인가? 분열이 일어나네?

세상에 똑같은 꿈이란 없다. <중략> 꿈이란 언제나 꿈꾸는 사람의 개인적인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백일몽의 진정한 뜻은 저 멋진 문장이 제대로 설명해 준다. 꿈은 개인 고유의 것이어야 한다.

광고는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들어냈다. 무엇을 먹을까, 무슨 옷을 입을까, 무슨 차를 탈까 하는 선택은 의미 있는 정치적 선택을 대치하고 있다. 광고는 사회 내부의 비민주적인 모든 것들을 은폐하거나 보상해 주는 일을 돕는다.

그렇다. 지난 대선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나의 아주 가까운 지인들이 이재명의 욕설을 근거로 그가 아닌 아무 나를 뽑은 사실이 떠오른다.

광고는 계속 연기되는 미래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현재를 배제하고, 그럼으로써 모든 생성과 발전의 여지를 아예 없애 버린다. 광고 안에서의 경험이란 불가능하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광고 밖에서 일어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광고의 기본 메커니즘을 칭하는 우리나라 속담이 바로 '그림의 떡'이란 사실을 깨우친다.

광고는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매우 중요한 정치적 현상이다. 그러나 광고가 참조하고 인용하는 것들은 넓은 영역에 걸쳐 있는 반면, 광고가 제공하는 것은 좁은 범위 안에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획득할 수 있는 능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 레거시 미디어들을 보면 민주주의의 적이 확실하긴 하다.

광고는 이 문화의 생명이고 - 광고 없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 동시에 광고는 이 문화의 꿈이다.


주석

[1] <월말 김어준> 노성두 박사님 표현이다. (2023년 2월호)

[2] 모호한 욕망 상태에서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지난 존 버거 <Ways of Seeing>을 읽고 쓰기

1.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한다

2. 역사는 항상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를 구성한다

3.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4. 누드와 여성의 사회적 존재에 대한 무지 벗기

5. 유화는 왜 존재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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