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섬 & 춘천여행 2 (16.05.11~13)
단재학교는 ‘성숙한 인간을 길러내는 것’을 목표로 전체여행과 학습발표회를 매학기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다.
하지만 어떤 활동이든 목표가 정해져 있다고 해서 꼭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활동으로만 커리큘럼이 짜여야 하는 건 아니다. 이를 테면 ‘수학 영재 육성’이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과목을 수학 한 과목으로 도배하여 1교시엔 집합을 배우고, 2교시엔 사칙연산을 배우며, 3교시엔 2차방정식을 배우고, 4교시엔 미적분을 배워야 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면 수학 영재는 탄생할까? 그건 수학에 대해 흥미를 갖게 하고 깊이 있게 배우게 되기보다, 오히려 신물 나게 하고 물리게 하는 역효과만 있다. 즉, 수학을 전면에 배치하고 모든 수업과정을 편성하는 순간 수학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더욱이 수학능력이란 단순히 반복적인 문제풀이를 통해 길러지는 게 아니라, 다양한 경험과 대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길러진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을 많이 해본 사람, 경험을 많이 해본 사람이 오히려 수학능력이 뛰어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단재학교의 목표가 ‘성숙한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라 하여, 그 하나의 목표를 위해 커리큘럼이 구성되어 있지 않다. 단지 영화나 연극, 목공, 기타, 교과수업, 여행, 발표회와 같이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활동들을 하다보면 당사자도, 교사도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목표가 달성되는 것이다.
이러하기에 아이들은 “이런 씨잘데기 없는 짓을 뭐 하러 해요?”라고 의구심을 가지거나, “이런 활동들 말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하는 공부를 하고 싶어요”라며 불만을 표시하거나, “이런 건 모두 다 무의미해요. 세상에선 쓸모없으니까요”라며 못마땅해 한다. 지금 당장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며, 그 활동이 끝난다 해도 그 효과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도 아무도 모르니 그런 말이 나올 법하다.
그래서 동섭쌤은 이런 것을 ‘사후적 지성’이란 말로 표현했는데, 그것이야말로 배우려는 마음을 가진 이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가짐이지 않을까 싶다. 어찌 보면 우린 다양한 활동을 하며 ‘결과를 알기 때문에 한다’는 당연한 명제를 무너뜨려야 하고, ‘모르기 때문에 한다’는 마음을 되새겨야 한다. 그럴 때 지금 당장 하는 활동들이 그저 시간을 때우는 것, 할 게 없어서 하는 것 정도로 치부되지 않고 하나하나의 톱니바퀴가 되어 의미를 만들어가는 소중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
지금껏 1학기 전체여행은 개학하자마자 가거나, 검정고시가 끝난 후에 갔었다. 2012년도엔 개학하자마자 강화도를 1박 2일 일정으로 걸어서 여행을 했고, 2013년엔 검정고시가 끝나고 유명산 펜션에서 1박 2일 동안 맘껏 놀다왔으며, 2014년엔 정식학기가 시작되는 3월(2월엔 검정고시 준비기간이었음)에 석모도에 가서 아이들이 직접 계획한 게임을 함께 했고, 2015년엔 검정고시가 끝나고 전주와 임실에 여행을 가서 치즈 만들기 체험과 한옥마을 여행을 했다. 지금까지의 선례를 봤을 때, 방학동안에 무너진 신체리듬을 학교 시간표에 맞추기 위한 워밍업 차원으로 개학과 동시에 가거나, 시험공부를 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오자는 의미로 검정고시가 끝난 후에 가거나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올핸 지금까지와는 다른 날에 전체여행을 가게 되었다. 5월 중순에 전체여행을 가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니, 여기엔 사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올핸 예년과 달리 1월 마지막 주에 개학을 했다. 그러면서 개학과 동시에 2박 3일 동안 스키여행을 떠나며 한 학기의 문을 활짝 연 것이다. 그 여행을 통해 우린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회포를 풀 수 있었고, 싱그러운 기분으로 새 학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처럼 1월 마지막 주에 전체여행을 간 것이니, 얼마 지나지 않은 3월에 전체여행을 가는 건 아무래도 너무 빠르다는 인상이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4월에 검정고시가 끝나고 떠나는 것으로 미뤄졌던 것이다.
하지만 원래 여행의 컨셉으로 잡았던 ‘지리산 둘레길에서 요리 만들어 대접하고 어르신들 일손 돕기’가 여러 의견 충돌로 무산되면서 여행은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행의 컨셉도 ‘공포특집’으로 바뀌었고, 5월에 단기방학이 끝나자마자 떠나는 것으로 일정도 바뀌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단재학교 사상 최초로 5월에 전체여행을 떠나는 특이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10시까지 왕십리역에서 모이기로 했다. 경춘선이 출발하는 상봉역에서 모이면 훨씬 편하지만, 아직 지하철을 타는데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 있어서 그나마 편하게 모일 수 있는 왕십리역에서 모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왕십리역은 무려 네 개의 노선이 지나가다 보니 엄청 복잡하다. ‘청량리 방향으로 가는 중앙선 승차장’에서 모이기로 정했지만, 잘 찾아오는 아이들도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헤매게 마련이다. 실제로 개학여행으로 강촌스키장에 갈 때도 왕십리역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각자 오는 방법이 다르다 보니 아이들을 찾아 한참을 돌아다녀야 했다. 그때 경험을 해봤으니, 이번에는 그나마 좀 더 잘 찾아오지 않을까.
나의 경우 천호역에서 9시 40분에 출발하는 전철을 타고 가면 되니, 마음이 여유롭다. 평소엔 7시 50분에 집에서 나오니, 무려 1시간 30분이나 시간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늘어난 시간만큼 맘이 여유롭다기보다 한껏 긴장되어 조급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엔 한참 동섭쌤의 ‘트위스트 교육학’이란 강의를 들을 때였고, 그걸 단순히 듣는 정도만이 아닌 ‘강의 내용을 모조리 후기로 남기겠다’는 포부로 강의 후기를 맹렬히 쓰던 때였다. 그래도 처음에 시작할 때만 해도, ‘많이 써져봐야 한 강의 당 3편 정도의 후기가 써지겠지’라고 만만하게 보고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막상 쓰다 보니 기본 4편에서 많게는 5편까지도 써지더라. 상황이 그렇게 되고 보니, 초반의 호기로운 태도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늘 시간에 쫓기며 마음의 여유는 사라졌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고 깜량도 안 되는 사람이 무작정 달려들었다가 보기 좋게 KO가 된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시간에 쫓기다 보니, ‘이렇게 여유로운 아침에 조금이라도 마무리를 짓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여유를 부릴 새도 없이 분주해지기만 했다.
그래서 이날 아침에 ‘여행을 떠나기 전에 4강 첫 번째 후기는 쓰고 가자’라는 목표로 6시에 일어나 무려 3시간동안이나 컴퓨터를 붙잡고 있었지만 잘 써지지 않더라. 어떻게 써야겠다는 흐름이 세워졌지만, 막상 써지는 내용은 썩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 한 줄 쓰고 몇 분 쉬고, 또 한 줄 쓰고 몇 분 쉬고를 반복하며 골머리만 썩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버티어내니 운 좋게도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고 ‘이쯤에서 만족하고 그냥 업로드 할까, 급하게 마무리 짓지 말고 여행을 다녀와서 다듬어볼까?’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결국 그렇게 급하게 마무리 짓고 후회하게 될 바에야 여행을 다녀온 후에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듬어서 올려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글을 쓰고 가려던 계획도 지키지 못했고, 모처럼 여유로운 아침을 누릴 수 있던 기회도 날렸다. 차라리 욕심을 내지 말고 그냥 아침의 한적함을 즐길 생각이었다면, 일찍 일어날 이유도 없었고 느긋하게 밥을 먹으며 그 시간을 오롯이 즐겼을 것이다. 그랬으면 여행을 떠나면서 이렇게 마음 무겁게 떠날 이유도, 피곤에 절은 모습으로 떠날 이유도 없었으리라. 이렇게 본다면, 과한 욕심은 현재의 순간도 망가뜨리고, 앞으로 닥쳐올 순간도 무너뜨린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겪고 보니, 불연 듯 지훈이가 떠오르더라. 지훈인 올해 초에 갑자기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수학문제집을 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학교에서 하는 활동들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작년까지만 해도 “공부를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는 말을 하던 녀석이니, 올해 그 말을 한 것 자체는 엄청난 발전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나처럼 욕심만 앞서다 보니, 제대로 공부를 하는 것도, 일상적으로 학교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도 작년까지만 해도 학교에 결석하지 않고 다니며, 시간에 맞추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는데, 그렇게 조급해지는 순간부터 결석하는 횟수는 늘어났고 수업 시간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빠지게 되었다. 공부에 대한 불안이 어찌나 높은지, 밤엔 불면증에 시달리며 자지 못해 학교에 나와서는 비몽사몽인 상태로 있다가 가기도 했다.
이건 정확히 이 날 아침에 내가 빠졌던 어리석은 모습과 똑같았다. 욕심이 생기고 그에 따라 조바심이 생겨서 그날 아침을 누리지 못했듯이 지훈이도 지금 당장 자신이 잘 해나가던 것들도 할 수 없게 되었고, 후기도 마무리 짓지 못했듯이 지훈이도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지훈이도 나도 똑같은 실수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 지금껏 그 한계를 여실히 느꼈다면, 이제부턴 마음을 다잡고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조바심을 낼 것도 없으니, 그저 주워진 현실 속에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 해나가면 된다. 앞서는 마음은 진정시키고, 조바심은 억누르며 이 순간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면 그 과정을 통해 현실을 미래의 희생물로 바치거나, 조바심에 모든 것을 빼앗기는 어리석은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나도 앞서는 마음을 방치한 탓에 몸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과연 이번 여행을 맘껏 즐기다 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