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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Oct 26. 2021

자료 조사의 즐거움

모르는 세상과 만나는 이야기


글을 쓰려면 자료 조사를 해야 합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과 다르게 글은 세상에 문자로 남으니 좀 신중하게 되지요. 대략 알고 있는 것을 막상 쓰려니 정확한 말이 필요해서 찾으러 가거나, 사실 관계를 확인하거나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글 흐름상 주제에 관련된 설명을 한 문단 정도 이야기하고 들어가야 할 것 같거나, 특정 용어를 (간략하지만 정확하게) 설명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완전히 내게 있었던 일만 쓰지 않는 이상 글쓰기를 위한 자료 조사는 필수지요. 이런 것을 일일이 찾아보기가 보통 귀찮게 치부되곤 하지만 저는 글을 쓰려고 온갖 문서들을 뒤지는 자료 조사가 무척 재미있습니다. 재미를 넘어 즐겁다고 할까요?





지금 연재하고 있는 일상 풍류를 리뷰합니다 매거진에서는, 자료 조사로 소개하는 물건을 만든 가게 홈페이지를 가장 많이 참고합니다. 가서 가게가 창업한 내력, 제품이 지향하는 바를 읽어보고 온라인 샵 페이지에 들어가 봅니다. 시리즈로 출시한 제품이라면 시리즈 설명이, 상품 개별 페이지에는 향이라면 어떤 테마로 만들어진 향인지, 재료는 무엇인지, 어떤 의도로 조향했는지 같은 설명이 제법 상세하게 쓰여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시리즈는 이 가게에서 생각하는 향기의 면모들을 꽃이나 바람 같은 구체적인 요소로 형상화한 것 임을 새삼 알게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장소나 시를 테마로 한 제품이라면 그 내력을 알게 됩니다. 


일본 고전 시 중에 5·7·5·7·7 로 된 운율을 가진 와카(和歌) 형식이 있는데, 이런 노래에서 제품 테마를 따 오기도 하지요. 그러면 테마가 된 시를 현대어로 옮기면 어떻게 되는지, 시를 읊은 인물은 누구인지, 시인의 심상은 어떻고 그 심상이 향으로 표현되었을 때 어떻게 나타나는지 등을 찾아 봅니다. 


이런 내용은 제품에 동봉된 해설에 적혀 있을 때도 있고, 인물에 대한 내용은 보통 직접 찾아 보면서 알게 됩니다. 그러면 리뷰하는 제품을 즐기는 재미도 두 배! 가을의 쓸쓸함과 벌판 위로 떠오르는 달이라니 무척 아름답지 않나요? 이 기획이 미술관과 향당 사이 콜라보레이션으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이런 디테일을 찾아보고 확인하고 전하는 일은 확실히 즐겁습니다. 시와 장소와 향기, 향당과 미술관이라니 문화와 문화 사이 교류를 엿보는 기분이기도 하지요.






교토 훈옥당 향들 중에는 교토 일대에서 이름난 장소를 테마로 하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장소에 대한 설명을 정확하게, 그리고 실감나게 붙이기 위해 저는 지도부터 위키피디아, 관광 공사 지역 소개글, 사적지나 절이라면 공식 홈페이지에서 알려주는 내력, 또 사진이 듬뿍 포함된 서로 다른 계절의 여행기 다섯 개쯤 등등을 찾아보곤 합니다. 그러다 보면 꼭 그 장소에 직접 들렀다 온 기분이 나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도 무척 상쾌해집니다. 마치 여행 대리 체험이랄까요.



'아름다운 산' 이라는 이름의 미야마(美山) 기슭에 있는 메밀꽃 피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

호수와 정원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우지의 뵤도인(平等院),

그 유명한 청수사(清水寺)의 이름이 유래했다는, 오토와 산에서 흐르는 맑은 샘물.


여기저기 여행을 다녀 볼 수는 있겠지만 세상에 있는 모든 곳에 갈 수 없고, 여러 번 방문하지 않는 이상 모든 때의 풍경을 알 수 없으며, 장소에 관한 모든 상세한 지식을 알 수도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료 조사로 찾게 되는 구체적인 정보들은 새롭고도 풍요롭습니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무궁무진함이랄까요?


자료 조사로 알게 되는 사실들은 커리큘럼을 따라가는 강의로 배우는 것도 아니고 백과사전 목록을 순서대로 읽는 것도 아닙니다. 유튜브에서 알고리즘이 추천해 준 영상을 보는 것도 아니지요. 내가 관심이 있는 주제를 시작으로 꼬리를 물고 펼쳐지는 구체적인 정보들이고, 이것들을 직접 찾아 나가는 탐구의 과정입니다. 사람이 지식을 알아 가며 즐거워하는 순수한 기쁨입니다. 저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에 대해 조사하니, 이런 자료 조사를 하면서 내 일상에 관련 있는 물건이 어떤 배경과 역사를 가졌는지 세세히 알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물건 하나로 보이는 세상의 시야가 단지 물건 하나일 때보다도 더욱 넓어지고 내가 세상과 조금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이 듭니다.


이렇게 자료 조사의 즐거움에 흠뻑 빠져 있다 보면 종종 원래 필요한 것보다도 더 많이 파고들어 버릴 때도 있는데, 이 또한 지식의 꼬리물기를 한껏 즐기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살면서 그 글을 쓰지 않았다면 결코 알 일 없었을 사실들을 시시콜콜하게 알아가는 기쁨. 그 디테일은 체험과도 비슷합니다. 제가 진짜로 교토 여행을 갔을 때, 자그마한 가게에서 하는 다도 체험 클래스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저는 그 가게 안에 있던 딱 네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한 대기 의자와 사선으로 놓인 목조 건물 안의 지붕과, 그 날 왔던 비와 비에 젖은 자갈이 깔린, 가게로 들어오는 좁은 골목을 알 수 없었겠지요.


그런데 제가 만약 훈옥당의 선향, 오하라의 코스모스에 관한 리뷰 글을 쓰지 않았다면, 저는 교토 근교에 코스모스가 많이 피는 들판이 있다는 사실부터, 그 들판을 넘어 이끼 정원이 무척 유명하다는 산젠인(三千院)으로 들어가는 돌길과 산사 지붕에 내려앉은 단풍의 아름다움, 가을 속 불상의 고즈넉함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하라(大原) 산젠인(三千院)
사진 : Patrick Vierthaler


그러고는 어머나. 알고 보니 제가 가지고 있던 찻사발은 산젠인을 테마로 한 그릇이더군요? 처음에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저 모양과 채색이 예뻐서 사게 되었습니다. 예쁘다고는 하지만 모르고 보면 앞면에 그려진 그림은 그저 알록달록한 얼룩처럼 보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게 나무에 달린 과일인가? 소나무와 꽃인가? 하고 알쏭달쏭했었는데요,


사진 : 백이나


하지만 산젠인의 단풍과 이끼 정원을 알고 보면 이 모습은 꼭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든 10월의 정원 정경입니다. 이리저리 자료 조사를 하며 탐구하는 즐거움에 빠져 있다 보면 때때로 이렇게 우연히, 알던 것과 새롭게 아는 것이 이어지는 일도 생깁니다. 그럴 때는 꼭 모래밭에서 빛나는 보석을 찾아낸 것처럼 얼마나 즐거운지요!


이렇게 두근두근한 글쓰기와 이렇게 두근두근한 자료 조사의 즐거움. 그 두 가지가 있기에 저는 꽤 오랫동안 이 글들을 쓰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써 가고 싶은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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