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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 Aug 29. 202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9 인종 명종실록

예만 중시했던 망조의 기운

중종반정으로 정계에 복귀한 대신들은 왕권 강화를 위했던 조선 최악의 군주 연산군의 피바람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신들의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틈만 나면 세력 분쟁에  여전히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는데 집중하며 민심은 나 몰라라 하는 일이 많았다. 민심을 저버리고 국제적인 정세에도 둔감했던 대신들의 행보는 훗날 조선의 운명을 바꾸는 씨앗을 뿌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농업국가였던 조선은 흉년이 들면 먹고사는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세금 수취에도 문제가 생기는데 세종대왕 때처럼 과학 기술을 장려하여 천체를 관측하거나 농업을 발전시키려는 모습은 없었다. 물론 조선 후기 실학의 등장으로 백성을 위한 학문의 발전이 있기도 했지만 세종대왕 이후 맥이 끊어진 점은 조선의 발전을 막아버린 악재라고 생각한다.


 누가 권력을 차지하느냐에만 급급했던 그들은 중종 때부터 대신을 통해 대신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명종 때도 나타났으며 이신제신(以臣制臣)의 처세를 보인다. 재상 중심의 나라를 꿈꾼 정도전의 바람이 이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대신들의 바람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정치가 아닌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욕만 가득한 정치였다.


 특히 태종의 안목이 뛰어났기 때문일까 외척의 세력이 득세하여 대윤과 소윤의 대립은 왕권을 약화시켰고 눈치만 보는 왕을 만들었다. 연산군의 폭정을 이미 경험했던 대신들은 막강한 힘이 왕의 손에 주어지면 또 다른 피바람이 불 것이라 예상했는지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고 권력을 누리기 위해 왕권 강화를 필사적으로 막았다고 생각한다.


 무색무취의 정치는 중종 이후에도 인종과 명종에게 그대로 전수되어 무늬만 왕의 모습을 하고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그런 군주였다. 중종이 오랜 재위 기간을 누렸기에 인종의 세자 시간은 무려 25년이나 되었으며 오랜 세자 기간만큼 준비된 왕으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는듯했다. 하지만 인종은 1년도 안 되는 너무나도 짧은 재위 기간 때문에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준 떡을 먹고 독살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인종 사후 왕위에 오른 경원대군은 명종이 되는데 아직 어렸기에 조선 두 번째 수렴청정을 하게 되며 문정왕후가 실질적인 여왕의 노릇을 하게 된다. 중종의 세 번째 부인으로 아들을 낳을 때부터 왕위에 대한 야욕이 있었다고 평가받는 그녀는 대신들 못지않은 유학 엘리트로 남다른 정치적 식견의 소유자였다. 다만 첫 번째 수렴청정과는 달리 왕보다 앞에 서서 자신의 견해를 전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말이 수렴청정이지 성렬대비인 문정왕후가 여왕이나 다름없었다.


 을사사화를 통해 성렬대비는 10년 동안 정적이었던 대윤 세력을 일망타진하고 소윤의 중추인 윤원형을 중심으로 자신의 세력을 견고히 다진다. 하지만 윤원형은 20년 넘게 자신의 주머니만 채우는 엄청난 사욕을 부리며 권세가의 삶을 살았고 왕실보다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한 대신이자 당시 왕보다 뛰어난 권세를 누리는 삶이었다.


 정치적 기반을 견고히 한 성렬대비는 불교 중흥에 힘썼는데 도첩제를 통해 승려가 되는 길을 만들고,  봉은사 주지 보우를 중용하여 불교에 심취했었다. 이것이 승유억불 정책의 조선 유학 사회에 반기를 불러왔으며 훗날 성렬대비에 대한 악평에 일조하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말의 효시가 되기도 하였다.


 막강했던 그녀의 권력도 유한한 삶을 끝으로 막을 내리며 명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단 2년이란 시간만 허락되고 명종 역시 중종과 같은 행보를 보이며 수렴청정 20년 기간을 중심으로 자신의 재위를 마치게 된다. 재위 22년을 보냈지만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에 아직 젊디 젊은 34세였지만 뒤를 이를 후사가 없어 조선 최초로 방계 하성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나름의 지혜로 왕위에 올랐지만 방계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항상 하성군을 괴롭히는 트라우마가 된다.


개인적으로 이때 조선 왕실의 정통이 끊어져 버린 조선은 나라가 한 번 바뀌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세종대왕 때를 조선의 최고 전성기라 생각하는 이유도 세종대왕의 수많은 업적 때문이 아니라 유교의 나라를 표방하며 학문의 발전과 함께 농업, 천문, 과학기술의 발전까지 다양성을 추구하던 사회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소격서까지 설치해 무속신앙을 존중하기도 하였다.


 대신들의 권력욕으로 각종 암투가 계속되던 이때는 중앙 정계가 아닌 지방에서 학문의 꽃을 피운 시대였다.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시작으로 퇴계 이왕과 남명 조식 등이 후대를 키우며 자신들의 학파를 만들어 조선 중기의 붕당 정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성리학 중심의 학문 발전은 실생활과 엄청난 한계가 있었고 성리학에만 집중하여 다른 분야를 배척했다는 최악의 실수가 있었다 특히 국방력을 약화는 선조 재위 기간 동안 조선의 운명을 바꿔놓은 왜란을 초래했다.


 ‘동방예의지국’이란 우리나라의 별명은 예를 숭상하는 문화에서 비롯되었지만 사림의 문제는 예만을 중시했고 예가 아닌 것은 배척하고 지우려고 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 시대의 다양성이 사라져 버린 인종 명종 시대는 이미 망조의 기운이 있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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