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1년 차는 아니고, 디자이너 전직 1년 차
2018년은 몇 년 동안 쌓아둔걸 마음껏 쏟아내는 해였다. 3년 같은 1년이었다. 덕분에 올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헷갈리는 상황에 이르렀고, 12월이 오기 전에 연말정산 영수증 처리하는 느낌으로 2018년에 있었던 일을 정리해봤다.
3월부터 인턴으로 일하던 Above에서 8월부터 정식 인터랙션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다. 시작하자 마자는 새로운 매니저와 정규직의 현실을 마주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10월부터는 일렉트로룩스에 디자인 컨설턴트로 파견을 나가서 붕 뜬 기분으로 하반기가 끝났다. 일단 올해는 이렇게 마무리했지만, 내년에는 조금 더 재미있고,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해보고 싶다.
2017년 8월부터 2018년 6월까지, 11개월 동안 이어진 하이퍼 아일랜드로의 여정도 드디어 끝이 났다. 즐거움이라면 이제부터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제대로 일할 수 있다는 점이고, 아쉬움이라면 더 이상 스톡홀름에 학교 친구들이 없다는 점과 학생 할인이 끝났다는 점이 있겠다. 내가 누구인지 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고 값진 경험이었다. 두 번은 사양하고 싶지만.
작년부터 1년 동안 디자인 매거진 CA에 한국에는 아직 생소한 스웨덴의 디자인 스쿨 하이퍼 아일랜드를 소개하고, 무엇을 배웠는지 소개하는 글을 연재했다. 내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다시 문장으로 옮겨 적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았고, 글이 타인의 삶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다음에는 가벼운 소재로 짧은 호흡의 글을 써보고 싶다.
지난 5월, 퍼블리의 우창 님, 현 님, 보라 님과 인터랙션 디자인 콘퍼런스 Interaction 18에 다녀온 이야기를 담은 <인터랙션 18, 디자인으로 연결하다>를 발행했다. 1월부터 5월까지 시간 날 때마다 글을 썼다. 매일 아침 메일함 가득 담긴 피드백을 읽고, 새벽에 깨어있는 우창님과 회의를 하던 게 오래전 일 같은데, 생각해보니 올해였다, 세상에. 정말 많이 배운 프로젝트. 이런 대규모 글쓰기 프로젝트는 잠시 쉬어야겠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원티드 Practical Studies UX 디자인 코스에서 만난 기리 님, 이연 님, 윤정 님, 은주 님과 여름부터 진행해오던 <프로젝트 히읗>을 한글날에 공개했다. 실제 개발까지 해보는 게 목표였으나, 능력의 부재로 이번에는 컨셉과 UX, UI, IxD, BX 디자인만 진행했다. 한글이 조형적으로 얼마나 세련되었는지, 시차가 7시간 나는 곳에서 원격으로 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마음 맞는 팀원이랑 일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비록 말은 서로 잘 안 통했지만?!) 깨달은 프로젝트였다. 앞으로는 일 년에 이런 프로젝트 더도 덜도 말고 딱 두 개씩만 해야지.
겨울에 잠깐 동안 한국에 있는걸 은경님이 발견해주신 덕분에 디자인 팟캐스트 <디자인 테이블>에 게스트로 참여했다. 광고인 3년 차가 어쩌다가 스웨덴까지 가서 디자인을 공부하게 되었는지, 하이퍼 아일랜드는 어떤 학교인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금 들어보니 그때는 참 포부가 넘치는 사람이었네. 몇 년 후 다시 게스트로 참여한다면,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매달 디자인 매거진 CA에서 진행하는 CA Con에서 <나만의 브랜드>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제가 이래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라는 자기 자랑과 자의식 과잉으로 점철된 참으로 뻔뻔한 발표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뭐라고 브랜드에 대해 논하고, 자기 브랜딩에 대해 논한단 말인가. 스스로도 참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브런치에 같은 내용으로 글을 쓰면서 제목을 '나만의 브랜드 뻔뻔하게 만들기'로 정했다.
오거나이저로 참여하고 있는 IxDA 스톡홀름 밋업에서 <Prototyping Futures>라는 제목으로 회사 동료와 발표를 했다. 자신도 없고, 일 만들기도 싫어서 안 하려고 했는데, 동료가 같이 하자고 해서 그냥 질렀다. 나는 우리가 어떻게 프로토타이핑의 힘을 믿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동료는 무엇을 프로토타입 하며, 여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농담을 섞어가면서 가볍게 발표한 덕분에 스탠드업 코미디언 같다는 피드백을 받았고, 동료는 TED 강의 같았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꽤나 즐거운 경험이었다. 발표 내용은 IxDA Stockholm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고, 내용을 조금 다듬어서 글로도 옮길 예정이다.
듀오톤의 다영 님께서 잘 봐주신 덕분에 덜컥 강사가 되었다. 나는 UX/UI 디자인 입문 온라인 코스에 인트로 부분과 디자인 프로세스 부분만 맡아서 큰 부담은 없었지만, 처음 하는 일인 데다가 부족한 지식으로 누군가를 가르치려니 이렇게 곤욕스러울 수가 없었다. 광고나 브랜딩이면 조금 더 나았으려나. 그래도 디자인 프로세스 부분은 하이퍼 아일랜드에서 열심히 공부한 덕에 자신 있게 했다. 수강자 분들이 재미있게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2월에 프랑스 리옹에서 열린 인터랙션 디자인 컨퍼런스 Interaction 18에 다녀왔다. 여기에서 인터랙션 디자인 협회(IxDA) 스톡홀름 지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을 알게 되어 2월부터 오거나이저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매달 모임을 주최하고, 행사를 운영하고, 사진을 찍고, 소셜 미디어를 관리하는 일을 한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지 않고, 다양한 사람을 알 수 있어서 일단은 꾸준히 하고 있다.
한국 디자인 진흥원에서 스웨덴 디자인 리포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한 달에 두 개씩 스웨덴 디자인 관련 글을 쓰는 일로, 분량도 길지 않고, 기간도 넉넉한 데다가, 담당자분의 피드백이나 요청사항도 딱히 없어서 쉽고 편한 일에 속한다. 다만, 늘 월말까지 미루다가 급히 마무리하는 바람에 글이 영 마음에 안 들어서 떠벌리고 다닐 수가 없었다. 내년에도 혹시나 하게 된다면, 조금 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하이퍼 아일랜드와는 졸업 후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워낙 많은 수의 한국 학생들이 나에게 학교에 대해 문의하고, 그 중에 상당 수가 실제 면접까지 진행하기 때문에 학교 측에서 조금이나마 보답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이 관계가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잘 지켜보면서 도와줄 수 있는 걸 도와주기로 했다.
여름에는 서울에 돌아와 원티드에서 진행한 Practical Studies UX 디자인 코스를 들었다. 여기에서 알게 된 다영 님과의 인연으로 디자인 에이전시 듀오톤에 리크루팅 카피를 쓰고, 진행하는 브랜딩 프로젝트의 아이데이션 워크샵도 진행했다. 하이퍼 아일랜드 졸업하고 진행한 첫 번째 워크샵이었는데, 꽤 재미있었다. 한국에 갈 때마다 이렇게 한 번씩 하면 좋을 텐데.
가을에는 Framer가 주최한 디자인 컨퍼런스 Loupe에 다녀왔다. 프레이머 X가 출시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인데 무리해서 진행한 느낌이 역력했다. 이어서 스웨덴의 디자인 에이전시 Doberman이 주최한 디자인 컨퍼런스 Frontiers.design에 참가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온 연사도 참신하고, 운영도 매끄러워서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구글에서 주최한 디자인 컨퍼런스 SPAN 2018에 참석했다. 마찬가지로 인상적인 컨퍼런스였다. 상세한 후기는 브런치 글에 적었다.
회사에서 한 일은 쓰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라니, 살아있는게 용하다. 12월에는 비행기 탈 일도 많고, 중순부터는 휴가여서 생각할 시간이 많다. 내년이 오기 전까지 이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내년에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천천히 생각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