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방향 : 인생의 모든 순간, 혼자 10걸음 vs 10명의 한걸음
한 사람의 열 발자국보다 열네 놈의 한 발자국이 더 낫지 않겠어
말모이
어릴 때부터 반 석차 전교 석차 전국 석차로 줄을 세우는 사회에서는 경쟁을 안 하기가 어렵다. 커서는 대학 서열로, 졸업하면 회사 규모로, 결혼하면 아파트, 차, 자산 등등. 성적표 나오듯이 숫자로 딱딱 나온다.
그 상황에서 내가 열 발자국 앞서 나가고 싶어 하는 마음 역시 옳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머리로는 안다. 다 같이 더불어 사는 사회, 다양성을 인정해주고 포용력이 높은 사회, 게이지수가 높은 사회가 훨씬 더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눈앞의 상황에 급급해하기보다는 더 멀리 보고 더 크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나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자질. 그리고 내 아이도 그런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한다.
하지만... 이게 진짜 말로는 쉽다 정말로...ㅜㅜ 막상 내가 겪는 일상에서 벌어진다면 사람 속 터진다.
어른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고 가르치지만, 과연 어디까지가 적정선일까?
어른은 처음 보는 아이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아. 만약 모르는 사람이 도움을 청한다면 어른을 불러서 도와줄 거라고 해.
친구들과 어울려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지만, 과연 어디까지 어울려야 할까?
친구가 네 장난감을 빼앗아 가서 속상했구나 너도 같이 놀고 싶었는데... 규칙을 정해서 모두가 재밌게 놀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볼까?
약자를 배려하라고 하지만, 어디까지가 선의로 받아들이게 될까?
친구가 도움을 요청할 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고 그대로 도와주면 돼. 그 전에는 친구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시간이 좀 걸려도 기다려주자.
남에게 친절하고 친구에 둘러싸여 지내다가 혹시나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볼 기회가 없으면 어떡하지?
어려서부터 양보하다가 커서도 호구 잡혀서 단물 쪽쪽 빨리고 팽당하면 어떡하지?
어디까지가 메너이고 어디까지가 호의이고 어디까지가 상식적인 친절인 거지?
사실 나도 지금 모르는데 아이는 알까? 그리고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내가 살아온 세상과는 또 다른 차원일 텐데, 거기서 방황하는 아이에게 바른 길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사실 이 바른 길이라는 게 내 기준의 바른 길이지, 아이가 원하는 건 또 다를 텐데.
Some of them want to use you
Some of them want to get used by you
Some of them want to abuse you
Some of them want to be abused
Sweet Dreams (Are Made of This)
우리 회사에서 틀어놓는 라디오에서 매일같이 나오던 노래. 그 노래 가사가 나의 뒤통수를 친다. 그래 사람들이 원하는 게 다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이용당하고 싶을 수도 있고 그리고 나를 이용해버리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도 있구나.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거구나.
나는 어렸을 때 뭔가 경계심에 가득했던 것 같다. 주고받는 게 당연했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더 가까이했다. 순수하게 어떤 사람을 보지 못했던 것도 같다. 관계를 통해 사람을 정의하기도 했다.
베프, 친구, 친구의 친구, 학교 선배, 동아리에서 만난 사람 등등. '내 사람'과 그 밖의 사람을 구분하기도 했다. '내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사람들은 더 특별하고 더 소중하니까. 사람 마음이란 게 누구나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내가 해외에 살면서 한 가지 더해진 게 있다. 바로 한국인과 외국인의 구분을 지었다. 한국인에게 기대를 더 많이 해서일까? 한국인에게 더 바라는 게 많아졌을까? 말이 통할 것이라고 나를 이해해줄 것이라고 오히려 내가 그런 마음을 갖게 됐다.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은 말한다.
"나에게 '친구'라고 불리는 사람이 없다"고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말하지 않는다"고
홍길동인가?ㅋㅋㅋㅋㅋ
관계보다는 개인을 보는 미국 문화. 회사 상사며 교수님이며 나이 차이 있는 친구며 심지어 엄마 아빠까지 이름으로 부를 때도 있는 문화. 처음 본 사람도 그냥 만나면 좋은친구!!!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뽀 까지는 아니더라도 포옹 정도?
그 사람이 가진 가치보다는 그 사람 자체를 보는 것, 사실 우리가 이성적으로는 열망했던 관계가 아닐까?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할까?
시댁에 가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집에 사람을 초대하기 좋아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시부모님 덕분이다.
그래서 시동생의 전전 여자 친구도 만나고 그녀의 현 남자 친구 소식을 듣는다
시동생의 전 여자 친구와도 다 같이 칭구칭구 그녀의 가족도 '그냥' 만나러 다녀오셨다고...
거기에 멀뚱멀뚱 나 혼자 동양인. 내 안의 유교 걸이 꿈틀거린다. 아직 결혼도 안 한 시동생의 현 여친도 아니고 전이랑 전전이랑 친해지는 건가? 혹시... 콩가루? ㅋㅋㅋ
하지만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다. 그 관계를 뛰어넘어 사람을 봐야 할 것.
자신이 살아가는 그 환경과 문화에 맞춰서 적응해야 하겠지. 덕분에 내 편견을 깨뜨리고, 시야를 넓히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남편도 우리가 한국에서 살았더라면 한국 특유의 문화를 존중하며 다르게 행동했을 것이다.
요즘 인기 드라마 우영우를 보며 2017년도에 처음 나온 미드 <Atypical> 가장 먼저 떠올랐다. 고기능 자폐아가 주인공이고 심지어 돌고래 / 펭귄을 좋아하는 것까지 비슷하다.
그보다 훨씬 전인 2009년에 나왔던 드라마 <United States of Tara> 다중인격장애를 다루지만 장르는 코미디이다. 나도 최근에 봤는데 무거운 내용일 수도 있지만 재밌게 접근해주어 부담이 덜했던 것 같다.
다만 이런 드라마를 보며 내가 만약 그 상황이었더라면, 내가 만약 그 주변 사람이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내가 태어났는데 엄마가, 아이를 낳았는데 자식이, 또는 학교를 갔는데 반 친구가, 회사를 갔는데 직장 동료가.
나는 편견 없이 타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을까? 그게 누구더라도 그 사람만의 방식을 인정해주고 존중할 수 있을까?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고 배려할 수 있을까?
초등학교 때 선생님 말씀을 잘 듣던 나는 우리 반의 장애학우와 거의 일 년 내내 짝꿍을 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선생님이 시켜서 이것저것 잡다한 일을 해줬는데, 그중 하나가 알림장 써주기. 이유는 짝꿍이 안으니까. 그래서 며칠을 써줬는데 그 아이의 엄마가 나에게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걔를 도와줬다가 싫어했다가 챙겨줬다가 짜증 냈다가 하다가, 마지막 날 본인이 납땜(?)해서 만든 작은 로봇 인형 같은 걸 주었다. 고슴도치 모양에 털이 보들보들해서 내가 만지고 놀았던 인형.
과학과 수학에 엄청남 재능을 가졌던 아이. 그리고 그 아이를 일반 학교에 보내는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벌써 몇십 년 전 사람들의 인식도 다르고 생활환경도 달랐던 그때.
있는 그대로 상대를 보고 다양한 사람들과도 더불어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사람과 더불어 살아본 경험이 있는 남편이 신기하다. 모두에게 따뜻한 남편이 좋은 사람이긴 한 건 분명하다.
2. 교육의 목적 : 공부 공부 공부, 맹모삼천지교 vs 호기심 천국
3. 사랑의 표현 : 금이야 옥이야, 현실적 환경 vs 정서적 충만
4. 인생의 의미 : 엄마는 왜 나를 낳아서, 이생망 vs 오래오래 행복하게
5. 자유의 존중 : 미국 시댁 방문 일화, 해쳐모여 vs 각기도생
6. 육아의 목표 : 낳실 제 괴로움, 희생과 지원 vs 존중과 자립
7. 효도의 정의 : 아들, 딸, 며느리, 사위 도리 vs 각자의 인생과 만족
8. 마음의 방향 : 인생의 모든 순간, 혼자 10걸음 vs 10명의 한걸음
9. 자아의 형성 : 너는 어떤 삶을 살까, 사랑받는 vs 사랑 주는
https://brunch.co.kr/brunchbook/kim70064789
https://link.inpock.co.kr/loveyour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