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의미 : 엄마는 왜 나를 낳아서, 이생망 vs 오래오래 행복하게
몇 년 전, 스스로 낳음 당했다는 아들이 보낸 장문의 문자가 화제였다. 생활고에 지친 아들의 절절한 호소, 가난에 한이 맺힌 울부짖음, 그리고 사는 게 바빠 아이를 챙기지 못했을 찢어지는 부모의 심정까지... 처절한 시대상의 반증
"죽지 못해 산다" "이번 생은 망했다" "태어나지 말 걸 그랬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태어난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나는 아이를 낳으면 예쁜 것만 보여주고 좋은 것만 사용해서 애지중지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세상의 온갖 풍파에서도 내 아이만큼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나길. 치사하고 더러운 꼴은 내가 볼 테니 너는 꽃길만 걸었으면 하는 마음. 아마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러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남편을 만나고 육아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많이 바뀌었다.
남편은 아이를 사랑을 다해 키우겠지만, 부모가 매번 아이의 문제에 개입할 수는 없으며, 아이 스스로 어려움도 직접 겪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헬리콥터 맘이나 싸커 맘이 될 생각은 나도 없었지만, 아이가 상처받는 모습을 볼 자신도 없었던 나는 처음에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회복 탄력성 resilience. 마음의 근성. 칠전팔기의 정신. 바닥을 찍어도 다시 올라올 수 있는 근육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뜻이었을 것 같다. 부모가 매 순간마다 넘어지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고, 쓰러지지 않게 받혀주기만 한다면 절대 키울 수 없는 힘.
인생을 살면서 마냥 행복하기만 할 수는 없다. 이 단순한 진리를 나는 회피했던 것이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행복과 고난이 교차할 때 그 고난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남편은 아이에게 그런 회복탄력성과 불확실성을 견디는 힘 (소극적 수용력) 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남편은 자연을 사랑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했다. 자연과 밀접하게 생활하고 자연에서 치유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자연과 어울리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자연이라고는 인공 식물원 밖에 가보지 않은 나는 큰 감흥이 없었다. 남편의 고향에서 미대륙의 광활한 자연 풍경을 보기 전까지는.
시댁에서 보았던 대자연을 떠올리면 그때의 느낌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 압도적인 풍경에 사로잡힌 느낌,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실감 나게 하는 그 느낌, 그러고 나서 현실 사회로 돌아오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을 하찮은 고민들. 그렇게 나의 시야를 더욱 넓혀주는 경험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을 탐험하는 경험을 충분히 갖는다면 나중에 커서도 자연으로 돌아가기가 더욱 쉬울 것 같다. 숲 속에서 몇 시간이고 야생 길을 걷는 훈련, 그 속에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 동물들의 흔적을 관찰하고 꽃과 나무의 이름을 기억하는 마음. 어렸을 때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이 사진으로만 영상으로만 봤다면 전혀 상상도 못 했을 순간...
우리의 인생에서 성공이란 어떤 의미일까? 한국에서 중산층의 기준을 맞추면 성공한 삶일까? 돈, 명예, 지위가 행복을 보장해줄까?
우리 남편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인생의 의미를 본인이 찾는다는 것이다. 아파트 평수, 차 배기량, 연봉 등의 수치화된 성공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싶은 인생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실천해나가는 인생.
사회에서 성공이 보장된 길을 가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는 것. 나이가 들어도 꿈이 있다면 다 포기하고 도전하는 사람. 결혼을 해도 경제적인 책임감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사람. 현실보다는 순수한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 결과보다는 그 과정을 중요시하는 사람.
물론 표면적으로는 모두 맞는 말이다. 그리고 자신은 정말 순수하게 행복할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 진심으로 만족하고 살 수도 있다.
시어머니께서는 남편의 결정을 존중해주신다.
"네가 잘할 거라 믿어."
"지금 많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잘 알아."
"네가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네가 최선을 다 했으면 그걸로 충분해."
"네가 행복하다면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응원 한다."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정한다는 건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길러진 뿌리 깊은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에서는? 현실 파악 못하고 이상을 좇다가 풀 뜯어먹고 살 수도 있다. 내 친구들은 아파트 청약 당첨돼서 자가에 살고, 명품 가방 선물 받고, 안정적인 직장에, 아이 낳고 정착하는데... 나는 내 월급을 쏟아부으며 여전히 월세 살고 직업도 수입도 변변치 않지만 사랑만 보며 행복할 수 있을까?
"그래 가지고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려고 그래?"
"세상은 만만하지가 않아요~"
"남들 다 하는 데 너는 뭐하니? 빠릿빠릿하지 못해?"
"너 도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너는 공부만 해. 엄마가 어련히 알아서 다 해줄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어려서부터 이런 소리만 듣고 자랐다면,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개척하고 내가 정한 길을 홀로 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수 있겠다. 사회에 순응하는 것만이 생존의 길이라고 느껴질 수 있겠다.
모두가 똑같은 목표를 향해 앞으로 전진 전진, 조기교육에 월반에 학업도 빨리빨리, 무엇을 위해 그렇게 경쟁하며 살까? 대체 우리는 어디를 그렇게 빨리 가길 바라는 걸까?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가 정말 중요할까? 속은 썩어 들어가는데 겉으로만 행복해 보이면, 그래도 그 인생 성공했다 할 수 있을까? 실상은 바뀌지 않는데 그게 무슨 소용일까? 반대로 찢어지게 가난한데 마음만은 충만하다면 진정 성공한 인생일까?
아이에게 주고 싶은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내 아이가 힘든 길을 선택한다면 진심으로 응원해줄 수 있을까? 위험한 일을 선택한다면, 어렵고도 어려운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한다면, 너의 결정을 존중해줄 수 있을까? 상처받을 것이 분명한데, 그 상황을 예방하려는 충동을 참아낼 수 있을까? 아이가 이겨낼 수 있다고 믿고 개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가 상처받는 걸 두고만 볼 수 있을까?
예쁜 것만 보고 예쁘게만 살길 바라는데... 똥을 찍어 먹고 있으면 지지라고 못 먹게 하고 싶으면 어쩌지? 무엇이 진정 아이를 위한 일일까? 나의 아이는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할까?
2. 교육의 목적 : 공부 공부 공부, 맹모삼천지교 vs 호기심 천국
3. 사랑의 표현 : 금이야 옥이야, 현실적 환경 vs 정서적 충만
4. 인생의 의미 : 엄마는 왜 나를 낳아서, 이생망 vs 오래오래 행복하게
5. 자유의 존중 : 미국 시댁 방문 일화, 해쳐모여 vs 각기도생
6. 육아의 목표 : 낳실 제 괴로움, 희생과 지원 vs 존중과 자립
7. 효도의 정의 : 아들, 딸, 며느리, 사위 도리 vs 각자의 인생과 만족
8. 마음의 방향 : 인생의 모든 순간, 혼자 10걸음 vs 10명의 한걸음
9. 자아의 형성 : 너는 어떤 삶을 살까, 사랑받는 vs 사랑 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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