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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뮨 Nov 08. 2019

이 자와 같은 삶

flexible를 추구한다

매드포갈릭에서 르곤졸라 피자를 제공받기 위해 영풍문고에서 무언가를 구매해야 했지만 난 망설임 없이 고를 수 있었다. 나는 필요하거나 갖고 싶다고 해서 즉시 사지 않기 때문에 늘 사고 싶은 목록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고민 없이 선택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15cm 자 _ 1,000원


flexible 한 (말랑말랑한) 15cm 자이다. 남편은 책을 사면 일일이 투명 책비닐로 포장을 한다. 물론 본인의 것만 그렇게 할 뿐 '나에게 왜 포장을 하지 않느냐?'를 단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다. 성향 자체가 참 많이 다른 우리 부부이다. 나는 뭔가를 요구하거나 권유하는 타입이고, 남편은 강요는 고사하고 권유도 별로 하지 않는 타입이다. 책을 아주 깨끗하게 보는 남편의 책은 중고판매에서 늘 A 등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점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로 책을 보던 나는 씽큐베이션을 하면서 깨끗하게 볼 수가 없어졌다. 아무리 인덱스를 붙인다고 해도 어디에 뭐가 있었는지 서평을 쓸 때뿐만 아니라 토론을 하다 보면 찾아야 하는데 깨끗한 상태로는 쉽지 않았다. 자고로 책은 깨끗이 봐야 한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형광펜으로 표시를 하기도 하고, 줄을 긋기도 하는 나로 변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책에 글씨까지는 못 쓰겠다. (어떤 분들은 그곳에 자신의 생각을 쓰기도 하고, 자신만의 개념을 메모하는 것도 봤는데 나도 때가 되면 그렇게 하겠지만, 아직까지는 아니다ㅋ)



완전히 깨끗하게 보던 내가 형광펜을 칠하고, 줄을 긋는데 그냥 긋지는 않는다. 자를 대고 그어야 속이 편하다. 그런데 기존에 있던 딱딱한 자는 책의 곡선면에서 이상하게 그어져서 되려 더 지저분했고 끝 문장까지 그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이 말랑말랑한 자를 발견하고서는 너무 좋았다. 책이 완전히 평면으로 펴지지 않는데 곡선에서도 잘 그어지니 정말 깔끔한 것이 마음에 딱 들었다. 게다가 부담 없는 1,000원이라는 가격에 주야장천 이 자만 사용한 덕분에 지금은 눈금이 거의 지워졌다. 기존의 자는 투명한 색이었고, 주로 파란색으로 줄을 많이 그으니 색이 침착되기도 해서 이번에는 파란색 자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1,000원이든 10만원이든 그것이 나에게 소확행이면 소확행인것이다. 사람마다 느껴지는 가치는 다 다르니 말이다.



어떤 모임에서 내가 이렇게 책을 읽을 때 자로 줄을 긋는데 이 말랑말랑한 자가 좋다고 말을 했더니 다들 놀라셨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자를 대고 줄을 긋는 분은 없으셨는지 졸지에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다수결의 함정을 요즘 들어서 많이 느꼈다. 3명 중에 2명이 의견이 같으면 나머지 1명이 바보가 되는 경우도 있고, 다수가 단합으로 어떤 것을 밀어붙여서 불합리한 것이 통과되는 사례들도 많이 보았다. 그래서 다수결이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고, 맞는 것도 아닌 것을 점점 더 많이 느끼므로 그곳에 있는 10명의 사람이 자를 대고 줄을 긋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본다고 한들 나는 움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매주 월요일 오전에 하고 있는 스터디 모임에서는 돌아가면서 교수자가 되어서 맡은 과목을 리딩하면 나머지 스터디원들은 줄을 그으면서 맥락을 잡는 형식인데 그 모임에서는 자가 없으면 큰일 나는 분위기다. 줄을 칠게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손으로 줄을 긋기에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다 자를 선호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은 자를 대고 줄을 긋던지, 손으로 그냥 긋던지 자유라는 것이다. 어떤 게 맞는 것도 아니고, 또 어떤 게 틀린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타입을 만나면 되게 이상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토끼눈을 하고 놀라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것은 조심해야 하는 부분 중의 하나라는 것을 디퍼런스 공부한 이후에 절실히 느끼고 있다. 남이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개의치 않는 성향은 상관없지만, 그런 사소한 표정과 억양에도 '내가 이상한가?'하고 놀라는 성향도 있기 때문에 실례가 될 수도 있고, 자칫 예의가 없는 이미지를 줄 수도 있기 때문에 나와 달라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현실에서 많이 느낀다.




아무튼 나는 이 자를 보면서 달라도 틀린 게 아니라는 디퍼런스의 슬로건이 생각났고, 성향의 색깔이 다소 확실한 나  또한 지금까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실수를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 말랑말랑한 자처럼 부러지지 않고 부드럽게 휘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만 만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들로만 이 세상이 구성되어 있지도 않고, 게다가 요즘은 반대 성향의 매력에 더 이끌리기 때문에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디퍼런스 상담사가 되고 싶다.




씽큐베이션 도서는 과감 없이 막 사면서(솔직히 그냥 사지는 않는다. 할인을 꽤나 받을 수 있으니 좀 막사는 경향이 있기 하지만) 교과서는 돈 주고 사기 싫었다. (교과서가 너무 오래되어서 돈을 주고 살 가치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들이대 정신으로 선배들한테 책을 얻었는데 어떤 책은 형광펜이 정갈하게 쳐져있어서 되려 좋았다. 어떤 게 중요한지 이미 체크되어 있기도하고 말이다. 그런데 어떤 책은 손으로 그어진것뿐만아니라 일관성이라고는 1도 없는 연필 자국이 나를 힘들게 했다. 참고 집중을 하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결국 지우개로 몇십 장을 지웠다. 그리고는 다짐했다. 그냥 다음부터는 깨끗한 책을 사자고 ㅋㅋ




다른 성향을 받아들이고, 다른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아예 노력을 하지 않는 것과 계속해서 생각해보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은 천지차이다. 그러므로 나는 되도록 해당되는 성향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려고 한다. 디퍼런스 전문가들도 성향이 다 다르기 때문에 직접 심정을 들으면 조금은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우리가 반대 성향을 오해하고, 지레짐작으로 생각하는 케이스가 상당히 많을 뿐이지 사실 정확하게 의중을 묻지는 못하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갖고 있는 생각이 다 똑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반대 성향을 이해하는 데에는 꽤나 도움이 되었다. 똑같지는 않지만 같은 파스톤 계열, 같은 원색 계열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다.




나는 앞으로도 플렉시블 한 자로 줄을 긋겠지만, 또 언젠가는 책에 막 메모를 하면서 책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를 왜 쓰냐며 이상하게 쳐다보는 분에게도 의연하게 말할 것이다. "저는 정갈하게 선 그어져 있는 게 더 맘이 편해져서요"라고 말이다. 옛날 같으면 "왜 손으로 그어? 정신없지 않아?"라고 미련 곰탱이 같이 반문했겠지만 그럼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름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flexible 하되 "자"라는 정체성은 갖고 있는 더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람들과 토론과 소통을 하면서 일방적으로 나의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네~"라고 의연하게 반응할 수 있는 디퍼런스 상담사로 점점 더 온전하게(완전하게 가 아님) 성장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졸꾸해야겠다.



#30일 글쓰기 8day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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