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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소설 무>, 12년의 침묵을 깨다

카카오페이지를 통해 돌아온 문성실 작가의 이야기

우리나라 고유의 신화와 전설, 시대상과 우리 정서가 어우러진 한국형 판타지 <신비소설 무>. 문 작가는 12년을 한결같이 기다려준 독자들에게 한층 업그레이드된 이야기를 들고 돌아왔다. PC통신 시절의 전설적인 판타지 소설은 카카오페이지에서 두 번째 전성기를 맞았다. 문 작가가 <신비소설 무>와 긴 침묵에 대한 이야기를 보내왔다.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작가는 수많은 은혜를 입게 된다. <신비소설 무>를 쓰는 데는 한 무녀와의 만남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친한 후배와 근처에 계신 선녀보살을 찾았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렇듯 앞날에 대한 고민과 걱정 때문이었다. 그 만남에서 우리는 무녀의 기구한 삶에 대해 들었다.


어느 날 신을 받지 않으면 가족을 차례로 데려가겠다는 말이 무녀의 귓가에 들렸다고 한다. 그 말이 무서워서 그는 13년 동안 교회를 다녔다. 그사이 남편이 사고로 죽었고, 수학여행을 간 열여덟 살 딸은 산에서 실족사했다. 딸이 죽던 날 귓속에 다시 음성이 들렸다. “다음은 아들이다.” 그는 오랜 신앙 생활을 청산하고 무녀의 길을 선택했다.


무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에서 스토리가 흘러나왔다. 서정범 교수가 평생에 걸쳐 적은 무당들의 이야기 <무녀별곡> 시리즈를 비롯해 무속과 관련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것을 기초로 창작을 시작했다. 1997년 심리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연구와 실험을 핑계로 밤새기가 일쑤인 시절이었다. 실험 분석이 새벽에 끝나면 기숙사로 돌아갈 수 없어서 실험실에 갇혀 아침을 기다렸다. 그 무료한 시간 동안 나는 스토리텔링을 시작했다.


학업을 병행하며 소설을 쓰는 게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돌아보니 그것이 작가로 살기 위한 숙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제일 먼저 글을 선보인 곳은 대학가 통신망이었다. 거기에 단편을 내놓다가 차차 장편 연재를 시작했다. 호평이 늘어나더니 기다리는 독자들도 생겼다. 용기를 얻어 1997년 12월 공개 통신망인 하이텔에 글을 올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시간 날 때 틈틈이 적어 내려갔기 때문에 글이 올라오는 날짜도 들쑥날쑥이고, 퇴고를 제대로 하지 못한 조잡한 글임에도 많은 독자가 생겨났다.



순식간에 통신망이 <신비소설 무>에 대한 설왕설래로 가득했다. 가장 치열한 토론 주제는 <퇴마록>과의 비교였다. 비판이 속상하기도 했지만 당대 최고의 퇴마 판타지 소설과 비교 대상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고된 일정 중에도 열심히 글을 쓴 덕에 수많은 독자가 생겼고, 연재한 지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출판 제의를 받았다.


1999년 1권 출간을 시작으로 단행본 14권이 나왔다. 당시 성행하던 책 대여점마다 <신비소설 무>가 걸렸고, 인기 도서 순위에서도 <신비소설 무>라는 제목이 빠지지 않았다. 단순한 행운은 아니었다. 준비된 자만이 다가오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말처럼, 나는 머릿속에 있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지난한 과정을 겪었고 그로 인해 다가온 작가라는 숙명의 기회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책이 나온 후에 몇 번 무녀를 찾았다. 감사 인사를 하며 책을 건네자 무녀는 내 걱정을 해주었다. “뭐 이런 걸로 글을 썼니? 네게도 끼가 있어서 그런 거야. 잘 다루고 조심해야 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편도 딸도 빼앗겼는데 신이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니야. 내가 무지했던 거야. 왜 두려워하고 도망만 쳤을까. 신을 받고 나서 이렇게 편안한데… 남은 애들도 잘 키우고 잘 사는데… 죽은 딸이 지금 내게 와 있단다. 그래서 내가 18세 선녀보살인 거야. 이제 뭐가 서럽겠니.”


그 말을 들으며 무녀의 생에 대해 안도했다. 동시에 미신으로 치부되는 우리 무속 신앙이 가여웠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 금기시되고 소외된 우리 전통 신앙을 재조명하고 싶었다. 우리네 삶에서 한발 떨어진 ‘그네들의 세상’이 아닌 일상생활 속에 신비한 이야기를 녹여내려 애썼다. 동시에 삶에 대한 따스한 시각, 짙은 휴머니즘, 권선징악을 통해 선(善)의 가치를 담고자 했다. 그 모든 이야기를 흥미롭고 재미나게 풀어가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 여겼다.



작가로서의 숙명을 끌어안고도 한동안 글을 풀어내지 못하고 놓아버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출판사와 얽힌 복잡다단한 문제가 터졌다. 출판사의 투명하지 못한 일처리에, 밀어내듯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이 맞물리자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결국 2004년 <신비소설 무> 14권이 나온 상태에서 손도, 머리도 멈춰버렸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글 밖의 삶도 삐걱거렸다. 박사 과정 동안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아는 것을 조합하고 정리해 맛깔나게 전달하는 것은 참 의미 있고 즐거웠다. 학생들의 반응도 좋았다. 한 학기가 끝날 때마다 강의 요청은 늘어갔고 새로운 학교에서도 연락이 왔다. 하지만 시간강사는 보따리 장사꾼에 불과했다. 임신과 출산으로 딱 일 년을 쉬었더니 강의 평가에서 받은 최고 등급도, 수업을 잘하는 강사라는 평판도정확히 일 년 만에 사라졌다. 모교에서 예의상 챙겨준 강의 하나를 제외하고는 남은 강의가 없었다. 열심히 하면 보답을 받는다는 단순한 진리가 허상이 되자, 깊은 실의에 빠진 건 당연했다.


글에서도, 심리학에서도, 연달아 펀치를 맞고 쓰러졌다. 시간은 많아졌지만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문득 영화 <꽃잎>의 원작자 최윤의 말이 생각났다. <꽃잎>이 영화화되면서 우리나라 대표 작가 반열에 오른 그분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른 일을 하면 글쓰기가 내게 휴식이고 쉼터가 되지만, 내가 전직해서 글만 쓰면 그때부터 글은 내게 돈벌이가 되잖아요. 돈 버는 글 대신 편안한 휴식으로 글을 써야 저는 ‘진짜 글’을 쓸 수 있어요.” 그 말이 뼛속 깊이 파고들었다.


나 역시 삶이 안정적일 때는 아무리 바빠도 써지던 글이 복잡한 일들로 머릿속이 어지럽자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가장 급한 일은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랑했지만 앞날이 보이지 않는 심리학과 결별하고 수능을 준비했다. 심리학 연구자보다는 상대적으로 글 쓸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교사의 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인터넷 강의와 문제집만으로 독학했고, 집중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2008년 교육대학에 입학했다. 교육대학에서 자식뻘 되는 학생들과 지내며 보람찬 고생 끝에 임용에도 합격할 수 있었다. 초등교사로서 직업적 안정을 찾자 그제야 글이 써지기 시작했다.



<신비소설 무>에는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나온다. 인연과 업보, 되갚음이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벌어진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10여 년간 잠들었던 책이 복간되는 데도 소설 같은 스토리가 있었다. 숙명 같은 이야기다. 내게 <신비소설 무>는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늘 신경 쓰이고 마음이 가는 나의 업보가 바로 <신비소설 무>의 완결이었다.


삶이 안정을 찾는 순간, 다시 노트북을 켰다. 더는 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을 끌어온 것을 자책하며 다시 글을 썼다. 오랜만에 쓰는 글이라 연습이 필요했다. 출판 후 공유된 글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소중히 다루어주신 분들이 있다면 작가 역시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했다.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아 꾸준히 글을 쓰며 감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몇 달의 연습 후에 드디어 <신비소설 무>를 손보기 시작했다.


홀로 작업을 시작한 지 며칠 뒤에 기적이 일어났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02로 시작되는 번호였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02로 걸려오는 전화는 십중팔구 “고객님~”으로 시작한다.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 내가 전화를 받았다. 지극히 이례적이었다. 당연히 퉁명스러운 말투였을 것이다. 끊을 준비를 하며 전화를 받는 내게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문성실 작가님 전화인가요?”


‘교수님’이나 ‘선생님’에 익숙한 내게는 낯선 호칭이었다. 10여 년 만에 ‘작가님’이라는 호칭을 들었다. “제가 문성실이 맞습니다”라는 답변에 수화기 너머의 음성이 몹시 떨렸다. 그분은 스스로를 출판사 대표라고 밝혔다. 출판사 ‘달빛정원’ 대표였다. 그는 나의 예전 전화번호의 중간 번호를 바꿔가며 낯선 이들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고생하며 작가를 찾아주었다는 말에 내가 더 떨렸다. 고맙고 감사했다.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나는 그것을 ‘운명’이라 불렀다. 남녀 간의 만남에만 운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쓰며 준비하던 작가와 그 작가를 찾아준 고마운 출판사 사이에도 운명은 존재한다. 쉬운 만남이 아니라면 그 유대감은 더욱 깊다. 그렇게 운명이 이어준 인연이 <신비소설 무>를 완결로 이끌었다.



<신비소설 무>를 다시 작업하면서 이전에 썼던 글의 4분의 1 정도를 버렸다. 아까웠지만 밀어내듯 찍어냈던 글, 기계적으로 적었던 글을 전부 들어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에피소드 역시 전부 재작업했다. 예전 글 중 한 문단도 그대로 살아남은 것이 없을 정도로, 새로 쓰다시피 했다. 중심 포맷은 종이책이었다. 독자들이 책을 접하기 2년 전인 2014년부터 개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출판을 준비하는 동안 10여 년 전과 지금의 문화가 상당히 다르다는 걸 알았다. <신비소설 무>가 잠자던 10여 년 동안 세상이 새롭게 진화한 것이다. <신비소설 무>의 특성상 종이책만 고집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었다.


출판사 쪽에서 전자책을 종이책보다 먼저 출간하자는 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여러 전자책 플랫폼을 보고 플랫폼의 성격을 분석했다. 그러다 카카오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기본적인 문법을 검증받은 작품이 소개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카카오페이지에서 100만 뷰가 넘는 ‘밀리언 페이지’들을 읽는 동안 내게 부족한 부분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신비소설 무>를 오픈할 플랫폼을 찾던 출판사 측에서도 카카오페이지 담당자가 가장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나는 판매보다도 작품에 우호적인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카카오페이지를 선택한 이유다. 특히 더 많은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는 카카오페이지가 가장 적격이었다.



결국 2016년 1월 4일, 카카오페이지에 독점 연재로 <신비소설 무>가 공개되었다. 떨리는 순간이었다. 반응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뜨거웠다. 긴 세월 동안 잊지 않고 <신비소설 무>를 기다려준 수많은 독자를 만났다. 독자들은 불성실한 작가가 돌아왔다며 놀랐고, 작가는 다시 독자들을 보며 놀랐다. PC통신 시절에는 조회 수로 인기를 가늠했지만 카카오페이지에는 책을 읽는 사람 수와 댓글, 작품 평점까지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살아 있는 반응이 그대로 전해졌다. 독자들의 감상평도, 응원도, 요구 사항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수많은 독자를 단번에 만나게 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카카오페이지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댓글 하나하나를 확인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좋아요’를 달았다. 2016년 12월 14일, 나는 <신비소설 무>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공개된 순간부터 글이 완결에 이르기까지, 일 년 동안 <신비소설 무>는 카카오페이지의 ‘문학’ 분야에서 내내 1위를 유지했다.


이별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만족스러운 완결이라는 평을 들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작가에게 만족스러운 글은 독자에게도 만족스러운 듯했다. 작가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 역시 정확한 반응이 돌아왔다. 조금도 감출 수 없는 이 커뮤니케이션에 나는 점점 진정한 작가가 되어갔다. 참으로 감사하고 고맙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또다시 입는 순간이었다.


10여 년 동안 연재를 중단했던 작가에게 카카오페이지는 또 다른 가능성을 알게 해주었다. 우선 <신비소설 무>를 읽었던 40~50대 독자들도, 처음 이 책을 접하는 10~30대 독자들도 카카오페이지 안에 골고루 있었다. 이 모든 이들이 작품을 접하고 있으니 확장력도 놀라웠다. 나처럼 오래 글쓰기를 중단한 작가가 있다면 카카오페이지 문을 두드려보기를 권한다. 다시 힘을 내서 파이팅한다면 분명 카카오페이지를 통해 좋은 독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다만 한 가지 욕심이 남았다. 바로 카카오페이지의 ‘밀리언 페이지’다. 사랑하는 작품의 이름을 그곳에 올렸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사랑하는 낙빈 일행과 작별하지 않을 핑계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들은 완결 후에도 다시 한번 고생을 했다. 2018년 1월, ‘외전’이라는 이름으로 독자들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언젠가 ‘밀리언 페이지’에 이름을 올릴 때까지 낙빈 일행은 독자들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신비소설 무>와의 이별을 미뤄두었다.



<신비소설 무>가 사랑받은 만큼 한국 환상문학 작가로서 갚아야 할 빚이 많다. 작가로서 큰 바람이 하나 있다면, 우리 정서를 대표하는 ‘한국판 해리포터’를 세계에 소개하는 것이다. <신비소설 무>의 주인공, 낙빈이를 그런 마음으로 만들었다. 어린 낙빈의 어깨에 여러 가지 부탁을 실어두었다. ‘‘한국의 해리포터가 되어 세계 만방에 우리 것을 널리 펼쳐주렴. 마법과 기사 대신 우리 무속과 민간 신앙을 알려주렴. 우리 아이들이 우리 산과 청동가지방울에 자부심을 갖게 도와줘.’


무속 신앙에 대한 오해를 풀고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다는 내 오랜 바람은 첫 단추를 잘 꿰어준 낙빈이 덕분에 작은 진전이 있었다. 선입견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한 분들에게도 새롭고 신비로운 세계를 소개했다고 자부한다. 이제 낙빈이의 등을 밀어줄 새로운 주인공들이 필요하다. 지금껏 판타지 소설은 마법과 빗자루에 익숙한 이들을 위한 자리였다. 서양에는 1937년 톨킨(J. R. R. Tolkien)의 <호빗>과 <반지의 제왕>처럼 80여 년간 쌓아온 세계관과 문학적 토대가 있다. 부러운 만큼 막중한 책임을 느끼는 부분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잊게 만든 데 대한 아쉬움도 크다.


그래서 앞으로 쓸 작품들의 방향을 정했다. 최근 기사를 통해 카카오페이지가 중국과 일본, 미국 등에 콘텐츠 수출로 의미 있는 성과를 내고 있다고 들었다.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우리 신화, 신비롭고 놀라운 세계관을 선보일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카카오페이지가 열어주리라 기대하고 있다. 나의 여생 동안 한국 전통문화를 중심으로 한 환상문학의 축을 세우는 것이 커다란 욕심이다. 우리의 <반지의 제왕>을, <해리포터>를 만들어 우리 꿈을 다른 나라에도 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세계의 청소년들도 우리 신화와 전설에 공감하도록 문화의 지평을 넓힐 수 있기를 바란다.


카카오페이지
<신비소설 무> 3회분 무료 이용권
(선착순 3,000명 / 2018년 5월 31일까지 등록 가능)

1. 카카오페이지 앱 설치 (구글플레이/앱스토어)
2. 첫 화면 > 좌측 상단 메뉴 > '이벤트/쿠폰' 선택
3. 이용권 텍스트 [카카오신비소설무] 입력 후 등록하기


◼︎ 문성실 작가의 <신비소설 무> 바로가기



매거진 <Partners with Kakao>의 5호는 이렇게 구성됩니다. 

<Partners with Kakao> 5호 목차

파트너를 위해 건강한 토양을 만듭니다 / Mason's talk

◼︎ Partners

천상의 목소리, 데이터의 힘을 입다 / 뉴런뮤직
7년간 사랑받은 만 원짜리 팔찌 / 크리스탈샵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 돋보기로 전하다 / 이플루비
<신비소설 무>, 12년의 침묵을 깨다 / 문성실 작가 (본 글)
시를 짓듯, 쌀을 기르다 / 풀풀농장

우리는 모두 AI 어린이입니다 / Kakao스쿨
작가, 영감(靈感)을 공유하다 / 브런치북

◼︎ with Kakao

모두에게 성장의 기회를 / 링키지랩
같이툰, 웹툰에 가치를 더하다 / 같이가치 with Kakao
마음 듬뿍, '선물하기' / 카카오 선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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