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오늘도 비가 내리고 있다. 불가마 같은 더위가 연일 이어지더니 금세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깊은 새벽, 귀뚜라미들의 떼창소리에 이미 가을 냄새가 묻어 있다.
최근 <커피와 달마>라는 책을 세 번은 넘게 읽었다. 작년 겨울 도서관에 갔다가 커피와 달마가 어떤 연결 고리로 이어질까 하는 작은 호기심에 읽게 된 책이었다. 기대보다 더 재밌어서 솔솔 읽혔다. 무엇보다 배움이 크고 여운도 많이 남았다.
한 젊은 사업가가 기울어 가는 회사를 어떻게 손 쓸 방법도 못 찾고 하루하루 안팎으로 힘겨워한다. 어느 점심시간, 오랜만에 구내식당에서 마주한 임원과 직원들도 사장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깍듯이 예의를 차리거나 쭈뼛거리며 거리를 둔다. 모래알 같은 밥알을 욱여넣고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하고 회사 주변을 배회하다 인근 야산에 자리한 <달마암>이라는 암자에 이른다. 기와를 얹은 담장아래로 분홍빛이 선연하다. 진달래다. 산 것의 숨결이라곤 한 줌도 없을 것 같은 도시의 한 귀퉁이에 이렇듯 여린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건드리면 뚝, 하고 꽃물이 떨어질 것만 같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용기 내어 낯선 세계로 발을 들인다.
가벼운 바람에 풍경소리가 땅그랑, 하고 공기를 흔들 만큼 암자는 조용하다. 어느새 평온해진 마음으로 두리번두리번 거닐다가 연못 건너편 툇마루에 걸터앉아 계시는 자그마한 체구의 노스님을 발견한다. 노스님은 인자한 눈빛으로 마당에서 놀고 있는 강아지를 보듯 이 낯선 젊은이를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다.
“담장 아래 진달래가 하도 좋아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불쑥 찾아들었습니다”
노스님은 꽃을 보고 궁금증을 품는 이 젊은이에게 싱긋이 웃으며
“불심이 달리 있나요, 그런 게 바로 불심이지요.” 하고 이른다.
(불심이라니, 종교엔 관심도 없고 믿지도 않는 내게 불심이랄 게 있을 턱이 없을 텐데..)
젊은이는 이왕 절을 찾았으니 기울어 있는 회사를 일으키는데 불교가 과연 어떤 일을 해줄 수 있는지 여쭙고 싶었다. 불손하게도 특별한 답을 기대해서라기보다 일종의 시비를 거는 셈이었다.
불교가 무엇이네 종교가 무엇이네 하고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서로 통성명을 하고 낼 다시 오기로 한다.
"내일 오려거든 커피나 한 잔 더 뽑아 오게나. 향이 참 좋구먼. 너무 비싼 거면 놔두고."
다음날 커피 두 잔과 각설탕 몇 개를 챙겨 다시 노스님을 찾는다.
"음, 향도 좋고 맛도 좋군. 우리 중들도 이런 걸 좀 알아야 하는데 말이야. 볕도 좋은데 우리 산책이나 할까?"
그렇게 스님과 한 중생과의 인연이 향 좋은 커피 한 잔을 고리로 이어진다.
스님은 불교의 가르침이란 한마디로 '지금 이 순간의 완전한 행복'이며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존중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일러준다.
"자네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지금 먹고 있는 음식, 지금 입고 있는 옷,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그대로 두고도 당장 완벽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려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야."
"지금 이대로 행복을 누리게 해 준다고요?"
"그럼, 물론이지. 자네는 행복해지기 위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필요가 없어. 스스로 행복하다는 걸 인정하기만 하면 되지."
"아휴 스님, 지금 행복은커녕 불행의 늪에서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까 고민 중인데 행복하다고 인정하라시는 겁니까? 최면이라도 걸어 주시려구요?"
"냉철한 눈으로 행복한 자네를 발견하라는 소리지."
"행복한 구석이 있어야 발견하지요. 스님. "
"자네 내 말을 궤변으로 듣지 말게. 자네에게 행복한 구석이 없어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야, 자네가 보려 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한 구석이 없는 것이지."
요 대목에서 난 귀가 솔깃해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지금 이대로 행복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매혹적인 말씀인가! 그런데 순간 스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너무도 명쾌하게 내 가슴에 쿵 하고 와닿았다. 궤변으로 듣지 마라시는 당부에서, 이 마법 같은 말씀에 신뢰가 더해졌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내 삶을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 무던히 애써왔다. '행복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구하는 것이고, 과거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현실에 존재하며, 항상 족함을 알고 감사한 마음을 품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은 찾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행복에 대해 나름 결론도 내려보았다. 그러나 살다 보면 어느 순간 행복은 달아나고 몹시 힘들고 절망스러운 순간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데 스님의 이 말씀으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행복의 실체를 바라보는 것이 좀 더 쉬워졌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건강하고,언제든 휴식이 되어 주는 내가 가꾼 집이 있고, 산책할 수 있는 예쁜 마을과 공원이 있고, 가슴 충만하게 하는 책과 음악, 영화가 있고, 향기로운 커피, 꽃과 나무, 눈과 비, 노을과 구름이 예쁜 하늘, 밤하늘의 달과 별, 산과 바다, 이른 아침 맑은 새소리, 개와 고양이, 그리고 친절한 사람들의 미소... 천지가 완벽한 삶의 환희로 가득하다.
"중도란 무엇입니까?"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평안과 행복으로 이끄는 유익한 행동들이지"
"그러니까, 그 유익한 행동이 구체적으로 뭐냐구요?"
"무엇이 유익한지는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네? 몰라서 지금 스님께 여쭙는 게 아닙니까?"
"아냐, 자네는 알고 있어. 단지 실천하지 않을 뿐이지."
"불교는 완벽한 세계를 머릿속에 그리고 그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야. 지금 당장 경험하고 있는 '현실'에 관한 이야기지. 지금 자네가 경험하고 있는 순간순간이 평온하고 만족스럽고 지극히 즐겁다면 사실 자네에게 불교란 필요 없어."
스님은 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건강한 사람에겐 약이 필요 없다는 비유를 든다. 즉, 정신이 평온하고 건강하면 불교가 필요 없다는 뜻이다.
"불교를 배우려 들지 말게"
"스님,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하란 말씀이십니까?"
"불교를 이용하게"
"이용하라고요?"
"그렇지, 중요한 건 자네의 삶이야. 자네의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방법으로 부처님을 비롯한 여러 성자들의 말씀을 이용하게."
"자네, 아까 무엇이 중도인지, 무엇이 유익한 행동인지 물었지? 내가 말해주면 자네 정말 실천할 건가?"
"그럼요,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시면 꼭 실천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한 가지만 가르쳐 주지. 아침에 일어나면 꼼꼼히 이를 닦고 깨끗이 세수를 하게."
나는 몇 해 전 '108배 천일'을 해내었다. 스스로 뿌듯함도 있고, 흔들림 없이 내면의 고요가 잘 유지되는 편이다. 간혹 한 번씩 요동치더라도 바로 알아차리고 회복이 빠르다는 것이 큰 변화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과의 갈등에서 평정심이 쉽게 깨지곤 했고, 가끔씩 게으름도 피운다. 108배 천일에 비하면 이 닦고 세수하는 건 너무 간단하고 쉬워서 매일 아침 눈뜨면 양치와 세수부터 해보았다. 그런데 이 행위 하나로 그날 하루가 확실히 많이 달랐다.
꼼꼼히 이를 닦고 깨끗이 세수를 하고 난 후 클래식 채널이 고정되어 있는 라디오를 켠다. 창을 열어 맑은 공기를 들이고 간단히 스트레칭을 한다. 그런 다음 집안을 정갈하게 정돈하고 화초들과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가족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이 작은 행동이 나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까지 평안과 행복을 느끼게 하는 유익한 행동의 시작인 것이다.
"내가 참선을 시작하게 된 까닭을 한번 들어볼 텐가? 내가 참선을 하게 된 큰 원인 중 하나는 이상주의적인 노력의 괴로움과 무력감을 너무도 절실하게 경험했기 때문이야."
내가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의 무력감을 매번 느끼는 것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스님이 경험한 무력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참선이 해보고 싶어졌다. 참선에는 앉아서 하는 좌선, 누워서 하는 와선, 일어서서 하는 입선, 움직이면서 하는 행선 등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좌선을 소개한다.
"저도 참선을 해볼 수 있을까요?"
"자네, 진심으로 참선을 배울 준비가 됐는가?"
"예, 스님."
"좌선이란 바른 행동이야. 몸을 바르게 하고 단정하게 앉는 것. 그것이 좌선이지. 좌선에 의해 우리들의 신체는 비뚤어져 있는 곳이 바로 서고 막힌 곳이 뚫리게 돼."
스님은 척추를 바르게 세우기 좋게 방석 뒤쪽을 두툼하도록 접고 그곳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좌선할 때 가장 주의할 점은 척추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좀 큰 좌구(방석)를 준비하고 엉덩이놓을 부분을 반 접어 그 위에 걸터앉는다. 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가 수직으로 세우고 엉덩이가 약간 빠진 상태에서 척추를 바로 세운다. 그다음 목뼈를 수직으로 세우고 턱을 가슴 쪽으로 당겨 정수리 뒷부분이 천장을 찌르듯 목 근육을 쭉 편다.
그 상태에서 입은 자연스럽게 다물고, 혀는 입천장에 붙이고 호흡은 되도록 편안하고 길게 쉰다. 시선은 턱을 당긴 상태에서 자연히 떨어지는 곳에 둔다. 눈을 부릅뜨거나 일부러 가늘게 뜨지도 말고 억지로 감지 않도록 주의한다.
다음은 가부좌를 트는 방법이다. 양 발을 두 허벅지 위에 올리고 앉는 결가부좌와 한쪽 다리만 올리는 반가부좌가 있다. 결가부좌는 초보자에게 쉽지 않을 수 있으니 처음엔 반가부좌로 시작해서 익숙해지면 결가부좌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된다. 반가부좌 할 때 방향은 상관없이 편한 쪽 다리를 올리면 된다.
결가부좌
반가부좌
손 놓는 법
손은 교차한 다리 중 위에 놓인 다리 위에 반대쪽 손을 손바닥을 위로 놓고, 그 위에 다른 쪽 손을 손바닥을 위로하여 겹쳐 놓는다. 양손의 엄지를 붙여서 양쪽 손바닥과 엄지를 붙인 상태가 납작한 타원형이 되도록 하여 붙인 엄지가 배꼽 앞에 오도록 한다. 팔꿈치는 몸에서 약간 떨어지게 한다.
이 상태를 유지하며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된다.
심신일여.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하나가 바르면 다른 하나도 곧아진다. 좌선의 최종 목적은 우선 신체를 바루고 정신을 그에 따르게 하는 것이다. 즉, 올바른 신체가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자네가 정말 날 믿는다면 오늘부터 자기 전에 15분, 아침에 일어나서 15분씩 매일 좌선을 해보게."
"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15분 좌선하는 걸 가볍게 생각지 말게.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좌선을 한 것과 하지 않은 것을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야. 좌선을 통해 평온함을 몸과 마음에 끊임없이 침투시키는 것, 이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즐거움이야. 그런 생활의 축적이 곧 수행의 전부라고 할 수 있지."
"알겠습니다, 스님."
"좌선이 무엇이라고?"
"즐거운 여행이요."
"그래, 부지런히 해봐. 선정이 익으면 지혜는 자연히 나타나게 되어 있어."
나도 책에서 소개한 대로 두 달 넘게 꾸준히 좌선을 실천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양치와 세수부터 하고 15~20분간 좌선을 한다. 가만히 앉아있다 보면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온다. 그런 나를 자각하고 그저 현실의 나를 지켜보라 한다. 좌선이 곧 부처님의 행동이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고. 부처님과 한 몸이 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난 좌선하는 동안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픈 마음에 부처님 가르침이나 성자의 말씀을 담은 유튜브영상(주로 법정스님의 말씀이나 '거인의 어깨' '지혜의 바다'등의 명상 영상을 들음, 글 밑에 참고)을 틀어놓고 명상을 함께 하고 있다. 스님께서 아시면 엉터리 좌선이라고 나무라실지도 모를 일이지만 잡다한 생각들로 15분을 채우는 것보다는 나을 듯하여 그렇게 하고 있다. 이를테면 불교를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난 지금 베이글 반쪽을 노릇하게 구워 올리브유를 뿌리고 바삭 와삭 한 입 베어문다. 라디오에서는 제목도 모르는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다. 바사삭 소리와 쌉싸롬한 올리브향을 온전히 느낀다. 재잘대는 아침새의 지저김이 발랄하다. 지금 순간의 나에게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완전한 행복을 느끼는 것'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 순간엔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빌붙을 수 없다. 붓다가 가지는 평온한 상태가 이것과 같지 않을까?
우연히 책 <커피와 달마>와 연이 닿아 좌선을 알게 되고 삶이 더 향기로워졌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교에 대해서도 좀 더 쉽게 이해가 되었다. 독자들에게도 ‘좌선’을 소개하고 더 행복해지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글을 썼다. 글 서두의 섬세하고 예쁜 표현들은 작가의 책에서 그대로 인용하였다. 나머지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책을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린다.
내 여생이 허투루 낭비되지 않고 가치 있는 것으로 채워지도록, 그리고 고요한 물과 같이 잔잔한 삶이 되도록 그렇게 아름다운 마무리를차곡차곡 준비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