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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l 01. 2019

제1회 길 위의 개벽학

개벽통문-025

어제는 개벽하는사람들 정기모임이자 "<개벽>창간10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회> 발족, '길위의 개벽학 - 길을 떠나며' '독서공방' 행사를 한꺼번에 진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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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창간10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회는 "개벽하는사람들"이 그대로 그 사업을 떠안고 가는 형식으로 "준비위원장-김인환, 사무처장-최명림, 사무국장-박길수"로 구성하였습니다. 앞으로 1년동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사업을 전개해 나갈 예정입니다.(여러분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이 기념사업은 누누이 강조하듯이, 과거를 지향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깊고, 넓고, 높게 다시 개벽하는 동력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100년 전 개벽청년의 마음으로, 다시 개벽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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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개벽학은 우선 <개벽> 창간호가 있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하게 짚어 보고, 다음으로 개벽창간에 간여한 주요 인물들의 거주지를 알아보았습니다(국내 최초 ^^). 모두 9명(더 있으나, 이 날 거론한 인물은) 가운데 7명이 북촌 지역에 거주하였고, 오늘날 용산1명, 대학로 부근(이화동) 1명으로 분포하였습니다. 김기전, 이두성, 이돈화, 박달성, 방정환, 이정호, 차상찬, 이종린, 민영순 등의 거주지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면서, 그분들이 그저 역사속의 인물이거나 활자(개벽지) 속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 곁에 살았었고, 우리 안에 살아 있는 분들이라는 실감을 할 수 있었던 것이 크나큰 성과입니다. 이 일은 앞으로도 계속해 나갈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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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개벽> 창간호에 실린 광고들을 분석하였습니다. 개벽 창간호에는 모두 19개의 광고가 실려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 형편, 그리고 개벽이 '잡지'인 사정이 반영된 현황인 듯한데, 한약방(약재상) 광고가 6/19이고, 서점(서림, 서관, 출판사) 광고가 7/19입니다. 이중에는 '독립선언서'의 활판을 제작했던 최남선의 <신문관>이 있는데, 개벽창간호도 이 신문관에서 인쇄하였습니다(오늘날 을지로 2가 소재). 또 '광문회임시사무소'의 광고도 실려 있는데, 광고 내용으로 보면, 오늘날의 '출판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지식인들의 원고 모집) 이 광문회는 대구에 본사(?)가 있었는데,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던 단체이고, 그것은 광문회의 '자강사업'의 일환이었지요. 그밖에도 '민지개발' '학교설립' 민업확장' '경제진흥' 등을 추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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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의 광고 현황과 관련하여 19개 가운데, 천도교인 상회(상점)의 광고는 1편뿐입니다. 이를 두고 긴 시간 토의를 하였습니다. (1)천도교인이 전통적으로 '기업인'(산업)이 적었던 사정을 보여준다. (2)다시 말해, 천도교가 '농촌-농민기반'으로 성장해 온 사정이 반영된 것이다. (3)상업활동이 기본적으로 '이문'을 남기는 것을 기본으로 하므로 천도교의 교리 정서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상인들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4)천도교인 '상업-산업' 활동 부문 종사자에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못한 것은 천도교가 동학에서 천도교로의 개신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천도교청년들의 '신문화운동'에도 불구하고 '근대화(개화)'되지 못하고, '전근대적'인 체제와 의식에 머물러 버렸음을 반증하는 결과이다. (5)천도교청년당의 7대부문운동에 '노동' '상인'이 있었고, 노동운동 부문에서는 '고무공장' 운영 등의 사례도 있고, '농민운동' 부문에서 '협동조합(공생조합)' 운동의 사례가 있지만, 이를 조직적 체계적으로 승화 발전시키지 못하였던 상황도 있다. (6)창간호는 1920년 당시 상황이므로, 이후 1930년대까지의 전체 호수에 반영된 상황을 더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1920년은 교단의 주요 간부들이 모두 투옥되거나 도피하였고, 교단이 그 재판-옥바라지에 여념이 없던 때이므로, 창간호의 상황만 놓고 확대 해석은 경계해야 한다. (7)천도교(청년회)의 활동이 이념적이고 단편적인 데에 머물러, 장기적이고 토대구축적인 활동(학교설립 등)을 나아가지 못한 상황의 문제점을 현 시점에서 반성적으로 고찰해 볼 단서가 된다. 등등의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더 많은 이야기가 있으나, 생략 - 추후 다른 지면에서 상론) 또 '장춘관(음식점)' 광고도 실려 있는데, 이 장춘관은 천도교의 주요 단골 음식점(출장뷔페?)이기도 했고, 1920년 6월 6일에는 '개벽출판허가'를 받은 축하 피로연(말하자면, <개벽사> 개업식) 행사가 열린 곳이기도 합니다(아래 사진-광고 및 신문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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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광고 외에 개벽사 사고 2개가 실려 있습니다. 1개는 개벽 창간호가 압수되어 '호외'를 발간하게 된 사정을 알리며, 양해를 구하는 내용입니다.(압수, 삭제된 기사 목록 소개) 이 사고는 "사과광고[謝告]로 게재되었는바, 창간호 압수 직후 '호외'를 발행하면서 급히 편성한 페이지입니다. (그러나 이 호외마저도 온전히 발행하지 못하고 '임시호'로 간행하였습니다. 해서 지금 구할 수 있는 표지 중에 "개벽호외"라는 글씨에 '호이'를 붉은 줄로 지우고, 붉은 손글씨로 '임시호'라고 쓴 표지가 '최초의 개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이 임시호가 '완판'이 되어, 급히 추가로 '임시호'를 인쇄하였는데, 이때는 "개벽-임시호"를 모두 인쇄한 표지로 재제작하였습니다(이것도, 인터넷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사고는 "여러분께 고백하나이다"라는 제하의 사고인데, 이것은 창간호를 발행할 때의 본래 사고입니다. 그 내용은 개벽 창간을 1919년 말부터 준비해 왔는데 '여러 가지 사정 (당국의 불허 조치 등을 말함) '으로 시일이 경과하고, 그 내용중 많은 것들은 실을 수조차 없었으며, 남은 원고들은 '시사성'이 떨어지는 등, 개벽 창간호의 내용이 여러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으니 '해서(海恕-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여 주시라는 내용입니다. 구구절절한 그 내용이, 눈물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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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개벽 창간호 공부(인물+광고)를 마치고, 개벽의 길을 따라 걷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선 개벽사가 경운동으로 이전(1921.2.29)하였다가,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 2층'으로 이전(1924.10)한 뒤 해방 이후까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며, '백년기념관' 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궁을장 조각(현재 수운회관 앞 계단)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이어 덕성여중 앞, '천도교중앙총부' 옛터로 이동하였습니다. 이곳은 당시 주소가 '송현동 34번지'였고, 중앙총부가 있었으며, 천도교중앙총부가 경운동(현재 대교당이 있는 곳)으로 옮겨간 1922년 이후는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보성전문학교가 있던 곳입니다.) 이 중앙총부 바로 뒷집이 당시 천도교서울교구(한옥 2칸)이었고, 이 중 한 칸을 개벽사가 임차하여 이곳에서 개벽 창간호를 발행하였습니다. 그리고 1921년 2월호까지를 이곳에서 간행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기쁜 마음으로 출정의 심정을 더하여, 기념촬영을 하고, 그 밖의 장소들은 앞으로 차츰, 인물연구와 더불어 찾아보기로 하고, 자리를 인근의 '정독도서관(옛 경기고등학교)로 옮겨, 독서공방을 진행하였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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