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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Sep 26. 2022

여전히 헤매고 있습니다만

OO 중학교 독서동아리 선생님들께

OO 중학교 독서동아리 선생님들 안녕하세요! 김현희입니다. '왜 학교에는 이상한 선생이 많은가'를 읽고 질문까지 남겨주셔 영광입니다. 사실 제가 요즘 굴을 파고 은둔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더구나 '왜 학교에는 이상한 선생이 많은가'를 쓴 지 워낙 오래됐고, 발간 당시 이곳저곳을 돌며 너무 많이 떠들어서, 몇 주전 OO중학교 장선생님의 요청을 처음엔 고사했었는데요(ㅎㅎ). 동아리 소속 선생님들이 교직경력이 오래되지 않은, 고민이 많은 젊은 선생님들이란 장선생님 말씀을 듣고 굴 밖으로 살짝 머리를 내밀기로 했습니다. 정성스레 남겨주신 질문들을 읽고 나니 오히려 불러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슬슬 굴 밖으로 나올 채비를 해야겠습니다.


일단 짚고 넘어갈 부분은, 저는 선생님들의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전히 좌충우돌하고 있어요. 학교 생활 속에서 느끼는 공허, 무기력과 고군분투 중이고, 교직 전반기에 자주 느꼈던 분노가 환멸과 탄식으로 바뀔 때마다 황망해지기도 하고요. 그런데도 어째 선생님들이 주신 고민들은 남일 같지 않아요. 그러니 앞으로 제가 드릴 말씀은 선생님들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동료 교사의 의견 정도로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그럼.




1. 이 책을 쓰신 지 5년쯤 지나셨는데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 중에 지금은 생각이 달라진 부분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부분인지 궁금합니다.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왜 학교에는 이상한 선생이 많은가'는 2016년 봄, 제가 막 10년 차 교사가 되었을 때 토하듯이 썼고 우연히 연재가 시작됐습니다. 지금 다시 보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타임머신을 탄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제목이고요. 사회 경험이 쌓일수록 교직사회가 유달리 특이한 집단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상컨대 저는 어떤 직업을 가졌더라도 10년 차쯤에는 (언론인이었다면) '왜 방송국에는 사이코가 많은가', (법조인이었다면) '왜 법원에는 이상한 판사가 많은가'를 썼을 것 같습니다(ㅎㅎ). 굳이 따지자면 당시 제가 주장했던 모든 내용이 지금의 저로서는 모두 보완이 필요하고 아쉽습니다. 하지만 후회나 미련은 없습니다. 당시의 저로서는 한 발을 내딛기 위해, 한 번은 쓸 수밖에 없는 글이었거든요.   


그럼에도 특히 관점이 달라진 부분을 꼽자면, 아무래도 교사와 보호자의 관계 부분입니다. 최근 5-6년 사이 교사와 보호자의 관계와 신뢰가 급격히 악화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법과 감시, 소송 등이 학내에 난무하면서 여기가 학교인지 경찰서인지, 법원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요. 연재하던 당시에는 학부모에게 무작정 적대적인 일부 교사들을 보면서 '협력적 관계가 필요'하다는 선언적인 주장만 했었는데, 이제는 당위적인 주장보다는 제도적인 보완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3. 학부모와 협력적 파트너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지향점이지만 현실에서 악성 민원에 학교가 휘둘리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현재 한국의 학교는 '민원 공화국'이라는 자조 섞인 말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민원의, 민원에 의한, 민원을 위한 학교. 제가 중학교 상황까지는 잘 모르지만 주위 초등학교들의 상황만 봐도 심각합니다. 근본적인 원인을 파고들자면 한국이 대표적인 저신뢰 사회라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또 교사와 보호자 사이에 내재하던 불신과 갈등이 코로나 19 사태를 계기로 폭발한 경향도 있었던 것 같고요. 학교는 제한된 공간에서 다수의 구성원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보니 충돌과 갈등은 불가피합니다. 중요한 건 이런 갈등을 해결하고, 사전에 예방하는 능력일 테고요.


학교에 민원 관리 시스템을 갖춰야 합니다. 사실 모든 공공기관에는 민원 관리 시스템이 있어 민원인이 담당 공무원을 찾아가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구조인데요, 학교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민원 발생 시 보호자가 교사를 직접 찾아오는 게 아니라 온라인과 서면 등으로 일단 민원을 접수하고, 교사가 일정 기간 안에 보호자의 문의에 답변할 수 있는 책임 구조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순간적인 감정의 분출, 사적이고 소모적인 분쟁을 막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 교원 협의회는 교원의 권리를 교실에서의 권리, 학교 관리자에 대한 권리, 학부모에 대한 권리로 나눕니다. 학부모에 대한 권리에는 '학부모가 교실을 방문할 때 일정한 기간 전에 미리 그 사실을 통지받을 권리'와 '학부모가 교사에게 민원을 제기한 경우, 그 민원인의 신원을 포함해 민원의 세부내용을 고지받을 권리'를 명시합니다. 한국도 더 이상 교사나 보호자 개인의 예절이나 문화 차원에 기대지 말고, 민원 접수부터 처리까지 모든 과정을 정확한 규정으로 공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도적인 보완과 더불어 사회적 합의와 공통의 교육 철학을 확립할 필요도 있습니다. 학교나 교육당국 차원에서 충분히 방어할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휘둘리거나, 임시방편으로만 해결하려는 경우들이 많은 이유는 아무래도 근본 철학, 리더십 등이 부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학교의 리더가 누구인가에 따라 같은 사안이라도 처리 과정과 결과가 확연히 차이나는 걸 볼 때마다 오만가지 생각이 듭니다.  



2. 교사들의 자성과 이를 위한 실천을 위해 단위학교의 교사들이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노력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더 넓게는 이러한 움직임을 의미 있게 담아낼 수 있는 방법은..?          

6. 교육청과 관리자들의 전횡, 갑질 등을 막기 위해선 결국 근무교의 동료 교사들의 연대와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은데 지금의 학교는 행정, 업무 중심으로 파편화되어 그런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지금 우리가 연대와 협력을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실천들은 어떤 게 있을까요?   

7. 전교조든, 지역별 교사노조든, 실천교육 교사모임이나 좋은 교사운동이든 교원단체에 소속되는 선생님들의 숫자가 턱없이 적은데 전국의 교사들 연대를 공고하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요?               


저도 지난 몇 년간 한참 고민스러웠던 지점인데요, 돌고 돌아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교사들의 연대가 어려운 이유, 노동조합이나 단체 가입률이 낮은 결정적인 이유는 아주 많지만 결국 하나인 듯합니다. 교사들은 가입 안 해도, 연대 안 해도 살만하기 때문입니다(ㅎㅎ). 그렇다고 교사들의 처우를 악화시키고, 학교를 과거의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인 장소로 되돌려서는 안 되겠죠. 그러니 이제 우리는 현재의 조건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이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교사 집단을 포함한 어떤 집단이라도, 내부의 자정과 자성만으로 성장할 수 있나?라는 질문에 대해 고민했던 적이 있는데요. 그때 썼던 글이 딴지일보에 실렸던 "교육계 면역질환"이라는 글입니다. 2017년에 썼던 글인데, 당시 나름 재미있게 써 내려갔던 글이니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https://www.ddanzi.com/ddanziNews/207076837




4. 도덕교과는 중학교로 오면 초등 도덕에 비해서는 조금 나아지고, 고등학교에 가면 윤리라는 과목을 통해 보다 이론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립니다. 과거에 비해서 아주 조금 개선된 편이죠. 하지만 저는 궁극적으로는 초등학교 때부터 발달단계에 맞는 비판적 사유 능력을 기를 수 있는 철학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10. 도덕교육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교사가 실제적인 맥락이 있는 도덕적 딜레마 상황을 아이들에게 던져주고, 아이들과 함께 의미 있는 토론이 이루어지면 좋겠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이런 도덕적 판단이 고민되는 상황을 평소에 생각해 두셨다가 아이들에게 물음을 던지시나요, 아니면 어떤 사건을 계기삼아 아이들과 이야기할 기회를 만드시나요?  (저는 둘 다 시도해 보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유의미한 토론보다는 목소리가 큰 아이의 의견, 교사의 입맛(?)에 맞게 답해 인정받고자 하는 아이의 의견이 주가 되어 토론이 종결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가 잘 이루어질 수 있게 교사가 분위기를 어떻게 주도하면 좋을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중학교와 초등학교 상황은 꽤 다를 것 같은데요.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제가 토론을 하자고 제안하면 처음에는 아이들이 제 입만 쳐다보면서, 선생님이 답을 내려주길 바라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열심히 말을 참는 경우가 있는데, 제가 경험해보지 못한 2022년 중학교 상황은 많이 다르겠죠?(ㅎㅎ) 기회가 된다면 중학교에서는 어떤 토론이 이뤄지는지 직접 보고 싶습니다.  


음, 일단 저는 체질적으로 교화하는 것도 당하는 것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입니다. 초임 시절 (2천년대 후반), 지금보다 훨씬 도덕교육과정이 경직되었던 시절에 당시의 도덕 교과서로 수업하다가 무슨 100년 전으로 돌아간 듯 멀미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담임을 하며 도덕 수업을 할 때는, 교과서는 저리 치우고 주로 학급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논의를 하거나, 다른 읽기 자료들을 다뤘어요. 그러다가 수년 전에 1년간 영어+도덕 교과 교담을 했는데 그때는 교과전담이라 정해진 교육과정을 다뤄야 하는 상황이었고, 너무 힘들고 고민스러워 썼던 글이 책 속에 담긴 '참을 수 없는 도덕교과서의 경박함'입니다. 질문하신 부분에 대해 대답을 하자면, 저는 학생들의 일상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 혹은 영화나 소설 속에서의 윤리적 판단 상황 등을 주제로 대화하는 걸 좋아합니다. 물론 막 굉장히 고차원적이고 역동적인 토론이 벌어진다고 오해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ㅎㅎ).


제가 예전에 썼던 '심리학 과잉 시대의 학교'라는 글 한번 읽어보시겠어요? 인간을 교화시키고 판단하는 것에 대한 저의 관점, 인간에 대한 제 관점에 대해 이 글을 통해 대략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https://www.ddanzi.com/ddanziNews/533103829



5. 교/사대 커리큘럼의 근본적 혁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상한 선생의 비율을 줄이기 위해서 현행 커리큘럼에서 바뀌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선생님 견해가 궁금해요.     


사대 교육과정은 잘 모르지만, 교대 교육과정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더라고요. 얇고, 넓고, 얼핏 보면 극도로 실용적인 것 같은데도 여전히 예비교사들은 현장에 나와 맨땅에 헤딩하며 스스로 헤쳐나가야 하고. 음, 교대 이야기는 책에 자세히 썼었고, 비교적 최근에 교사의 역량이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하던 중 아래와 같은 짧은 글을 썼습니다. 저는 역량의 기본은 유연성이고, 유연성의 기본은 확고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물으신 커리큘럼의 구체적인 변화에 대해서 짚기엔 아직 제 공부가 부족하고, 제가 원하는 대략적인 방향에 대해서는 책에 썼던 내용과 아래의 짧은 글 정도로 대략 눈치채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https://brunch.co.kr/@sickalien/237




8. 학생들에게 자율권을 주는 문제가 교사의 교육권 및 학생의 학습권과 충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학생들에게 휴대폰 사용을 자율로 했을 때 몰래 여교사의 신체를 불법 촬영하는 학생들이 나오는 문제 같은... 소수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많은 교사들의 불안감을 야기하고, 가르칠 권리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9. 담임 학급에서 학급의 질서 등을 내세우며 아이들의 행동을 지나치게 통제하게 됩니다. 저의 경우는 복장이나 규율보다는 ‘몸으로 장난하기, 학교에서 점심식사 자꾸 거르기‘ 등 학생의 자유라고 볼 수도 있는 행동을 지도하며 혼을 낼 때가 많습니다. 저라는 교사 개인의 가치관이 지극히도 반영된 잔소리를 하지만 고민이 됩니다. 사회에 잘 적응하는 길이라며 잔소리할 때, 저도 모르게 학교를 갈등론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학생들에게 권위적으로 말한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선생님께서도 학생들의 자유, 개성, 선택 등을 존중하는 것과 기성세대가 만든 사회에 아이들을 적응시키는 것 사이에서 어떤 고민들을 하셨었나요?   


학생 지도를 하면서 어느 범위까지가 나의 주관이고, 어느 선까지가 교육자로서 마땅히 가르쳐야  보편적인 규칙 내지 상식인지에 대해 당연히 혼란을 느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상식과 보편이라 생각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혹은 사회 전체적으로도 보편이 아닌 경우발생할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고요. 사례별로 접근하자면 끝이 없을  같은데, 제가 교실에서 학생들을 지도할  가장 확고하게 세워놓는 기준은 '수업은 공적 활동, 교실은 공동의 교육 공간'이라는 사실입니다.


학생 지도에 관해 혼란을 느끼시는 선생님께 제가 답을 드릴 능력은 없지만 조금이나마 마음의 부담이라도 덜어드리고자 예전에 제가 썼던 짧은 글 조각들을 남겨놓을게요. 가벼운 마음으로 한번 읽어보시길요.

https://brunch.co.kr/@sickalien/444

https://brunch.co.kr/@sickalien/47

https://brunch.co.kr/@sickalien/41





   11. 교과 수업시간에 학급별 분위기가 천차만별입니다. 정말 수업 안에서 의미 있는 대화가 자유롭게 오가고 자연스럽게 토론이 이루어지며 배움이 일어나는 학급이 있는 반면, 몇 명만이 분위기를 주도하거나 학생들이 지나치게 소극적이어서 수업 자체도 힘든 학급들도 있습니다. 반 구성원끼리의 합, 시간대에 따른 아이들의 컨디션 등 다양한 요소가 원인입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아이들을 다른 반과 비교하고, 진도에 쫓기며 그저 재촉해 앞으로만 나갈 때도 많습니다. 화도 가끔 내는 제 자신에게 실망도 합니다. 수없이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고 가르쳐 보신 선생님께서는 교사가 이런 다양한 수업 환경에서 중심을 잘 잡는 방법이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저 역시 종종 아이들을 다른 반과 비교하기도 하고, 제가 정한 목표 기준에 아이들이 미치지 못하면 답답해하거나 당황하기도 합니다. 열심히, 잘해보려 노력하는 선생님들이라면 누구나 화도 나고, 실망도 하고, 화내고 실망하는 내 모습에 다시 실망하고 그런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양한 수업 환경에서 중심을 잘 잡는 방법에 대해 물어보셨는데, 2020년 4월 무렵 제가 남긴 메모 제목이 '궁극의 교육방법'이네요. '교육에도 엄밀한 규칙과 본질, 정수가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백 명의 교사에게는 백 가지의 교육적 해석과 실천이 존재한다'라는 제 생각을 남겼던 작은 메모입니다. 연애를 잘하는 것과 교육을 잘하는 것의 이상스러운 공통점(ㅎㅎ)에 대한 글 '연애와 교육', '광대와 팔방미인'이라는 글도 남겨봅니다.


https://brunch.co.kr/@sickalien/114


https://brunch.co.kr/@sickalien/18

     

https://brunch.co.kr/@sickalien/178



12. 공교육 교사의 존재 이유를 단 한 가지만 꼽아야 한다면 "학생의 학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아무리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고 한들, 여전히 학업이 사회계층이동을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는 한국에서는 공정한 계층이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발판이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점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B교사 되기에 깊이 공감하였습니다. 그런데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저로써는 무력해질 때가 많습니다. 한 반에서 이미 고등학교 수준의 영어실력을 가진 학생부터 "know"와 "no"를 혼동하는 학생까지 아우를 수 있는 수업을 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아직 기본적인 스펠링도 잘 모르는 학생에게 퇴근을 미루고 얻어낸 보충지도에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교사로서의 신념을 지켜낼 수는 있겠지요. 저 또한 앞으로 S교사가 아닌 B교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S교사이길 택하는 선생님들을 비판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에 대한 애정, 사랑, 교사로서의 신념을 지키는 것과 경제적 이익과 바꿔치기해야 가능해지는 게 현재 시스템의 B교사라면 저는... 선택의 기로에서 굉장히 갈등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신념을 가지고, 계속해서 학생들 입장에서 생각하려 하시고, 가르침의 열정을 잃지 않으시는 부분에서 경외심이 들면서 궁금점이 생겼습니다. 선생님께서도 교사생활을 하시며 학생이나 학부모님께 상처받는 사건을 겪으셨을 텐데, 그때 마음을 비우고 직업교사로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이 없으실까요? 신념과 애정만 가지고 가르치기에는 참 척박한 환경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선생님의 학생들을 향한 무한한 애정과 사랑을 지속시키는 연료는 어디서 오는 것인지... 개인적으로 궁금합니다:)   


예전에는 성과급을 비롯한 외적 보상 체계에 대해 완전히 부정적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요즘은 인간의 기본적인 물적 욕망이나 인정 욕구 같은 것들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변화를 추동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신념과 애정만으로 교직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선생님의 고민을 그래서 일백 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책을 읽고 뭔가 오해하는  있으신  같은데(ㅎㅎ), 저는 가르침의 열정을 잃지 않는 대단한 참교사가 아니랍니다. 저를 마구 갈아 넣으며 언제나 아이들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그런 대단한 교사로 저를 생각하시면 절대  됩니다(ㅎㅎ). 게으른 자의 변명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저는 멀리 보고, 즐기면서 내가   있는  그만큼만 해내고 있습니다. 제가 학생들을 여유롭게, 허용적으로 대할  있는  이유  하나는 제가 교사로서의 저와 사적인  생활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성과급 관련 말씀을 하시니, 비교적 최근에 썼던 '한시적 성과급 균등 분배 제안'에 관련해 비릿한 마음으로 썼던 글이 떠올라 링크 남깁니다.

https://brunch.co.kr/@sickalien/194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신념과 열정,  우리가 추구해야  사회적 가치와 이상과 같은 것들은 좋은  잔치와 선언이 아닌, 사회적 메커니즘으로 작동해야 합니다. 교원단체든 학교든 교실이든 모두 마찬가지더라고요. 교육희망에 실렸던  '전교조와 코끼리' 첨부합니다.  글은 전교조를 소재로 했지만, 교사의 이익과 사회적 가치와 이해가 충돌할 , 교실에서 학생의 욕구와 공공선이 충돌할 때와 같은 상황을 연상하시면서 읽어보셔도 재밌을  같습니다.

http://news.eduhope.net/21465




OO중학교 선생님들! 오늘이 독서모임이라 하셔서 급박하게 써 내려갔습니다. 선생님들께 충분한 답변은 되지 못하겠지만, 선생님들과 비슷한 고민을 했고 여전히 하고 있는 동료 교사의 이런저런 생각들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를 굴에서 끄집어 내주신 선생님들과 좋은 날 좋은 마음으로 만나게 될 날이 오길 빌겠습니다. 즐거운 퇴근길 되시고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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