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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Oct 23. 2017

게으름

게을게을 열매를 삶아먹었나

나는 누구인가 매거진 글입니다. 왜 이런 글을 쓰는지 에 대한 설명글도 썼고 여태 9개의 글을 써 왔습니다. 100개쯤 채우면 불민한 저도 스스로 어떤 인간인지 조금은 알게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저도 저를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 글 

1) 순살치킨 

2) 아메리카노 

3) 닌텐도 스위치 

4) 여행 

5) 술

6) 화장실

7) 프라모델

8) 이어폰 & 헤드폰

9) 만년필, 글씨



나는 천성적으로 게으르다. 매우. 그래서 매일매일 쓰려고 했던 이 글모음이 7일 동안 밀리는 와중에도 별의별 딴짓을 해가며 마음껏 게을렀다. 


게으름이란 상대적이다. 어쨌든 게으름은, 무언가를 안 하는 행위를 뜻한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사람은 존재 자체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 숨을 쉬는 것, 심장이 온몸에 피를 내뿜는 행위를 떠올려보면 죽음 이전에 완벽한 무위란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니 게으름이란 언제나 하고자 하는 어떤 일에 대비하여 게으른 것이다. 따라서 목표치에 따라서 나는 몇 프로 정도 게으르다!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그러니 지난 7일간 나는 '나는 누구인가' 글모음에 100% 게을렀다. 


핑곗거리는 좀 있다. 독서모임에 2번 참여했고, 회사에서는 내년도 예산안을 짜야했고, 보드게임 진행자를 맡기도 했다. 응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게으르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이걸 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매일매일 나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을.


또한, 게으름이란 타자에 의해서 규정되기도 하는데, 내 주변에는 성실의 아이콘들이 너무나도 많다. 같이 창업을 했던 친구 '가'는 얼마나 성실한지 11월이 다가오는 지금 연차가 열개가 넘게 남아 있다. 나보다 회사원 연식은 반년이나 짧은데도 말이다. 


트레바리의 대표 및 크루들의 성실함은 또 어떤가. 그건 뻔하니, 다른 트레바리 파트너들의 행태를 보면 또 내가 얼마나 게으른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의 관계를 조율하는 파트너라는 직무를 수행하는 데에 있어 쏟는 시간과 정성에 있어서 나는 그들에 비해서 매우 게으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 모름지기 성실한 타자(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들)라면 글을 쓰기 전에 뼈대를 세우고, 그것을 탈고하고, 소리 내어 읽으면서 교정을 보아야 할 것인데, 나는 도무지 그 일을 하질 않는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라도 부지런해야 할 텐데, 그러질 못한다.


하지만 나는 내 게으름에 대해서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근래 가장 게을렀던 어제를 떠올려보면, 내 마음이 당최 아무것도 하기 싫은 기분이었다. 그럴 때에 무언갈 하는 것은 내 마음에게 성실하지 않은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화를 시도해보자.


한병철 씨였나. 피로사회라는 담론을 던졌다. 독일발 얇은 서적은 생일선물로 나에게 들어왔고, 나는 1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선물을 준 친구에게 성실하기 위하여 꾸역꾸역 책장을 넘겼었다. 기억에 남는 큰 줄기의 논지는 이런 거다. 고도화된 사회는 서로를 배제하는 면역 체계적인 형태에서 스스로를 착취하는 정신병적인 형태로 사람을 변화시켰다. 어떤 측면에서 피로라는 것이 더 이상 어떤 특정 타자에서 오는 것이 아닌 스스로와 타자와의 조금 더 큰 관계에서 - 그러니 자기 착취라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써보고 나니 더더욱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 거대한 타자는 성실의 담론으로, 근면의 강요로, 혹은 비교의식으로 내면화되어서 사람의 인생에 빌붙어 사는 삶의 동반자가 되었다. 게으름에 대한 멸시는 게으름 자체가 상대적인 것이기에 또한 제로섬 게임처럼 타자에게서 게으름을 발견하여 스스로의 정신적인 고양감을 채우거나, 타자의 성실 속에서 자기 환멸의 길로 인도하는 지름길이 되곤 한다. 


그러니까, 요는 필요할 때 필요한 게으름이란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성실한 것이 아닐까 하는 변명의 확증편향이다. 게으름의 정의란 오롯이 나의 기준에 의한 것이어야 하며, 내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내가 과도한 기준을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자기반성이 함께할 때에만이 게으름의 정당성을 심판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에 의한 게으름의 강요, 게으름의 자기반성은 언제나 공허할 것이며, 평행 선상에서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란 말이다.


응, 그러니까 이건 변명이다.


171017에 해야 했던 자기분석.

17102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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