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나는 권태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이의 고양이, 첫인사〉를 쓸 때도 그랬다. 무엇에도 묶이지 않는 삶이 좋은 줄 알았는데 자유로워서 불안하다고 했다. 나는 그걸 권태라고 불렀다.
〈가벼움이 가장 무겁다〉에서 밀란 쿤데라의 토마시와 테레자를 말할 때도 권태를 분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관계로 권태를 잊으려 했던 토마시, 사랑의 짐을 견뎠던 테레자, 끝없이 떠났던 사비나. 나는 그들의 존재의 가벼움을 권태라고 여겼다.
그런데 〈권태라는 이름의 다른 것〉을 쓰면서 비로소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느끼는 게 정말 권태일까?
자극을 찾아 헤맸는데도 채워지지 않았다. 뭔가를 계속했는데도 여전했다. 그때 알았다. 이건 지루함이 아니라 빈자리라는 걸. 있어야 할 무언가가 없는 상태라는 걸.
그런데 그 빈자리가 뭔지는 몰랐다.
그리고 그 이후 내가 쓴 글들을 보니...
〈나는 상연이었고, 그 애는 은중이었다〉에서 나는 30년 지기 친구와 멀어지는 두려움에 대해 쓰고 있었다. 관계가 변해가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그 애의 삶이 나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게 두려웠던 것.
〈사랑을 알아보지 못했던 시간들〉에서는 영화 《연인》속 마르그리트처럼 사랑받아본 적이 없어서 사랑이 눈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 쓰고 있었다.
〈완벽한 조건, 텅 빈 마음〉에서는 조건 좋은 사람들을 만나도 손을 잡고 싶지 않았던 이유를, 관능의 부재를 쓰고 있었다. 영화 속 리앙의 손가락이 소녀의 손에 닿는 순간 느꼈던 그 전율을 나는 느끼지 못했다.
〈뜨거운 열정, 식어가는 관능〉을 쓸 때는 우정과 열정과 관능, 세 가지가 모두 있어도 결국 놓을 수밖에 없었던 사랑의 불완전함을 쓰고 있었다.
〈익숙한 아픔을 사랑이라고 믿었다〉에서는 기다림을 사랑으로 착각했던 나에 대해 쓰고 있었다. 나는 사랑을 부족함으로 배웠다.
〈거울 앞에서 엄마를 만났다〉에서는 사랑받는 법을 몰라서 주는 법도 모르는 어른이 되어버린 엄마와 나의 대물림을 쓰고 있었다.
〈고양이는 조건을 묻지 않는다〉에서는 조건도 묻지 않고 기다리게 하지도 않는 순수한 사랑을 쓰고 있었다. 나는 고양이들한테는 존재만으로 충분했고, 그게 사랑이었다.
내가 쓴 총 10편의 글들을 다시 읽어보니 비로소 알겠다.
나는 권태에 대해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사랑에 대해 쓰고 있었다.
권태가 아니라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내가 문제였다.
사랑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사랑이 눈앞에 와도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줄 몰랐다. 마르그리트가 리앙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도 사랑 앞에서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친구가 변해가는 걸 권태라고 불렀지만 그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두려움이었다.
토마시와 테레자의 가벼움이 견딜 수 없었던 건, 전부를 주는 사랑과 자유로운 사랑을 동시에 원하는 내 모순이었다.
완벽한 조건 앞에서 심장이 뛰지 않았던 건, 조건 너머의 떨림을 느낄 줄 모르는 내가 둔해진 탓이었다.
기다림을 사랑으로 착각했던 건, 그게 내가 배운 유일한 사랑의 형태였기 때문이었다.
엄마처럼 나도 사랑받는 법을 몰랐고 그래서 누군가 편안하게 다가오면 오히려 불안했다. 힘들어야 사랑 같았고 아파야 진짜 같았다.
그런데 고양이 앞에서는 눈물이 났다. 조건도 묻지 않고 기다리게 하지도 않고 그냥 나를 좋아하는 존재.
그때 알았다. 내가 찾던 게 이거였구나.
권태는 무료함이 아니었다.
사랑을 알아볼 줄 모르는 나였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권태와 사랑 사이 어딘가에서.
사랑이 뭔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제는 안다, 내가 찾고 있는 게 뭔지를.
조건도 자극도 안정도 아닌... 손끝이 닿는 순간 온몸이 저릿해지는 그 떨림. 1초 만에 눈물이 나는 그 순수함. 조건을 묻지 않고 기다리게 하지 않는 그 사랑.
어쩌면 그게, 권태의 반대편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이의 고양이 '사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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