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 최동석_최동석인사조직연구소소장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을 그대로 드러낸 진리다. 따라서 세상에는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말대로 인간은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 thing-in-itself)를 인식할 수 없고, 다만 이성이 제시하는 범주(카테고리, category)에 의해서만 삼라만상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말은 세상엔 정답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일상 경험에서도 정답이 없음을 알고 있다. 1+1=2가 정답이 아니라는 경험은 수없이 많다. 서로 다른 비눗방울이 합치면 두 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된다. 서로 다른 두 명의 개인이 합치면 하나의 가정이라는 조직이 탄생한다.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리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정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위대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1918~1988)은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의 우리는 그저 확률을 계산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사실 ‘지금’이라고 말은 하지만, 이것은 아마도 영원히 걷어낼 수 없는 물리학의 굴레인 것 같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인간의 지적 능력에 그어진 한계가 아니라, 자연 자체에 원래부터 내재 되어 있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리처드 파인만, 박병철 옮김,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승산 2003, 234~235쪽)
그렇다. 물리현상뿐만 아니라 사회현상에도 단 하나의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답이 없기에 우리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 진리(眞理)를 만들어낼 뿐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학교에서 하나뿐인 정답을 골라잡는 요령을 터득하거나 정답을 외우도록 할 것이 아니라, 물리적 또는 사회적 현상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설명하고 개념화할 수 있는 사고력을 길러야 한다. 학교는 이렇게 사고력을 기를 수 있는 환경조건을 학생들에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한국어 사용법 때문에 진리와 진실(眞實)을 구별하는 습관이 있지만, 서양 언어에서는 이 둘은 언제나 같은 의미이며 다른 표현이 없다. 영어의 ‘truth’와 독일어의 ‘wahrheit’는 언제나 진리(진실)의 의미로 쓰인다. 그렇다면 자연과학이 아닌 정신과학에서 진리란 무엇인가? 어떤 역사적 사실에 인간부합적인 서사(敍事)가 붙으면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사실과 서사가 합쳐진 사건의 전모(全貌)가 중요하다. 여기서 인간부합적(人間符合的, menschen rechtig)인 서사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을 올바르고 건강하고 풍요롭게 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종교적 이념에 기초한 성경, 불경, 사서삼경 등 경전의 말씀을 진리라고 인정하는 이유도 당시의 사건에 인간부합적인 서사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종교인들에게는 경전의 말씀이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역사적으로 진리라는 사회적 합의에 이르렀다는 의미다.
학교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진리를 가르치고, 동시에 진리를 창조하는 방법을 배우는 장소다. 학교의 모든 환경조건은 학생들이 진리가 무엇인지 스스로 다가가도록 정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학교와 교육내용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실(事實)에 인간부합적인 서사로 채워져야 한다. 그러나 학교 내 환경조건은 이를 전혀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 중에서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은 정치적 쟁점을 학교에서 다루지 못하게 막는다는 점이다.
정치 행위는 어느 정당을 지지하느냐의 이슈가 아니라, 우리 삶의 거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차를 타고, 어떤 지역과 어떤 집에서 살고, 어떤 시민단체를 후원하고, 어떤 학교에 다니고, 어떤 직업을 갖느냐는 것은 정치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서열화, 계급화, 차별화, 경쟁화가 심각한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 사회는 지금 진리를 향한 사고력에 기반하여 움직이지 않으며, 학생들은 시험 성적에 따른 학벌로 권력을 잡아 약육강식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극심한 경쟁사회가 되었고, 불공정과 양극화가 심각하다. 노인빈곤율, 출생률, 자살률, 산업재해율은 최악이다. 비참한 사회가 되었다. 이거야말로 정치의 문제가 아니면 무엇인가?
오늘날은 문맹률이 아니라 문해율, 즉 텍스트를 이해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텍스트란 단순히 글로 쓰인 문서를 넘어 광의로 각종 사건, 사고, 사태를 포괄하는 사회현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문해력이란 사회현상이라는 텍스트를 둘러싼 맥락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사회현상에는 언제나 단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각자의 지식, 경험, 성향, 가치관 등의 필터를 거쳐야 해석학적 진리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정치 현상에 대하여 분석하고 설명하고 해석할 능력을 길러주지 않고 있다. 그 결과, 학교는 사회정의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젊은이를 양산하고 있다. 이는 다시 정치인들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정적(政敵)에 대한 흑색선전에 몰두하게끔 부추긴다.
이런 이슈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68혁명 이후 독일도 정치적으로 좌우가 분열되는 극심한 소용돌이를 겪었다. 특히 같은 교과서라도 교사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학습 내용과 교수법이 달랐다.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다양한 해석을 일방적으로 가르쳤는데, 학교 안에서뿐만 아니라 학교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커다란 사회적 논쟁거리였다. 독일 학제 상 7~8학년이 되면 정치 이슈가 담긴 사회과목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현실의 문제였다. 독일 교육계는 정치와 역사와 노동을 보는 이념적 차이를 해소해야 할 뿐 아니라 교수법도 정비해야 했다.
독일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소했을까? 1976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보이텔스바흐라는 작은 도시에 정치교육학자, 정치인, 종교인 등이 모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치교육원칙에 합의했다. 이것을 〈보이텔스바흐 합의〉라고 부른다.
“첫째, 강압 금지의 원칙이다. 교사는 학생에게 자신의 견해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한 마디로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알려주는 주입식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학습자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둘째, 논쟁거리의 원칙이다. 교사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스스로 의견을 형성할 수 있는 논쟁적 주제를 선정해야 한다. 선정된 주제는 현실 정치에서 공개된 논쟁거리여야 한다. 현실 정치의 논쟁거리가 교실에서 논쟁거리가 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사가 학생들의 견해를 압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사가 논쟁거리에서 반드시 기계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학습자 이해관계의 원칙이다. 학습자 지향적 원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수업에서 이루어지는 정치교육은 철저하게 학생의 이해관계를 고려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학습자가 현실의 (논쟁적인) 정치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이 처한 입장을 분석함으로써 정치 과정에 스스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나아가 학습자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과 수단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최동석, 《성취예측모형: 인사실패의 원인은 무엇인가?》, 클라우드나인 2021, 222쪽)
이러한 〈보이텔스바흐 합의〉에서 나온 세 가지 정치교육의 원칙은 사회현상에는 어떤 정답도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학생들은 각자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밖에 없으며, 현실 정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통해 민주사회의 운영원리를 이해하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상대방과 함께 더 나은 해결책을 모색하는 능력을 스스로 길러야 한다. 교육과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이란 바로 이런 교육활동을 말한다.
정치계와 교육계가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세 가지 원칙을 실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성숙한 민주주의를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한 국가의 민주주의란 언제나 학교와 교실의 민주주의에 기대어 발전해왔다. 이것이 불완전한 인간이 모여서 민주주의 체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안정되고 성숙한 민주주의 정치체계를 발전시켜 온 독일이 그것을 말해준다.
우리 정치계와 교육계가 정치교육에 대한 논의와 합의를 거쳐 원칙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우리 교육은 모든 것에 마치 정답이 있는 것처럼 가르치지만, 정치적 이슈만큼은 블랙박스에 집어넣고 못 가르치게 한다. 정치인들이 교사와 학생에게 정치적 금치산자가 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것은 타락한 정치판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우리 정치인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부족하거나 정치와 교육을 개혁할 정도의 지적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글_2022 새넷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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