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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가방은 써니를 지킬수 없어요.

나의 존엄성을 지키는 나의 밥벌이

by 라떼마마

급여를 받고 나서 가장 먼저 적금통장을 만들었다. 종이통장이 없어지는 요즘 세상에서도 주식과 재테크를 알지 못하는 자가 실천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그냥 돈을 모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정엄마에게 일부를 드리고 남는 120만 원의 돈을 매월 저 죽 하기로 했다. 아이의 아빠로부터 들어오는 생활비에서 1/3 정도를 저축하기로 했다. 10만 원/20만 원/2달에 한번 5만 원씩의 풍차 적금 등등 적금통장이 대략 8개-9개에 다다랐다. 입출금계좌에 돈이 들어오는 순간 카드값이 빠지고 자동이체로 각각의 적금 계좌로 빠지고 나면 사실 쓸 수 있는 돈은 많지 않았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었다.


나의 20대를 돌아보면 남편과 한 달에 한, 두 번씩 서울시내 특급호텔에서 호캉스를 했고 골프를 즐겼다. 명절 연휴나 휴가 때마다 의무처럼 해외여행을 다니고 기념일에는 명품가방을 선물 받았다. 당시에는 그런 삶의 순간을 기록하고 누군가의 '좋아요'를 받는 일에서 만족을 찾았다. 결혼생활을 하며 항상 이 정도로 살아갈 수 있는 수준은 늘 유지될 것이라고 믿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세상에서 적어도 삶에서 균열이 생겼을 때 나 자신을, 관계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담보는 마련해놓는 지혜로움이 없었던 나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unnamed (2).jpg 쇼퍼홀릭(2009)


나와 같은 번뇌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는지 언제부턴가 세상은 미니멀리즘 한 라이프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백화점에서 카드를 긁을 동안 현명한 여자들은 돈이 스스로 일하게 만들 방법에 대해서 고민을 했다. 옷장 안에 고스란히 있는 명품가방과 액세서리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힘이 없었다.


결혼생활이 허무하고 절망스러웠다. 상대에 대한 분노로 나 자신을 해치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이혼하자'라는 말 한마디는 너무나도 무거워 차마 꺼낼 수 없었다. 언젠가 아이의 아빠가 부부싸움을 하며 내게 말했다.


너 양육권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알아?
아이를 경제적으로 책임진다는 거야.
너 애 키울 돈 있어?
나는 애가 네 밑에서 궁하게 사는 거 못 본다!

'이혼'이라는 두 글자를 입에 올리는 순간 아이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지 못하는 무력감이란 이런 것이구나. 비통했다. 이런 나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듯 아이의 아빠는 나의 명줄을 말 한마디로 흔들었고 나는 좀처럼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나의 돈 모으기는 이런 절박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이만 생각하면 명품가방 대신에 에코백도 상관없었다. 나의 물건에 대한 욕망은 줄일 수 있었지만 아이의 물건을 주고 싶은 만큼 해줄 수 없을 때 느끼는 나의 부족함은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100만 원짜리 전집과 교구를 들이고 싶지만 미안하다고. 나중에 더 미안해지지 않기 위해서 지금 미안해지는 일이 맞다고 생각했다. 100권에 10만 원이면 살 수 있는 중고전문서점을 검색했고 완벽하지 않지만 쓸만한 중고 교구를 검색했다. 나 또한 엄마처럼 시간을 쓰면서 돈을 아끼고 있었다.


남의 집 아이의 정사각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다. 남의 집 예쁜 인테리어와 예쁜 그릇으로부터 달관하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누군가의 간접적인 협박으로부터 절절매는 상황을 벗어나지 못할 일이었다.


매일매일 책을 읽어주고 어설프지만 아이의 취향에 맞는 우리만의 놀이를 했다. 아이는 없는 것이 있으면 있다고 상상하자고 했고 그렇게 커주는 아이가 예뻤다. 주말이면 회사에 데려가 그림을 그리게 하거나 나의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써니가 어린이집 가는 시간 동안 엄마가 여기서 일하는 거야. 사실은 나도 네가 엄청 보고 싶지만 꾹꾹 참고 있어. 대신 우리는 언제나 집에서 다시 만나잖아.

너랑 나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

끊어지면 어떻게 해? 엄마?

아니.. 이 실은 아무리 가위로 잘라도 누가 밟아도 절대로 안 끊어져. 네가 도움이 필요할 때 마음속으로 엄마를 외치면 엄마는 느낄 수 있어.



금수저는 물려줄 수 없지만 1일 1 예쁜 말하기로 정서적인 복리를 굴리면 최소한 나처럼 유리멘탈 아이는 되지 않을 거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입사 후 5개월 차에 150만 원짜리 노트북을 샀다. 사용하는 방법도 잘 모르는 맥북과 안녕하고 나와 일체감이 되는 노트북을 구매한 날 에버노트에 몇 가지 버킷리스트를 적었다. 내손으로 돈을 벌어서 150만 원의 노트북을 사보니 몇백만 원짜리 가방을 선물 받은 날 보다 끔찍하게 행복했고 차를 사면 고사를 지내던 시절처럼 이 노트북으로 공부하고 글을 쓰며 이루고 싶은 나만의 꿈들을 적어보았다.


비록 많은 것들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딱, 1가지. 돈을 모으는 일만큼은 목표치의 95%를 달성했다. 1년이 지나고 한 두 달마다 적금 만기를 알리는 문자와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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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겐 이 돈이 매도 클릭 한 번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아주 작은 돈이겠지만 나에겐 자존심과 아이를 지킬 수 있는 종잣돈이었다. 여전히 힘이 없는 돈이며 최저 시급을 넘어보려고 발버둥 치고 있지만 적어도 몇 년 전의 나와 비교했을 때 보다 나아졌다면 전진한 것이 아닐까?


만약 언젠가 다시 부부싸움을 하며 배우자로부터 경제적인 능력에 대한 것으로 휘둘림을 당할 때 속 시원하게 말이라도 한번 던져보았으면 한다.



그만 살고 싶어.
나 능력 되니까 애는 내가 키울게.
협박하지 마.



<경력단절 엄마의 성장기록 에세이>


01화 살고싶으면 타이타닉호에서 내릴 것

02화 드라마 속 강단이보다 처절한 리얼리티버전

03화 합격입니다.

04화 여직원과 총무, 유니폼의 상관관계

05화 딸이란 엄마의 시간을 싼 값에 후려치는 사람

06화 엄마의 "고마 때리치아라"는 갑질

07화 회장님 '차' 준비와 코로나 무급휴직의 상관관계

08화 여행OP가 밥벌이를 지켜내는 방법

09화 오너의 눈에 밥 값 제대로 하는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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