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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총무 딱지를 내 손으로 뗄 줄이야!

매슬로우의 욕구 이론과 퇴사

by 라떼마마

내가 근무하는 영업 조직과 같은 형태를 띠는 곳에는 소위 '봉사품'이 중요했다. 영업본부 총무의 일=봉사품 곳간 열쇠 관리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실적에 따라 1점당 봉사품을 몇 개 지급을 한다는 식의 시책비가 한 달 프로모션 비용으로 책정되고 이에 따라 봉사품의 재고 관리 및 주문을 해서 실적 및 수금 기준에 따라 지급을 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사원들이 개별적으로 구매를 해서 고객들에게 사은품으로 나눠주기 때문에 가성비 좋은 다양한 봉사품을 항상 준비해놓고 잘 관리하는 일이 중요했다. 개별적으로 가저간 금액만큼 월말 수당에서 공제하는데 50-60대 살림을 사는 어머니 세대라 5000원짜리 봉사품 하나에 마음이 훽 돌아서기도 하고 풀릴 만큼 민감해서 더 중요한 일에 지장을 받곤 했다.


봉사품 관리보다 한 달 프로모션 비용으로 책정되는 금액을 재미있는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일에 대해서 고민을 했다. 시책회의 때 올라가는 기획안을 지점장이 보았을 때 어! 이번 달은 프로모션이 짱짱하네?라는 느낌을 줄 수 있는 프로모션을 기획하는 일에 몰두했다. 코로나에도 영업을 하느라 고생하는 분들이 단돈 얼마이지만 하나라도 더 받아가시길 원했다. 1점 할 수 있는 것을 3점으로 3점 할 수 있는 분들을 5점을 하도록 '도전'의식을 자극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다. 이에 반해 영업사원들은 상금으로 지급되는 봉사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환을 요청했고 이러한 사람들이 많으면 100개에 가까운 물건들을 뜯어진 상태로 반품해야 하는데 물건을 들여오는 봉사품 아저씨와 이런 일로 늘 실랑이를 해야 했다. 적어도 나의 기준으로 갑질이었다. 박스를 개봉하고 뜯어놓은 상품을 환불하는 일. 환불해주지 않으면 앞으로 너네랑 거래를 안 한다는 뉘앙스로 말을 하는 건 엄연한 갑질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이었다.


계속되는 교환 요청에 프로모션 안을 기획하는 일이 무의미해졌고 주말에 아이와 나와서 함께 박스를 옮기고 정리를 했는데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일이 많아지자 회의감이 몰려왔다. 안되는 걸 안된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공식적인 의견이 전혀 의미가 없었다.


(영업사원들) 하나 더 줘. 바꿔 줘.
(나) 죄송합니다. 저도 그렇게 해드리고 싶은데 안됩니다. 이건 시상입니다. 시상품은 교환 안됩니다.


관리자를 패스하고 임원에게 바로 이야기가 흘러들어 갔다.



귀찮으니까 저거 일 편하게 하려고 안 바꿔 주더라.




허무함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고작 5000짜리 봉사품을 교환하고 다시 반품하고 몇 개를 가져갔는지 집계를 하려고 내가 밤을 새워서 일을 했나? 싶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만들고 가치를 주어도 봉사품 5000원에 내가 쌓은 탑들이 무너졌다. 요즘 말로 현타가 왔다. 나는 나를 제대로 쓰고 있지 않았다. 제대로 써 보려고 시작하면



사원들 마음을 굳이 왜 불편하게 하나?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
이건 관리자가 할 일이지 총무가 할 일이야?


라는 피드백이 오곤 했다. 일단 돈부터 벌면 마음이 편안 해질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돈을 벌기 시작하니 내 안에 다른 욕망이 자꾸만 소리를 냈다. 매슬로의 욕구이론을 갖다 붙이면 일단 먹고 살만하니 딴 짓이 하고 싶은거였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Maslow's hierarchy of needs)
하나의 욕구가 충족되면 위계상 다음 단계에 있는 다른 욕구가 나타나서 그 충족을 요구하는 식으로 체계를 이룬다. 가장 먼저 요구되는 욕구는 다음 단계에서 달성하려는 욕구보다 강하고 그 욕구가 만족되었을 때만 다음 단계의 욕구로 전이된다.

자아실현 욕구(self-actualization) 자기를 계속 발전하게 하고자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욕구이다. 다른 욕구와 달리 욕구가 충족될수록 더욱 증대되는 경향을 보여 ‘성장 욕구’라고 하기도 한다.
출처- 위키백과


선우야, 너 여기 있으면 안 돼.
너에게 핏(fit) 한 일을 해야지.
너 가르치는 일 좋아하잖아.


처음에는 귀를 닫고 듣지 않으려고 했다. 세상 멋져 보이는 크리에이티브한 일들도 까 보면 별거 없다고. 지금 하는 일을 하찮다고 생각하지 말자고. 지금 내 자리에서 조금 더 남다르게 해 보자고. 심연에서 울리는 자아의 외침을 철저하게 '읽-씹' 했다.


다양한 분야에 일을 하는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어서 독서모임에 문을 두드리기도 했고 기꺼이 서울로 올라가서 주말에 자비로 강의를 듣기도 했다. 입사 초반에는 OOO 작가 독자위원회 모임을 참여해서 책 출간과 관련된 일에 적극적인 의견을 어필하기도 했다. 직장을 다니고 아이를 돌보면서도 새벽 기상을 하며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성장에 대한 허기짐을 채웠다.



어김없이 필사 노트에 들어갈 글들을 고르는 와중에 좋아하는 작가의 글에서 마음이 흔들렸다.


출처-나를 바꿀 자유(김민기)

사람은 욕구에 따라 선택한다. 욕구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가 하는 선택은 환경의 산물이다. (p.21)
내가 기대하는 나에게 맞는 일을 찾아다녔다. 시행착오도 많았다. 내 욕구를 찾는 과정이었다. 새로운 환경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 과정이 나를 성장시켰다. 어떤 사람은 기회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움직이느냐고 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움직이지 않는데 어떻게 기회가 보이겠느냐고. (p.27-28)
고만고만한 사람들, 비슷비슷한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그 수준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들 비슷한 나이의 비슷한 사람들만 만나고 있다. 집단의 압력을 깨려면 완전히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들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을 찾아서 자신을 밀어 넣어야 한다. (p.33)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삶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폭이 넓을수록 운신의 폭도 넓어진다. 내가 꿈꾸는 삶을 이미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도 높아진다.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해보려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보려면 의도적으로 낯선 곳에 자신을 던져야 한다. 생각이 바뀌어서 그 자리에 가는 게 아니다. 그 자리에 가면 그에 맞는 생각을 하게 된다. (p.35-36)
실패에 대한 두려움보다 이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무언가에 집중하면 된다. 두려워하다가 실패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에 집중하면 그 경험은 그 사람을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간다. (p.46)









퇴직금이 나오고 연금을 절반 부담해주며 딱히 큰 문제가 없으면 고용이 보장되는 정규직. 지금 1,2 년은 이렇게 큰 문제없이 다닐 수 있겠지만 잠깐의 안정을 즐기다가 100세까지 디지털 세상에서 끌려가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회사를 다니면서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과 같은 일들을 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에 나의 머릿속에는 그와 같은 선택지는 전혀 없었던 것 같다. 2-3년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갈아 넣어 자신을 일으켜 세운 친구와 이야기를 할수록 더디고 느리더라도 나의 콘텐츠를 만들어 세상에 꺼내놓고 싶어 졌다.


누구보다 나의 간절함을 잘 아는 친구가 기업교육컨설팅 회사의 대표와 연결을 시켜주었다. 친구의 소개라 자칫하다가 소중한 베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고민을 했다. 적은 돈이라도 지속적으로 내게 공급되는 캐시 플로우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제공했기 때문에 결정이 쉽지 않았다.




상조회사. 매일매일 아침마다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장례지도사가 직접 염습 시범을 보이는 교육을 진행했는데 나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사전장례의향서 샘플을 받아보면서 내가 만약에 죽는 다면 나는 어떤 것을 후회할까?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해보았다. 한 달 뒤가 될 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도 1년 후가 될 수 도 있는 나의 죽음에 나는 무엇을 후회할까? 상상만 하며 도전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가 가장 클 것이라고 적었다. 아이 아빠와 기러기 부부가 된 3년 동안 내 월급의 일부와 아이 아빠가 보내주는 생활비를 아껴서 5천만 원을 모았다. 종잣돈으로 주식을 했다. 당장 길거리에 내몰리는 상황은 아니니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물론 다른 친구들은 5-6억쯤 되는 아파트를 갖고 있었고 영끌 대출로 자산 불리기 신공을 발휘하기도 했다. 어차피 나는 친구들에 비해 느렸고 살다 보니 바닥까지 내려온 상황에 더 내려갈 곳도 없었다.


사직서를 제출했다.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고 새롭게 주어지는 일로 6개월은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1년 3개월을 근무했다. 전혀 크리에이티브하지 않았던 총무라는 딱지를 회사에서 떼 보려고 발버둥을 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퇴사 직전 한 분의 영업사원이 회장님께 말씀을 드렸다.

우리 선우씨 이런 거 제발 시키지 말고
교육만 하게 좀 해주세요!
강의 잘하는데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키면
이것도 저것도 안됩니다!


한 사람에게 이 - 일, 저- 일을 모두 맡기면서 인건비를 줄여야 하는 회사의 입장에서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어쩌면 내 능력이 오너의 눈에 여전히 부족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2019년 2월, 그 날 그 일이 있었을 때 하염없이 울기만 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시간을 보냈다면 절대 얻을 수 없었던 값진 경험을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얻게 되었다.


누군가를 성심껏 도와주니 나를 대신해 발 벗고 나서 주는 이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타인이 보면 푼돈 같은 월급과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일들 일 수 있지만 만약 내가 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 행동으로 인해 몇몇 사람들은 출근이 즐거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아침마다 얻어먹은 간식에 보답하려고 떡집에서 떡을 주문해서 돌렸다. 매일매일 절편과 송편만 드시던 분들이 처음으로 인절미를 드시며 너무 잘했다고 궁디 팡팡 해주셨다. 그래, 이 정도 눈썰미와 센스가 있다면 밥은 안 굶고 살겠지.



(나) "써니야, 어쩌지? 엄마 회사 그만뒀어."


5살 딸아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써니) 엄마, 그러면 나 이제 맨~날 같은 반찬만 먹고 맨~날 같은 색연필만 써야 해?



엄마 일 계속 할 거야.
우리 딸 좋아하는 무지개 솜사탕이랑
무지개 물감 사줘야지.
아무 걱정마.
엄마만 믿어.





<경력단절 엄마의 성장기록 에세이>


01화 살고싶으면 타이타닉호에서 내릴 것

02화 드라마 속 강단이보다 처절한 리얼리티버전

03화 합격입니다.

04화 여직원과 총무, 유니폼의 상관관계

05화 딸이란 엄마의 시간을 싼 값에 후려치는 사람

06화 엄마의 "고마 때리치아라"는 갑질

07화 회장님 '차' 준비와 코로나 무급휴직의 상관관계

08화 여행OP가 밥벌이를 지켜내는 방법

09화 오너의 눈에 밥 값 제대로 하는 직원

10화 샤넬가방은 써니를 지킬 수 없어요.

11화 내 상처가 나으면 백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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