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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위의 이력서: 잔혹한 오피스 스릴러 <사마귀>

[방구석5분혁신.영화읽기]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이것은 킬러 영화의 가면을 쓴, 우리들의 오피스 스릴러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칼과 총을 들지만, 그들의 처절한 생존기는 매일 아침 지옥철에 몸을 싣고 일터로 향하는 평범한 직장인들의 이야기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이곳에서 사무실 책상은 보이지 않는 전장이고, 매일 제출하는 보고서는 날카로운 칼날이며, 연말 고과평가는 목숨을 건 결투다. 넷플릭스 영화 <사마귀>의 진짜 공포는 화려한 액션이 아닌, 스크린 너머 우리의 현실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비추고 있다는 점에서 온다. 어쩌면 이 영화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소모되는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처연한 위로이자, 지독하게 현실적인 경고일지 모른다.


1. 대표의 부재: 구조조정의 바람이 부는 회사


영화는 업계 1위의 대기업 ‘MK 엔터’의 절대 권력자 차민규(설경구)가 사망한 직후의 혼돈에서 시작된다. 마치 강력한 카리스마로 회사를 이끌던 창업주나 CEO가 갑작스럽게 부재한 상황과 같다. 구심점을 잃은 조직은 방향을 잃고, 수십 년간 유지되던 ‘룰’과 시스템은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된다. 이때부터 보이지 않는 권력 투쟁, 즉 생존을 위한 혹독한 구조조정의 서막이 오른다.


이 혼돈 속으로 두 명의 핵심 인재, 이한울(임시완)과 신재이(박규영)가 걸어 들어온다. ‘사마귀’라는 코드네임의 이한울은 MK가 가장 신임했던 A급 인재다. 그는 묵묵히 자기 일을 완수하는 실력파지만,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고 조직의 의리와 동료애를 중시하는, 어찌 보면 구시대적인 인물이다. 반면, 뛰어난 실력에도 늘 한울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재이는 누구보다 인정과 성공에 목마르다. 그녀는 더 이상 2인자로 머물 수 없다는 야망을 품고, 살아남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둘의 관계는 모든 직장이 품고 있는 딜레마다. 묵묵히 일하며 성과를 내지만 사내 정치에는 서툰 성실한 직원과, 실력에 더해 기회를 포착하고 자신을 브랜딩하는 데 능숙한 야심가. 과연 조직은, 그리고 자본주의 시스템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영화는 이 질문을 던지며 우리를 냉혹한 경쟁의 한복판으로 초대한다.


2. 스파링 영상 유출: 평판이 실력을 집어삼키는 시대


<사마귀>가 단순한 액션 영화를 넘어 현대 사회의 비정함을 꿰뚫는 지점은 바로 ‘평판 관리’의 중요성을 극적으로 보여준다는 데 있다. 극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 사건은 한울과 재이의 1대1 스파링 영상이 익명의 누군가에 의해 암살자 커뮤니티에 유출되는 것이다. 이 영상에서 한울은 재이에게 패배하고, ‘최강’이라는 그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의뢰는 끊기고, 동료들의 비웃음을 사며, 그는 순식간에 업계의 낙오자로 전락한다.


이 장면은 섬뜩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실력이나 진실보다 이미지와 여론이 한 사람의 경력을 좌우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직장 내 가십, 왜곡된 소문, SNS에서의 ‘저격’ 한 번으로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경험은 결코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한울의 추락은 ‘일만 잘하면 된다’는 순진한 믿음이 이 시대에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비극이다. 그의 실력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를 둘러싼 ‘평판’이 무너지자 그의 시장 가치마저 증발해버렸다.


반면 재이는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든다. 그녀는 MZ세대 재벌 투자자 벤자민 조(최현욱)라는 ‘자본’을 등에 업고, 한울의 추락으로 생긴 공백을 파고든다. 바이럴 마케팅과 외부 투자를 통해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신생 스타트업의 전략을 연상시킨다. 잘 포장된 이미지와 자본이 결합했을 때, 기존의 강자를 어떻게 위협할 수 있는지를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열심히 일한 자’가 아니라 ‘자신을 증명해낸 자’가 승리하는 자본주의의 민낯과 마주하게 되는 지점이다.


3. 독고의 귀환과 세대 갈등: "우리 때는 말이야"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은퇴했던 MK의 전설, 독고(조우진)가 돌아온다. 그는 과거의 성공 방식과 자신이 만든 ‘룰’을 굳게 믿는 인물이다. “우리 때는 말이야”를 입에 달고 살며, 새로운 변화를 조직의 기강 해이로 여기는 ‘꼰대 상사’의 전형이다. 그는 한울처럼 자신의 질서를 따르는 인재는 아끼지만, 재이처럼 그 질서에 도전하는 인물은 위험 요소로 간주하고 제거하려 한다.


독고와 재이의 대립은 모든 조직이 겪는 세대 갈등의 압축판이다. 독고가 상징하는 것은 연공서열, 상명하복, 그리고 기득권의 논리다. 반면 재이는 성과주의, 수평적 네트워크, 그리고 능력에 따른 보상을 외친다. 그녀가 킬러 연합 회의에서 “왜 우리가 당신네 규칙에 따라야 하느냐”고 일갈하는 장면은, 낡은 관행에 얽매인 조직 문화를 향한 젊은 세대의 통쾌한 반격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첨예한 대립 속에서 가장 고통받는 것은 한울이다. 그는 옛 상사에 대한 존경과 의리를 저버릴 수 없으면서도, 변화의 흐름을 거스를 수도 없는 ‘낀 세대’의 슬픔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그의 망설임과 인간적인 고뇌는 비정한 생존 경쟁에서 가장 먼저 도태되는 약점이 된다. 성실함이 미덕이 아니라 무능함의 다른 이름이 되고, 의리가 생존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는 현실. 영화는 한울의 지친 어깨를 통해, 오늘도 회의실과 탕비실 사이에서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는 수많은 직장인의 슬픔을 조용히 어루만진다.


4. 승진의 끝에서 마주한 공허함


결국 최후의 승자는 재이다. 그녀는 자신의 스승이자 아버지 같았던 독고를 제 손으로 제거하고,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MK 엔터의 정상에 오른다. 하지만 카메라가 비추는 그녀의 얼굴에는 승리의 환희가 아닌, 모든 것을 잃은 자의 처절한 눈물과 공허함이 가득하다.


‘승진’이라는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한 직장인이 마침내 원하던 자리에 올랐을 때 마주하게 되는 감정과 같다. 더 높은 연봉, 더 큰 권한을 얻었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동료, 무너진 관계, 그리고 스스로의 양심은 어디에서도 보상받을 수 없다. 재이의 눈물은 성공의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를, 그리고 권력의 정점이 얼마나 고독한 곳인지를 말해준다.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냉혹한 현실을 덧붙인다. 새로운 대표가 된 재이가 한울에게 내리는 첫 번째 임무는, 자신을 도왔던 투자자 벤자민의 제거다. ‘토사구팽(兎死狗烹)’. 필요가 다하면 가차 없이 내쳐지는 것. 이것이 바로 조직과 자본의 생리다. 승자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또 다른 피를 손에 묻혀야 하고, 패자는 그 질서 속에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으며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결코 끝나지 않는 게임이다.


우리 모두는 상처 입은 사마귀다


<사마귀>를 보고 난 뒤 남는 것? 액션의 쾌감을 뚫고 나오는, 묵직한 질문과 씁쓸한 공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의 처절한 몸부림은 결국 ‘나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자리를 위협하고, 때로는 동료의 등을 밟고 일어서야 하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길복순이 한울에게 던졌던 “죽이고 싶은 거야, 지키고 싶은 거야?”라는 질문은, 이제 스크린 밖 우리를 향한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무엇까지 버릴 수 있는가? 한때 소중히 여겼던 신념과 인간다움은 생존의 발목을 잡고 있지는 않은가? 이 냉혹한 자본주의의 정글에서 우리 모두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상처 입은 사마귀일지 모른다.


영화는 명쾌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칼날 위를 걷는 듯한 고된 하루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분투를 스크린 위에 고스란히 재현하며 침묵의 위로를 건넬 뿐이다. 그래서 <사마귀>는 아프다. 그러나 바로 그 아픔 때문에, 이 영화는 단순한 킬링타임용 액션물을 넘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필견의 성찰로 남는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력서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핏자국이 희미하게 묻어있을 테니 말이다. ⓒ혁신가이드안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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