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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하당 Jul 04. 2022

새로운 색을 덧입히기 위해

철거 종료

철거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집이 지어진 이래 아마 처음으로 빛과 바람을 만나게 되었을 공간들. 지붕 위로 하늘이 열리고, 답답해 보이던 벽이 허물어지자 내 마음에도 문득 선듯한 바람이 든다.

이호랑방상- "이 나무는 사랑채 위에 쓰는 것입니다"(2022), Pentax MX/Lomo 400

하지만 적나라하게 드러난 목(木) 부재를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심란하기도 하다. 서까래나 그 주변의 부재들은 교체해 버리면 될 테지만, 이 기둥을 대체 어떻게 고쳐 쓰겠다는 것인지. 이미 책으로 다른 집의 수리 과정을 충분히 봐왔기에, 머리로는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어도, 마음으로는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썩어버린 부연과 평고대(2022)/, Olympus OM-1/Silberra 160

지금이라도 모두 허물어 내고 새로 지어야 하는 게 아닌지, 과연 이 집을 고쳐서 쓰는 게 맞는지에 대해 줄곧 고민한다. 면적은 좀 줄어들겠지만, 우선 공사하기는 훨씬 편할 텐데. 동선도 더 자연스럽게 짜일 테고, 많이 상해버린 목재를 고쳐 쓰느라 이렇게 마음 쓸 일도 없을 텐데.

두꺼운 서까래와 얇은 서까래(2022),  Pentax MX/Lomo 400

하지만 (아마도) 가능하면 티 없이 맑게 살아내고 싶어도 결코 그렇게 풀리지 않는 게 삶인 것처럼, 그리고 매일같이 쌓여가는 후회와 부끄러움조차 나를 이뤄내는 일부인 것처럼, 어쩌면 이 집이 보내온 지난 시간 역시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내 마음에 들이찬다.

다시는 볼 수 없을 벽돌 벽(2022), Pentax MX/Lomo 400

겹겹이 쌓여있는 이 집의 모든 기억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갈 수야 없겠지만, 누군가가 설레는 마음으로 그려 놓았을 바탕 위에  매일같이 새로운 기억을 더해가는 것, 그 과정을 통해서만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하는 편이 새하얀 도화지에 단번에 멋진 그림을 그려내는 것보다 나와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집에 쌓인 네 가지 색(2022),  Pentax MX/Lomo 400

오래된 장소나 물건은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시간의 흐름"을 눈앞에 보여준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닳아 낡아가는 그 모습은 간혹 마음에 심심한 위안마저 주니- 너 홀로 늙어가는 게 아니다, 너만 완벽하지 못한 게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낡아가도 괜찮다- 아마 오래된 골목이, 또 낡아 빠진 동네가 가지는 힘은 바로 여기 있을 것이다. 공을 들여 고쳐나가는 이 집 역시 내게 그런 위안이 되어주기를.

한 달 새 낡아버린 입춘첩(2022).  Pentax MX/Lomo 400

2021.05.21. 삼청동 한옥 매매 계약

2021.09.06. 설계계약: 선한공간연구소

2021.10.08. 기본설계 시작

2021.12.03. 기본설계 종료

2021.12.21. 실시설계 시작

2022.04.12. 시공계약: 서울한옥 by 젤코바코리아

2022.04.22. 실시설계 종료

2022.04.23. 공사 시작

2022.05.21. 철거 공사 전 긴급회의

2022.05.22. 지붕 철거

2022.05.30. 철거 시작

2022.06.08. 철거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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