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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Dec 29. 2016

나이듦이 저주로 여겨지는 시대에 살다

건빵의 2016년 정리기 1

2016년도 이제 겨우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 어느 해고 마무리를 할 때 여러 생각이 동시에 들지 않을 적이 없었지만, 적어도 올해만큼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하게 된 해였다. 그렇다면 과연 ‘나이를 먹는다’는 건 뭘까? 적어도 현재 한국 사회에선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성숙해지고 연륜이 늘어나서 삶에 여유가 생기고 행복해지기보다, 여러 가지로 불행해진다는 걸 의미한다.                



▲ 나이듦에 대해 생각해볼 시기가 왔다.




늙는 건 슬픈 것이야 

    

그래서 나이가 먹었다는 것은 늙었다는 뜻이 되며, 늙었다는 것은 단순히 신체의 기능이 저하됐다는 뜻을 넘어 사회적인 지위가 흔들리고 그에 따라 무시와 차별을 받게 된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친구의 아버지는 한전에서 오랜 기간 일을 하며 기술노동자로 살았는데, 막상 정년퇴임 시기가 다가오자 “70세까지 지금 월급의 반절만 받고 일하는 것은 어떠세요?”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론 그런 제안을 받으면 노동의 가치를 깎아내고 사람을 기계부속품으로 취급한 것이기에 화가 날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한국 사회의 노동현장에선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가치는 사라진지 오래다. 비정규직 제도가 확산되고, 인턴 제도가 뿌리를 뻗으며 노동의 가치는 한없이 급전직하했고 사람은 기계부속품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누구나 일자리를 얻기 위해 허덕이게 되었으며, 그건 장년층뿐만 아니라 청년층의 문제로까지 부각된 것이다. 이런 현실이니 부당한 처사로 자존심은 상하고, 눈물은 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중요한 돈벌이가 흔들리면서 삶은 더욱 더 힘겨운 것이 되고 말았다.



이렇듯이 한창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실직하지나 않을까 불안에 떨다 보니, 그런 불안은 그걸 함께 목도해야 하는 가족에게 전이되어 좌절감이 팽배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누구 하나 어렸을 때 하는 말처럼 “빨리 나이를 먹고 싶어”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으며,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되어 버렸다. 도미노 블록은 결코 혼자만 쓰러지지 않는다. 쓰러지면서 주위의 블록까지 연쇄적으로 넘어뜨리며 하나의 흐름을 만든다. 지금 우리 사회에 팽배한 불안감, 공포심, 우울감은 그런 흐름에 따라 나에게도 흘러왔으며, 또 너에게로 흘러갈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게 이와 같이 부정적인 것이 되다 보니, 누구나 그 나이에 맞게 보이려하기보다는 한층 어려 보이고 싶어 한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태를 보면서 놀라웠던 점은 ‘여자로서의 사생활’이라는 말로 온갖 노화방지를 위한 시술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왔다는 점이다. 물론 박 대통령도 권력자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이니 미용을 신경 쓰고 건강을 신경 쓰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공적 업무보다 그런 시술들을 더욱 중시하고 있었다는 점이 놀라웠고, 그런 생각의 이면엔 ‘나이 듦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이 깔려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박 대통령의 이런 몸부림엔 지금 한국 사회가 얼마나 나이 듦을 극도로 싫어하는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와 같은 부정적인 시각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불연 듯 ‘그래도 이제 한 해가 저물고 2016년을 정리하는 시기가 왔으니, 올 한해를 정리하는 글을 써보자’라는 생각으로 막상 글을 쓰려 했을 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벌써 30대 중반을 넘어 후반에 접어드는 나이가 되고야 말았다”로 시작할 뻔 했으니 말이다. 처음엔 이 말이야말로 지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잘 드러내주는 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이란 말 속엔 나이 듦을 싫어하는 마음이 짙게 배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쓰던 글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청와대에서 구입한 약품 목록을 보며 우리 사회의 늙음에 대해 다시 한 번 느끼게 됐다.




30대를 희망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계기는 

    

10대가 되었을 땐 그저 하루하루 학교생활에 적응하고 공부만을 생각하기에도 바빴던 것 같다. 물론 공부를 썩 잘하진 못했지만, 주워진 환경에 맞춰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20대가 되었을 땐 드디어 맹목적으로 살던 관습을 버리고 좀 더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희망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물론 20대에도 졸업과 동시에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정해진 길만을 갈뿐이었지만, 그래도 동아리에 든 것이나 도보여행을 한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임용에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 채 30대를 맞이해야 했다. 서른 살이 되던 날 마지막 임용을 준비하며 애를 썼지만, 좋은 결과는 내지 못하고 정리해야 했다. 그 후에 여러 좌충우돌이 있었지만 운 좋게도 교사가 되길 포기했던 그 순간에 교사가 되는 꿈이 이루어졌다. 그 후로 30대는 단재학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게 어느덧 5년이나 흘렀으니 시간은 참으로 빠르고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 도보여행은 20대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30대로 넘어갈 때 사람들은 많은 생각을 한다고 한다. 나에게도 그 때는 임용에도 여러 번 떨어져서 자존심은 바닥을 기고 있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은 사치처럼만 느껴지던 시기였다. 당연히 비관적인 생각이 가득 찰 수밖에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땐 ‘희망’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아마도 28살 때 만났던 학교 선배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밖에 없다. 

28살엔 임용공부를 하며 한문학원에서 강사를 했는데, 그 학원을 운영하던 선배는 마라톤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진취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인데 마라톤까지 하며 체력까지 좋아지니, 에너지가 흐르다 못해 넘칠 지경이었다. 선배와 나는 10살 차이로 나는 20대를 마무리하던 때였고, 선배는 30대를 마무리하던 때였다. 보통 40대가 된다는 것은 의미가 많이 다르기에, 처음으로 나이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인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그 선배는 그런 일반론을 잘근잘근 씹어 먹으며 “나는 40대가 더 기대돼. 30대도 즐거웠지만, 40대엔 연륜도 쌓여서 내가 원하는 걸 맘껏 해볼 수 있으니 말야”라고 말을 했었다. 

그 말이야말로 니이 듦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몸은 점차 약해지고 아픈 곳은 점차 늘어나며 생각은 점차 굳어져 가겠지만, 그럼에도 여태껏 살아온 지혜로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이 나의 30대의 포문을 여는 화두가 되었다. 20대처럼 맹목적으로 한 길만 쫓아가기에 정신이 없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여러 길을 헤매며 나의 길을 만들어갈 능동적인 30대의 삶을 그리며 활기차게 시작했다.               



▲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생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선배와 이야기를 하면서 느낄 수 있었다.




그저 보낸 하루하루를 저주로 느낄 수 있는 힘

     

그랬던 내가 지금은 왜 나이 듦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일까? 30대 이후의 삶이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삶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일까?

전혀 그런 것은 아니다. 30대 이후의 내 삶은 전성기라고 해도 될 만큼 만족스런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단재학교에 취직하여 평소에 이상적으로만 그려오던 온갖 교육적인 이상을 맘껏 실천해볼 수 있었으며, ‘돈벌이의 지겨움’도 제대로 만끽해볼 수 있었다. 그 뿐인가, 취직을 하기 전까지 두 번에 걸쳐 도보여행을 하며 ‘이렇게 늘 여행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단재학교는 여행을 중시하는 학교답게 영화제가 열리는 시기엔 전주와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고, 한 학기 당 두 번씩 전국 방방곡곡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공부하던 습관 그대로 ‘이렇게 책도 읽으며 맘껏 배우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배움의 열정이 가득한 학교라는 공간답게 박동섭 교수, 우치다 타츠루 선생, 에듀니티와의 접속을 통해 다양한 것들을 맘껏 배울 수도 있었다. 남들처럼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살만한 정도로 벌면서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자연스레 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 단재학교에서 근무를 하며 원하던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덧 5년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아쉬움도 없이 후회도 없이 최고의 시간을 보내며 행복해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돌아보면 바로 그게 문제였다는 것을 느낀다. 아쉬움도 없고 후회도 없는 삶을 보내왔다는 것, 그래서 어느덧 30대를 서서히 마무리할 시기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 그렇다.           



오늘도 보람 없이 하루를 보냈구나. 하루를 보내면서 아쉬움이 없다니, 내 정신이 이렇게 타락할 줄이야.  


         

위에 인용한 글은 1967년 2월 14일에 쓴 전태일 열사의 일기 내용이다. 그는 나름 공장에서 인정을 받아 시다들을 관리하는 중간 관리자가 되었다. 중간 관리자가 할 일은 시다들을 재촉하여 납기일 내에 제품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쪼는 일이다. 평화시장엔 옷 주문양이 늘 넘쳐나고 있었기에 여공들이 화장실에 가거나 잠을 잘 시간도 없이 끊임없이 미싱을 돌려야만 했다. 그러니 화장실을 제 때 가지 못해 얼굴이 누렇게 뜬 여공부터 잠을 자지 못하도록 각성제를 맞아 핏기 없는 여공까지 그들의 삶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간 관리자는 여공들의 사정도 잘 알며, 사장의 성격도 잘 알기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늘 신경은 신경대로 써야 하며, 정신은 정신대로 없는 상황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는 열심히 살았던 하루를 반성하며 ‘오늘도 보람 없이 하루를 보냈구나’라는 말을 하기에 이른다. 한 번은 그는 집까지 버스를 타고 갈 차비만 달랑 있었지만, 새벽까지 일할 시다들이 눈에 밟혔던지 그 돈을 몽땅 털어 붕어빵을 사들고 창동에 있던 집까지 걸어갈 정도였다. 평화시장부터 창동까지의 거리는 3시간이 넘는 거리로,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니 조금 눈을 붙였다가 바로 나와야만 한다. 



▲ 청계천에 가면 전태일 흉상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늘 고민하고, 몸소 행동하며 살고 있었지만, ‘보람 없이 하루를 보냈구나’라고 하얗게 정신의 뼈대를 세운 그를 보면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야말로 어찌 보면 30대를 그저 하루하루 근근이 무념무상으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30대의 삶을 보람 없이 살았구나.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아쉬움이 없다니, 내 정신이 이렇게 타락할 줄이야’라고 되뇌어야 맞는지도 모른다. 

그처럼 2016년을 마무리하며 정리하는 글을 쓰고자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저 살아가기에 바쁘다고, 아무 일 없이 오늘 하루 살았으니 잘 살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일상에 파묻혀 있나 돌아보고 반추해보아야 한다. 그럴 때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지났기에 한 살을 먹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타락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왔기에 한 해가 흘렀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 글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나의 2016년을 돌아볼 것이다. 단재학교의 경험을 통해 돌아보는 일 년과 글쓰기를 통해 돌아보는 일 년이 그것이다. 다음 편은 ‘건빵의 학교생활’을 정리하겠다. 



▲ 10월엔 청계광장에서 대안학교 한마당이 있었다. 그때 참여했던 우리 학교 부스. 다음 편에선 건빵의 학교생활을 보자.





목차     


1. 나이 듦이 저주로 여겨지는 시대에 살다

늙는 건 슬픈 것이야

30대를 희망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계기는

그저 보낸 하루하루를 저주로 느낄 수 있는 힘     


2. 기꺼이 해보라

5년 후엔 단재학교를 나갈 생각으로 근무하라

낙숫물이 바위 뚫듯, 그렇게 매일을 살라

기꺼이 배우고, 기꺼이 해보라

닭띠여 정유년을 누비라


3. 착각이 만든 인생착각이 만들 인생

사람을 만드는 무엇에 대하여

신나게 글쓰기 위해 지구에 왔습니다

착각하라. 두 번 하라

2016년엔 신나게 써 재꼈다

착각이 만든 인생을 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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