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고헤이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읽기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는 두 가지 의미에서 ‘자유’롭다고
마르크스는 말했습니다. 하나는 노예처럼 쇠사슬에 묶여 강제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의 ‘자유’입니다. 사농공상이나
카스트와 같은 신분제도가 없는 사회에서는 원하는 곳에서 원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예나 신분제와 같은 부자유에서 해방된 우리는 동
시에 생산수단에서도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생산수단프리
(free)’란 생존에 필요한 것을 생산할 수단을 가지지 않았음을 뜻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프리’라는 단어는 ‘속박되어 있지 않다’
는 의미가 아니라 무언가가 ‘없다’는 의미, 예를 들어 카페인프
리, 알코올프리 등의 의미와 같이 사용됩니다. 이 상태는 앞 장
에서 살펴본 ‘코먼’이 ‘울타리 치기’에 의해 해체된 결과입니다.
생산수단에서 분리되면 사람들 대부분은 더 이상 자급자족
할 수 없고, 상품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든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언가를 팔아야 합니다. 하
지만 보통 사람이 생계를 위해 팔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노동력
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사회의 노동자는 노예와 달리 자신의 노동력을 ‘자
유롭게’ 팔 수 있습니다. 즉,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는 노동계
약을 맺기 전까지는 기본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며, 노동자는
원하는 회사와 계약을 맺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는 거기까
지입니다. 일단 노동력을 팔고 나면, 그 뒤로는 더 이상 노예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마르크스 경제학자 우치다 요시히코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노동자는 노동력에 대한 처분권은 있지만, 노동에 대한 처분권
따위는 전혀 없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면 직장에서 노동을
마음대로 처분해 보라. 처분되는 것은 당신 자신일 것이다.
(중략) 노동력에 대한 처분 능력을 100퍼센트 갖는다는 것은
노동의 처분 능력을 100퍼센트 잃는다는 것과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에 있다.(『자본론의 세계』 78쪽)
‘노동력에 대한 처분권’이란 자신의 노동력을 누구에게 팔지
에 대한 선택권입니다. 이것은 항상 노동자의 손에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파는 순간 노동자는 ‘노동의 처분 능력’, 즉
노동 방식의 자유를 100퍼센트 잃게 됩니다. 계약을 맺으면 그
순간부터 노동자는 자본가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일해야 합니
다. 이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일하면 해고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일할지 결정하는 이도, 그 노동이 만들어 내는 가치를
손에 넣는 이도 자본가입니다. 노동 현장에 자유롭고 평등한 관
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동문제 연구의 대가인 구마
사와 마코토는 “민주주의는 공장의 문 앞에서 주저앉는다”라고
갈파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이 상품화된 사회에서 노동자는 살
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포기하지 않을 도리가 없
습니다. 거기에는 실질적인 선택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르크
스는 현대 노동자의 처지를 노예제도에 비유하며 ‘임금노예’라
고도 일컬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
니다. 나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그래서 원하
는 물건을 시장에서 살 수 있는 것을 자본주의의 장점으로 내세우는 것
입니다). 이 마음을 이용해 자본주의는 우리를 계속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출처]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지음, 정성진 옮김, arte 2024, 77~80.
2024.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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