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바심 드는 오후
글씨를 심각하게 못 쓴다. 초등학교 통지표엔 대개 좋은 이야기만 적기 마련이다. 예컨대 너무 덤벙대면, 활발하다고 한다. 내성적이면 침착하다고 하고, 보통 이런 식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 하긴 그때는 국민학교였지. 어쨋건 그때 통지표에 이런 말이 있었던 게 기억난다. "가정에서 글씨 지도가 필요합니다."
오죽 못 썼으면 그랬을까. 나이를 먹으면서 글씨가 나아지긴커녕 더 엉망이 됐다. 진로 선택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과, 이과 정할 때 이과를 택한 이유 중 하나도 글씨였다. 글과 글씨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지만, 왠지 글씨를 너무 못 쓰는 사람은 문과로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실제로 글씨가 엉망인 사람은 각종 고시 등에서 불리하다는 말도 들었다. 고시서점에서 펜글씨 교본을 파는 것도 봤다.
그런데 지금은 기자 노릇으로 먹고 산다. 불편할 때가 많다. 일단 내 글씨를 내가 못 알아본다. 그러니 취재 메모가 쓸모가 없다. 이런 내가 직업을 유지하는 건, 크게 두 가지 이유 덕분이다. 하나는, 기억력이다. 요즘은 그렇지 않은데, 전에는 외우는 건 잘 하는 편이었다. 취재한 내용을 어지간하면 거의 기억해냈다. 두 번째는 기계의 발달이다. 보이스레코더, PDA, 소형 노트북, 아이패드, 스마트폰...등. 메모 기능을 보완할 수 있는 디지털 기기를 두루 활용해 왔다. 손 글씨는 아예 무용지물이고, 기억력도 망가져버린 지금, 스마트폰 덕분에 먹고산다.
예전에 어떤 인터뷰 자리에서 내가 수첩에 받아쓰지 않고 있으니까, 인터뷰이가 갑자기 화를 냈다. 무성의한 것 아니냐고. 그래서 보이스레코더를 보여줬다. 사실 인터뷰 시작하면서 '이걸 켜둘게요'라고 양해를 구했고, 그 분도 고개를 끄덕였는데, 실제로 그는 '이걸'이 가리키는 게 뭐였는지 몰랐건 게다.
나 같은 필기 장애인이 글 써서 먹고사는, 작은 기적. 이런 일이 앞으로도 일어날까. 외국어를 전혀 못하는 사람이 무역으로 먹고산다거나, 숫자엔 젬병인데 금융 투자의 달인이 된다거나.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기술의 진보가 예상보다 빨라서다. 인공지능이 이젠 작곡도 한다. 대학 입시도 치르고, 기사도 쓴다.
이 대목에서 다시 흠칫 한다. 디지털 기기의 발달 덕분에 글로 밥벌이를 할 수 있었던 내가, 또 어쩌면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밥줄이 끊길 수 있겠다. 그 전에 소설가 지망생이 아닌 소설가가 돼야 겠다. 조바심이 드는 오후다.
소설 '알을 품은 섬'
첫 번째 이야기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두 번째 이야기 :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세 번째 이야기 : "활 잘 쏘는 자가 왕 노릇 하는 까닭"
네 번째 이야기 : "화살 맞아도 끄떡없으니 활쏘기란…"
다섯 번째 이야기 : "화살이 눈에 박히자 가야 전사들은"
일곱 번째 이야기 : "그들을 나와 함께 황천으로 보내라"
여덟 번째 이야기 : 왕이 제 자식 죽인 자를 접대한 까닭
열번째 이야기 : "우리 자식들 대신 그들을 묻읍시다"
열한 번째 이야기 : "죽은 왕은 썩은 피를 타고 났소"
소설 '내 남자친구는 북한 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