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 14살 -1/2

둘째 이야기

by 노연석

지금까지 가족에 대한 이야기 중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에 대한 이야기들로 10편의 글을 작성했다. 10편을 작성하는 동안 손을 못 대고 있는 부분은 동생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유는 마땅히 동생들과의 추억이라는 것이 없다. 코로나 사태가 확산되기 전에 동생들과 집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었는데 미루고 미뤄져 언제 같이 식사를 할지는 기약이 없다. 식사를 하면서 동생들의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했는데..


둘째 동생 이야기

내 바로 아래 9살 차이 남동생, 혼자 산지 오래되었다. 아직 솔로이다. 동생도 19살에 회사 생활을 시작하여 20년을 혼자 살아가고 있다.


한국에 IMF 위기가 발생한 지 3년이 되어가는 시점, 모든 경제상황이 좋아지고 있었지만 취업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20년 전 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 후 경제활동의 일선으로 뛰어들어야 했지만 IMF의 영향으로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둘째도 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인지, 아니면 나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IT쟁이로 성장을 했다.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내가 일하는 곳에 OP라고 불리는 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해 주었다. 정규 직원이 아닌 파트너사 직원으로 시작했다.


OP는 OPeration에서 OP를 따서 부르는 명칭으로 정확하게는 전산 OP이나 우리는 모두 IT쟁이이기 때문에 OP라고 불렀다. 하는 일은 서버(컴퓨터)를 운영하는 전산실내에서 서버의 가동현황을 모니터링하고, 주기적으로 데이터를 백업하고, 업그레이드 작업 등 전반적인 서버 운영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지만 주로 모니터링 업무로 시작을 한다.

내가 하는 일은 그 서버에서 운영되는 Application(앱)을 개발하고 운영, 유지보수하는 업무를 한다. 내가 만든 앱이 동생이 관리/운영하는 서버에서 실행이 된다.


그때 전산실은 24시간 모니터링이 필요하던 시절이라 근무시간은 야간이 될 수도 있고, 주간이 될 수도 있다. 통상 2교대 근무를 하는 것이 전산실 Operator의 운명이다. 그래서 나는 동생을 자주 볼 수는 없었다. 굳이 내가 전산실에 찾아가지 않으면 같은 회사 내에 근무를 해도 만날 수는 없었다.


다행히 그 근무지는 급여는 얼마 되지 않았을지 모르겠으나 숙식을 비교적 저렴하게 해결할 수 있는 곳이어서 그나마 괜찮은 곳이었을 것이다. 몇 년 후 그곳의 일을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하게 되면서 몇 해를 우리 집에서 같이 살기도 했었다. 내가 결혼 후 3번째 이사를 했던 집인데 그 집에는 동생들이 몇 년씩 살다가 나가곤 했는데 우리집이 인규베이터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둘째는 OP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 일의 성장경로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고 스스로의 노력 없이는 그 생황을 빠져나오기 힘들다. 거의 20년이 다되어 가는 지금 동생은 현재 6번째 직장을 알아보고 있다.


얼마 전에 카톡을 하는데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고 가려고 하는데, 다른 회사에서 연락이 왔나 보다. 나도 아는 회사이고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또 회사를 옮기는 거야?"
"응, 몇 번 안돼?"
"뭐, 몇 번 안된다고?"
"음, 벌써 5번을 옮겼구나, 적지는 않네..."
그런데, 이번에 6번째 회사로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나와는 정말 반대의 성향이다. 나는 한 직장에서 근 30년을 일하고 있는데...

나는 가끔 저렇게 이직을 잘하는 사람들을 부러워 할때가 있다. 나는 상상도 못할 일이기때문이다. 이 회사의 바깥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쉽게 박차가 나갈 수가 없는데 수시로 원하는 타이밍에 회사를 옮겨 다닌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물론 그 속에는 많은 아픔들이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두고 나오는 욱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발생하는 퇴사도 있을 것이다.


사진이 없다. 동생과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들이 찍어줬던 사진 말고 없는 것 같다. 그만큼 왕래도 없고 각자의 삶을 살기 바빠이기도 했지만 동생이 10살 초등학생 때 나는 이미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떨어져 살다 보니 더욱더 그런 추억의 사진들이 없기도 하다.


갑자기 더 미안한 마음이 든다. 둘째 동생에게 내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해 줄 수 있었던 건 첫 취직을 도우고 몇 해간의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것뿐이었다. 좀 더 잘해 주었으면 좋았겠지만 우리 집안은 태생이 각자도생인 것 같다.


셋째 이야기도 하려고 했으나 이번 글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다음 글에 셋째 이야기도 해 보려고 한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기억하는 시간을 가질 수 조차 없는 것 같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들을 기억해 내려고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과 나를 떠올려 보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기억나는 것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겨 보고 싶지만 이상하게 생각나는 게 많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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