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지 않는 경상도 남자 어른과의 대학병원 동행기
나의 아버지(애엄마인 내게는 여전히 '아빠')는 오래전에 암 진단을 받으셨다. 그 후로 10년이 넘게 시간이 흘렀고, 다행히 아버지는 일상을 잘 유지하고 계신다. 3개월에 한 번씩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 와서 검사를 하고 그 결과를 마주하는 것은, 마치 학생들이 시험을 보고 성적표를 배부받는 것처럼 긴장되고 신경이 쓰이는 일이지만 그래도 잘 해내고 계신다.
아버지의 암 진단 이후 몇 가지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첫 번째는 진단 초기. 암세포 제거를 위한 시술을 받으시기 위해 입원을 하셨을 때이다. 걱정만 앞설 뿐, 어떤 말들이 환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될지 전혀 감이 없을 때였는데.. 병상에 누운 아버지가 창 밖을 바라보며 이렇게 얘기를 하시는 것이다.
우와~ 올림픽 대교 야경이 정말 예쁘다.
순간 내 마음속을 스친 것은 '다행이다'라는 감정이다. 아버지가 진단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계시구나. 정말 다행이다.
두 번째는 부모님과 오빠, 나 이렇게 원가족으로 떠난 노르웨이 여행이다. 자녀가 성장하고 결혼을 하고 나면 사실 이렇게 원가족 구성원으로 여행을 가기가 어렵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확률은 몇 배로 낮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아마도 아버지께서 건강하게 우리 곁에 계실 수 있는 '시간의 유한함'에 대한 체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여행 중에 우리는 아버지의 간 이식, 가족 공여자 등에 대한 각자의 솔직한 입장을 나누었다. 이밖에도 우리는 프레이케스톨렌 정상에서 화려한 절경 대신 뿌연 안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아쉬움, 송네피요르드로 이동하는 내내 펼쳐졌던 비현실적인 풍경, 우연히 들른 중식당에서 너무나 맛있게 먹었던 찰진 백미밥 등의 여행 기억을 공유하게 되었다.
휴직을 시작하며 3개월마다 서울에 오시는 아버지의 외래 진료에 함께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늘 결과만 전해 들었지만, 이것이야 말로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우선순위에 두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터미널에서 차로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식사를 하고 병원에 갔다. 워낙 자주 오시는 곳이다 보니 병원에서 아버지의 동선은 막힘이 없다. 접수 - 대기 - 진료 - 수납 & 처방전 발급. 말 수가 적은 경상도 남자 어른인 나의 아버지는 역시 예상대로 주치의를 만나서도 말씀이 많지 않으셨다. 옆에 있던 내가 이것저것 질문을 한다. 진료가 끝나고 주치의 교수님이 나를 따로 불러 추가 설명을 해주시는 것을 듣다 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업무에 복귀한다 하더라도 가능한 일정을 비워 이 중요한 일을 아버지와 함께 하고 싶다. 함께 먹었던 음식, 함께 나누었던 대화, 그날의 공기와 햇살 등 아버지와 일상을 더 자주 & 많이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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