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자병법] 수녀님 678명을 대상으로 했던 연구의 놀라운 결과
얼마 전 뉴스를 살펴보다 재미있는 기사를 하나 읽었는데요. 수녀님들 중에서도 어휘력이 풍부하고 글을 잘 쓰는 수녀님들이 그렇지 못한 수녀님들보다 치매에 걸릴 확률이 훨씬 더 낮았다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연구팀이 노트르담 수녀 학교 출신의 75세 이상 수녀님 678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연구 조사 결과였는데요. 언어 능력이 노년의 건강과 치매 발생 확률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기 위한 연구였습니다.
조사를 위해서 연구팀은 수녀님들이 20대 시절부터 남겼던 각종 기록들, 개인적으로 작성한 수필과 일기는 물론 기록보관소에 보관된 각종 공문서들까지 샅샅이 살펴봤는데요.
조사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어휘력이 부족해 무미건조한 글을 썼던 것으로 평가된 수녀님들 중 약 80%는 결국 치매에 걸리셨던 데 비해 다채로운 단어와 표현들이 등장하는 풍성한 글을 썼던 수녀님들은 10%만이 치매에 걸리셨습니다.
잠깐 생각해보셔도 다들 아실 수 있듯이 수녀님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동일한 환경에서 지내오신 분들입니다. 20대 초중반에 수녀가 되셔서 평생 술도 드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으시면서 같은 환경에서 같은 음식을 드시면서 같은 일과대로 생활하시죠.
그렇기 때문에 수녀님들은 일란성 쌍둥이와 함께 어떤 요소들이 사람의 건강과 질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연구 대상이기도 합니다.
동일한 환경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서 건강 상태와 질병 발생 유무가 차이가 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개인적 특성이 이 같은 차이를 발생시켰는지를 연구하기에 좋은 대상이 되는 것이죠.
(참조)
수녀님들을 대상으로 한 이 실험 결과가 저와 독자님들께 시사하는 바는 다들 아실 텐데요.
꾸준한 독서와 글쓰기야말로 건강한 노년을 보내기 위해 꼭 필요한 활동이라는 점입니다.
다양한 어휘와 표현을 습득함으로써 상상력과 사고력과 언어 능력을 높이는 방법은 독서와 글쓰기뿐이니까요. 독서와 글쓰기야말로 건강한 삶이란 목표를 위해 날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두 날개라는 말인데요.
정말 책읽기와 글쓰기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혜택은 무궁무진한 것 같습니다.
(지금 읽고 계신 이 글은 홍선표 작가가 매주 한 편 보내드리는 이메일 뉴스레터 <홍자병법>의 본문을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홍자병법>을 구독하시면 세상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고급지식을 매주 한 편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아이디만 입력하시면 바로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신체 건강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수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지금부터는 자신을 위한 글을 씀으로써 자신을 평범한 만화책 작가‧편집자에서 20세기 대중문화의 가장 위대한 창작자로, 20세기의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호메로스로 거듭나게 만든 한 남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스탠 리(Stan Lee). 초능력을 가진 주인공들이 나오는 슈퍼 히어로물 영화를 좋아한다면, 그중에서도 마블 스튜디오에서 나온 영화의 팬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다.
그의 이름은 낯설더라도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헐크, 판타스틱4, 엑스맨 같은 슈퍼 히어로 캐릭터들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이 캐릭터들이 나오는 영화를 한 편이라도 본 사람이면 비록 기억은 못하더라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2000년에 영화 엑스맨에서 길거리 핫도그 노점상으로 등장한 이후 스파이더맨, 판타스틱4,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맨 등 마블 캐릭터가 등장하는 십여 편의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한 마블의 감초이기 때문이다.
이 캐릭터들은 모두 ‘마블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가 만들어낸 주인공들이다. 그는 1940년 만화 출판사에 취직한 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2018년까지 약 80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캐릭터들과 스토리를 창조했다.
처음엔 만화로 시작했지만 세상의 변화에 따라 그의 활동무대도 점차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 게임 등 오늘날의 엔터테인먼트업계 전체로 넓어졌다.
그는 자신의 작품 뒤에 조용히 숨어있던 동시대의 다른 만화 작가들과는 달리 글을 통해 대중들 앞에 나섬으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렸고, 전 세계 마블 팬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리더가 될 수 있었다.
<슈퍼맨>과 <배트맨>을 처음 만들어낸 창작자의 이름은 대중들에게 잊혀졌지만 <스파이더맨>과 <아이언맨>, <헐크> 아버지인 그의 이름은 계속해서 기억되는 것도 이 덕분이다.
만약 그가 스스로를 위한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 역시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들의 그림자에 묻혀 매니아들 사이에서나 간간히 언급되는 흘러간 창작자로 남았을 게 분명하다.
스탠 리는 필명이다. 그의 본명은 스탠리 마틴 리버다. 필명을 쓴 건 만화 작가·편집자라는 직업이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자기 직업을 부끄러워하면서 보냈다. 한때는 만화 작가가 아닌 잡지 편집자나 시나리오 작가 같은 다른 직업을 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가 인생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만화책 제작보다는 자신의 작품을 방송 드라마와 영화로 재탄생시키는 일에 집중했던 데는 이런 영향도 있었다.
그가 한창 만화책을 만들던 1940~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만화책은 어린애 그리고 나잇값 못하는 덜 떨어진 어른들이나 보는 유해물로 여겨졌다. 만화 작가는 어린애들의 코 묻은 돈을 노리고 황당무계한 이야기나 꾸며대는 한심한 인간으로 취급당했다.
젊은 시절 내내 자신의 직업을 부끄러워하며 살았던 스탠 리는 30대 후반 무렵엔 정말로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으려 했었다.
그리고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내놓은 작품이 바로 <판타스틱4>였다. 다른 만화책에 나오는 흔해 빠진 캐릭터들과는 전혀 다른 살아 움직이는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 덕분에 이 만화는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얻게 된 스탠 리는 계속 회사에 남기로 결정한다. 만약 그가 이때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도전하지 않고 회사를 그만뒀다면 <스파이더맨>, <헐크>, <아이언맨>은 세상에 등장할 수 없었다.
<판타스틱 4>를 시작으로 히트작들을 연달아 내놓으면서 큰 성공을 거둔 스탠 리는 이제 스스로의 존재감을 알릴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작품 속 슈퍼 히어로들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의 팬으로 만들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사람들은 얼굴 있는 창작자에게 환호하며 얼굴 있는 창작자만이 대중들의 환호를 돈과 명성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만화가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든 자신은 계속해서 날품팔이 만화공장 일꾼에 머물러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중들 앞에 서기 위해 그가 선택한 수단이 바로 글이었다. 자신의 지지 세력을 만들기 위해 글을 쓰는 건 대통령이 되는 정치인이나 만화 작가나 다르지 않다.
1965년 그는 만화책 마지막 장에 ‘마블 작업실 게시판’이란 코너를 만든다. 해당 만화책을 작업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소소한 이야기들과 앞으로 나올 만화책에 대한 소개,
그리고 자신의 일상에 대해서 편하게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1940년에 만화 작가 일을 시작한 지 25년만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만화 작가답게 그는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선 자신과 동료들이 저마다의 뚜렷한 캐릭터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글을 쓸 때면 자기 자신을 ‘스마일링 스탠 리’라는 이름의 언제나 일에 파묻혀 사는 괴짜 편집자 캐릭터로 나타냈다.
게시판 코너에 들어가는 칼럼의 주제는 다양했다. 어떨 때는 그저 시시껄렁한 유머와 수다로 한 페이지를 채우기도 했고, 때로는 인종 차별 문제처럼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기도 했다.
(지금 읽고 계신 이 글은 책 <최고의 리더는 글을 쓴다>의 미공개 원고입니다.)
“특정 인종을 차별하고, 특정 나라를 멸시하고, 특정 종교를 비방하는 행위는 완전히 비이성적이고 명백히 정신 나간 짓입니다”
마블로 전해진 팬레터 중 재미있는 사연을 담고 있는 내용을 소개함으로써 이 자리를 독자들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공간으로 만들어나갔다. 이런 식으로 그는 모든 만화책마다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항상 즉흥적으로 글을 썼어요. 이야기를 한참 쓰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글에다 집어넣었죠”
책뿐만이 아니었다. 일찍부터 캐릭터 상품 시장에 눈을 뜬 마블은 장난감과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 등을 팔았는데 이런 상품을 주문하면 스탠 리가 쓴 ‘스탠의 솝박스 페이지’란 글도 상자 안에 담겨 배달됐다. 매달 한 번씩 마블의 캐릭터 상품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을 위한 글을 썼다.
“소소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최대한 따뜻하고 친밀한 느낌을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게 통한 것 같아요”
이처럼 작품 밖으로 걸어나가 자기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음으로써 어린 독자들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스탠 리를 마치 친한 삼촌과도 같이 여기게 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블의 독자들에게 스탠 리는 그저 만화 작가가 아니라 마블 그 자체로 여겨지게 됐다.
스탠 리는 자신이 처음 게시판 코너를 통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에 대해서 다음처럼 설명했다.
“우리가 사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팬들은 자기가 마블의 일원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그 모든 괴짜 작가들과 절친한 사이가 된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나는 독자들이 멀리 떠나 있는 친한 친구에게 편지를 받은 것처럼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요.”
자신의 사적인 모습을 공개함으로써 독자들과 소통하려 했던 그의 노력 덕분에 그는 능력 좋은 작가가 아닌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마블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 ‘스탠 더 맨’이라는 캐릭터가 스파이더맨이나 아이언맨 같은 캐릭터와 나란히 피규어 상품으로 만들어져 팔리고, 게임 속 캐릭터로도 등장하는 모습은 마블 팬들에게 그가 어떤 의미인지를 잘 보여준다.
글을 통해서 얼굴 있는 창작자로 거듭나겠다는 다짐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꾸준한 글쓰기가 없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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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본문 읽기)
홍선표 작가
<최고의 리더는 글을 쓴다>, <내게 유리한 판을 만들라>
<홍선표 기자의 써먹는 경제상식>, <리치 파머, 한국의 젊은 부자농부들>
rickeygo@naver.com
(책 <최고의 리더는 글을 쓴다>를 읽으시면 제프 베이조스, 빌 게이츠, 일론 머스크, 이나모리 가즈오, 레이 달리오 등 최고의 리더 19인이 글을 쓴 이유 5가지와 글을 씀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5가지 성과를 쉽고, 깊이있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책 <최고의 리더는 글을 쓴다>에 수록된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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