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시마 다케오 '한 송이 포도' -성장의 아픔

[일본 아동 문학 04] 아리시마 다케오 원작 一房の葡萄

by YOU EUNKYOUNG

한 송이 포도 (一房の葡萄)

원작: 아리시마 다케오 | 번역: 유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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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요코하마의 야마노테라는 곳에 있었는데, 그 근처는 거의 서양인들만 사는 동네였고 우리 학교 선생님들도 모두 서양인이었습니다. 학교를 오갈 때는 언제나 호텔이나 서양인 회사들이 늘어선 해안 거리를 지나다녔습니다. 그 거리 해안가에 서서 보면, 새파란 바다 위에 군함이며 상선들이 가득 늘어서 있었고,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배나 돛대와 돛대 사이에 만국기를 걸어놓은 배들도 있어서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자주 해안가에 서서 그 풍경을 지켜보았고, 집에 돌아오면 기억나는 대로 최대한 아름답게 그림으로 옮겨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투명한 남빛 바다색과, 하얀 범선들이 물과 맞닿은 부분에 비쳐 보이던 엷은 분홍빛만은 내가 가진 물감으로는 아무리 해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려봐도 실제 풍경으로 보았던 그 색깔로는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불현듯 학교 친구가 가지고 있던 서양 물감이 생각났습니다. 그 친구 역시 서양인이었는데, 나보다 두 살이나 위여서 올려다봐야 할 만큼 키가 큰 아이였습니다. 짐이라는 이름의 그 아이가 가진 물감은 바다를 건너온 상등품으로, 작은 먹 같은 사각형 모양으로 가벼운 나무 상자 안에 두 줄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어느 색깔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남빛과 옅은 분홍빛은 놀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짐은 나보다 키는 컸으면서도 그림은 훨씬 못 그렸습니다. 그런데도 그 물감으로 색을 입히면 서툰 그림조차 어딘지 몰라보게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것이 부러웠습니다. 저런 물감만 있다면 나도 바다 풍경을 정말 바다처럼 보이게 그려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내 보잘것없는 물감만 탓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날부터 짐의 물감이 갖고 싶어졌습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갖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겁이 나서 아빠나 엄마에게 사달라고 할 마음은 들지 않아서 매일같이 그 물감 생각만을 생각하며 며칠을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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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게 어느 무렵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가을이었을 겁니다. 포도알이 잘 익어 있었으니까요. 날씨는 겨울이 오기 전의 가을날이 흔히 그렇듯, 하늘 높이 그 멀리 깊은 곳까지 다 비쳐 보일 듯 청명한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지만, 그렇게 즐거워하던 그 순간에도 내 마음은 왠지 그날의 하늘과는 정반대로 먹구름이 낀 듯했습니다. 나는 혼자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내 얼굴을 봤더라면, 분명 하얗게 질려 있다는 걸 알아챘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짐의 물감을 갖고 싶어서, 정말이지 너무 갖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진 겁니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갖고 싶어진 거죠. 짐은 내 마음속 생각을 분명 다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슬쩍 그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짐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즐겁게 웃으며 옆에 앉은 친구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내 생각을 다 알고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이야기하는 것이 “두고 봐, 저 일본인 녀석이 내 물감을 훔칠 게 분명하니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나는 기분이 언짢아졌습니다. 하지만 짐이 나를 의심하는 것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나는 더욱 그 물감이 갖고 싶어져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2

내 얼굴은 귀염성 있게 생겼을지 모르나 나는 몸도 마음도 약한 아이였습니다. 게다가 겁이 많아서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참아버리는 성미였지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다지 귀여움받지 못했고 친구도 없는 편이었습니다. 도시락을 다 먹자 다른 아이들은 운동장으로 나가 활기차게 뛰어놀기 시작했지만, 나만은 그날따라 유독 마음이 무거워서 혼자 교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바깥이 밝은 만큼 교실 안은 더 어두워서 마치 내 마음속 같았습니다. 내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짐의 책상 쪽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저기 칼로 새긴 낙서에, 손때가 묻어 새까맣게 변한 저 책상 뚜껑을 열면, 그 안에 책과 수첩, 석판과 함께 사탕 같은 나무색 물감 상자가 들어있겠지. 그리고 그 상자 안에는 작은 먹처럼 생긴 남빛 물감, 옅은 분홍빛 물감이……. 나는 얼굴이 붉어진 것 같아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버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곁눈질로 짐의 책상을 바라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려 괴로울 정도였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마치 꿈속에서 귀신에게 쫓길 때처럼 마음만 조급해졌습니다.

수업 예비 종이 댕댕하고 울렸습니다. 나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아이들이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세면장으로 손을 씻으러 가는 모습이 창밖으로 보였습니다. 순간 나는 머릿속이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듯한 기분 나쁜 감정을 느끼며, 비틀비틀 짐의 책상으로 다가가서 반쯤 꿈을 꾸는 기분으로 그 뚜껑을 열어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 수첩과 필통 사이에 낯익은 물감 상자가 들어있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상자 뚜껑을 열어 남빛과 옅은 분홍빛 두 가지 물감을 집어내어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서둘러 언제나 줄 서서 선생님을 기다리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우리는 젊은 여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들어가 각자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나는 짐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지만, 도저히 그쪽을 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한 짓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서 기분 나쁜 듯도 했고, 한편으로는 안심도 되는 이상한 기분이었습니다. 평소에 무척 좋아하는 젊은 여선생님이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긴 했지만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도 가끔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날따라 선생님이 나를 보는 게 싫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왠지 모두가 귓속말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한 시간이 지난 겁니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자 나는 후유 안심하는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우리 반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 "잠깐 이리 와봐"하며 내 팔꿈치를 붙잡았습니다. 순간, 숙제를 하지 않았는데 선생님한테 지목당했을 때처럼 덜컥하고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모르는 척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부러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며 마지못해 운동장 구석으로 끌려갔습니다.

"너 짐의 물감 가지고 있지. 여기 내놔."

그렇게 말하며 그 학생은 내 앞에 넓게 벌린 손을 쑥 내밀었습니다. 그렇게 추궁당하자 나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져서,

"그런 거, 나 안 가지고 있어"하고, 그만 되는 대로 내뱉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서너 명의 친구와 함께 내 곁으로 다가온 짐이,

"나는 점심시간 전에 물감 상자를 똑똑히 확인했어. 하나도 없어지지 않았었다고. 그런데 점심시간이 끝나니까 두 개가 없어졌어. 쉬는 시간에 교실에 있었던 건 너뿐이잖아"하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되받아쳤습니다.

나는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피가 확 몰리며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거기 서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내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으려 했습니다. 나는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내 주머니 속에서는 구슬치기용 구슬과 납 딱지 등과 함께 물감 덩어리 두 개가 그 아이의 손에 쥐어져 나왔습니다. "거봐라"라고 말하는 양 아이들은 밉살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노려보았습니다. 내 몸은 저절로 부르르 떨렸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쉬는 시간을 즐기며 놀고 있는데, 정말이지 나 혼자만 마음속 깊이부터 풀이 죽어버렸습니다. 왜 그런 짓을 해버렸을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끝이야. 그렇게 생각하자 겁 많던 나는 외롭고 슬퍼져서 흑흑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운다고 겁낼 줄 알아!" 공부 잘하는 덩치 큰 아이가 깔보는 듯 미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고, 한 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나를 모두가 달라붙어 억지로 2층으로 끌고 가려 했습니다. 나는 최대한 버텨 보려 했지만, 결국 힘에 밀려 질질 끌려 계단을 올라가고 말았습니다. 그곳에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쉬는 방이 있었습니다.

이윽고 짐이 그 방문을 노크했습니다. 노크란 들어가도 좋으냐고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안에서 다정하게 "들어오렴"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그 방에 들어가는 그때만큼 싫었던 일이 아직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언가 글을 쓰고 있던 선생님은 우르르 들어온 우리를 보고 조금 놀라는 듯했습니다. 여자이면서도 남자처럼 목덜미에서 짤막하게 자른 머리카락을 오른손으로 쓸어 넘기며, 평소처럼 다정한 얼굴로 이쪽을 향해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무슨 일이냐는 기색을 보이셨습니다. 그러자 공부 잘하는 덩치 큰 아이가 앞으로 나서서, 내가 짐의 물감을 훔친 사실을 자세히 선생님께 일러바쳤습니다. 선생님은 약간 어두워진 표정으로 진지하게 모두의 얼굴과 반쯤 울먹이는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내게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사실이었지만, 내가 그런 나쁜 짓을 한 놈이라는 사실을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알게 되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답 대신 정말로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얼마간 나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학생들에게 조용히 "이제 가봐도 좋다"라고 말하며 모두를 돌려보냈습니다. 학생들은 뭔가 조금 부족하다는 듯했지만, 우르르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자기 손톱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이윽고 조용히 일어나 다가와서는 내 어깨를 감싸 안듯 다독이며 "물감은 돌려주었니?"하고 작은 목소리로 물으셨습니다. 나는 돌려준 사실을 선생님이 꼭 알아주시길 바라는 마음에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습니다.

"너는 네가 한 짓이 나쁜 일이었다고 생각하니?"

선생님이 다시 한번 그렇게 조용히 말씀하셨을 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르르 떨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입술을, 깨물어 보고 또 깨물어 봐도 울음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고,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대로 선생님 품에 안긴 채 그냥 죽고만 싶었습니다.

"이제 그만 울거라. 잘 알았으면 됐으니까 울음을 그치자, 응? 다음 시간에는 교실에 들어오지 않아도 좋으니 이 방에 있으렴. 조용히 여기에 있으렴. 내가 교실에서 돌아올 때까지 여기 있으렴, 알겠지?"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긴 의자에 앉히셨습니다. 그때 다시 수업 종이 울리자, 선생님은 책상 위의 책을 집어 들고 나를 한 번 바라보시더니, 2층 창문까지 높게 뻗어 올라온 포도 넝쿨에서 포도 한 송이를 따서 흐느껴 울고 있던 내 무릎 위에 가만히 올려두고는 조용히 방을 나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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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때 시끌벅적 요란스럽던 아이들이 모두 교실로 들어가자, 주변은 갑자기 적막이 감돌 만큼 조용해졌습니다. 나는 외롭고 외로워져서 참을 수 없을 만큼 슬퍼졌습니다. 그토록 좋아하는 선생님을 그렇게 힘들게 했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못된 짓을 한 거구나 싶었습니다. 포도 따위 도저히 먹을 기분이 들지 않아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어깨를 가볍게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습니다. 나는 선생님 방에서 어느샌가 울다가 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조금 마르고 키가 큰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기분이 한결 좋아져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도 잊은 채, 조금 부끄러운 듯 마주 웃으며 무릎 위에서 떨어질 뻔한 포도송이를 황급히 집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곧 슬픈 기억이 떠올라 웃음은커녕 모든 것이 어딘가로 숨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지 않아도 된단다. 벌써 모두 집에 갔으니 너도 가도록 해라. 그리고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학교에 와야 한다. 네 얼굴을 못 보면 선생님은 무척 슬플 거야. 꼭 오는 거다."

그렇게 말하며 선생님은 내 가방 안에 살며시 포도송이를 넣어 주셨습니다. 나는 평소처럼 해안 거리를 통해서, 바다를 바라본다거나 배들을 구경하면서 덧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포도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이 밝자 좀처럼 학교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배가 아프면 좋을 텐데, 머리가 아프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날따라 충치 하나 아프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집을 나섰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꾸물꾸물 걸었습니다. 도무지 교문을 들어설 수는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헤어질 때 선생님이 건넨 말이 생각나자, 선생님의 얼굴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가지 않으면 선생님은 분명 슬퍼하실 거야. 다시 한번 선생님이 다정한 눈으로 나를 봐주시면 좋겠어. 오직 그 한 가지 마음만으로 나는 교문을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요. 가장 먼저, 기다렸다는 듯이 짐이 달려와 내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제의 일 따위는 잊어버린 듯, 친절하게 내 손을 이끌고 당황해하는 나를 선생님의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나는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 싶었습니다. 학교에 가면 다들 멀찍이서 나를 보며 "저기 봐. 도둑질한 일본인 녀석이 왔다"며 수근거릴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대하니 기분이 나빠질 정도였습니다.

두 사람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선생님은 짐이 노크하기도 전에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 둘은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짐, 너는 참 착한 아이구나.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고 있구나. 짐은 이제 너한테 사과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는구나. 두 사람이 이제부터 좋은 친구가 된다면 그걸로 충분해. 자, 둘이서 멋지게 악수하렴." 선생님은 싱글벙글 웃으며 우리를 마주 보게 하셨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짐은 서둘러 늘어뜨려 있던 내 손을 잡아당겨 힘차게 악수해 주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이 기쁨을 표현해야 할지 몰라 그저 부끄럽게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짐 역시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물으셨습니다.

"어제 그 포도는 맛있었니?" 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또 주어야겠구나."

그러고 나서 선생님은 새하얀 리넨 옷을 두른 몸을 창밖으로 내밀어 포도 한 송이를 따서는 새하얀 왼손 위에 하얀 가루가 앉은 보랏빛 포도송이를 올려놓고, 가늘고 긴 은색 가위로 한가운데를 툭하고 잘라, 짐과 나에게 나눠 주셨습니다. 새하얀 손바닥 위에 보랏빛 포도알이 알알이 놓여 있던 그 아름다움을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해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예전보다 조금 더 착한 아이가 되었고, 조금은 덜 부끄러움을 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그 좋은 선생님은 어디로 가셨을까요.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지금도 그 선생님이 계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가을이 오면 언제나 포도송이는 보랏빛으로 물들고 아름답게 하얀 가루가 앉지만, 그 포도를 받쳐 들었던 대리석처럼 희고 아름다운 손은 이제 어디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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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8월)




아리시마 다케오 (有島武郎, 1878~1923)


"인도주의적 고뇌로 시대의 아픔을 껴안았던 개혁적 지식인"

백색파(시라카바파)의 거장: 학습원 출신의 귀족적 배경을 가졌으나, 톨스토이의 인도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아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을 문학의 핵심 가치로 삼았습니다.

자기 희생의 실천가: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소유한 홋카이도의 농장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개방하는 등 삶 자체로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려 노력했습니다.

섬세한 심리의 관찰자: 어린아이의 눈높이에서 본 세상과 여성의 자아 찾기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이고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일본 근대 문학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부끄러움이 사랑으로 승화되는 찰나


"죄책감으로 얼룩진 소년의 무릎 위로 떨어진, 보랏빛 위로 한 송이"

유년의 결정적 순간: 100년 전 요코하마를 배경으로, 선망하던 친구의 물감을 훔친 소년의 심리적 파동을 정밀하게 그려낸 성장 소설입니다.

색채의 미학: 소년이 동경하던 '남빛'과 '옅은 분홍빛' 물감, 그리고 선생님의 '하얀 손' 위에 놓인 '보랏빛 포도'의 대비는 이 작품을 한 편의 아름다운 수채화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용서라는 이름의 교육: 잘못을 꾸짖는 대신 포도 한 송이를 건네며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려주는 선생님의 모습은, 진정한 교육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묵직하게 전달합니다.

성장의 상징: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건을 통해 타인과 화해하고 세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성숙'의 과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일본어 원작을 자막, 한국어 낭독으로 들어 보세요~! <클릭>


[일본근대환상문학]시리즈

01. 하라 다미키, 〈지붕 위에서〉 보러 가기

02. 니이미 난키치,〈빨간 양초〉 보러 가기

03. 오가와 미메이, 〈달밤과 안경〉 보러 가기

04. 하라 다미키, 〈휘파람새〉 보러 가기

05. 니이미 난키치, 〈사탕〉 보러 가기

06. 오가와 미메이, 〈까마귀와 허수아비〉 보러 가기

07. 무로 사이세이, 〈신비로운 물고기〉 보러 가기

08. 나쓰메 소세키, 〈열흘 밤의 꿈-첫날 밤〉 보러 가기

09.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묘한 이야기〉 보러 가기

10. 다자이 오사무, 〈기다림〉 보러 가기


[[동심과 성장] 시리즈

01. 유메노 규사쿠, 〈캐러멜과 눈깔사탕〉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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