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귤' - 오만한 지식인의 성찰

[일본 아동 문학 05]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원작 蜜柑

by YOU EUNKYOUNG

귤 (蜜柑)

원작: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번역: 유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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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겨울날의 해질녘이었다. 나는 요코스카에서 출발하는 상행 2등 객차 구석에 자리를 잡고, 멍하니 출발을 알리는 기적이 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불이 들어온 객차 안에는 드물게도 나 말고는 승객이 아무도 없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어스름한 플랫폼에도 오늘따라 배웅하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고, 오직 우리에 갇힌 강아지 한 마리만이 이따금 슬프게 짖어대고 있을 뿐이었다. 이 모든 풍경이 당시의 내 심경과 신기할 정도로 맞아떨어졌다. 내 머릿속에는 말할 수 없는 피로와 권태 같은 것이, 마치 막 눈이라도 쏟아질 듯한 흐린 하늘처럼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였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저녁 신문을 꺼내 읽어볼 기운조차 없었다.


이윽고 출발을 알리는 기적이 울리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듯해서 뒤쪽 창틀에 머리를 기대고 눈앞의 정거장이 서서히 뒤로 물러나기를 무심코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개찰구 쪽에서 요란한 나막신 소리와 함께 차장이 무언가 꾸짖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내가 탄 2등 객차 문이 드르륵 열렸다. 그러더니 열서너 살쯤 되는 계집아이 하나가 다급히 안으로 들어왔고 그와 동시에 기차가 덜컹 흔들리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씩 시야에서 뒤로 밀리는 플랫폼의 기둥들, 누군가 잊고 간 듯한 물수레, 그리고 차 안의 누군가에게 팁을 받고 인사하고 있는 짐꾼 ― 그런 모든 것들이, 창문을 무섭게 내리치는 매연 속에서 미련을 남기듯 뒤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겨우 안도하며 궐련에 불을 붙이며, 비로소 귀찮은 듯 눈을 들어 앞자리에 앉은 계집아이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기름기 없는 머리는 뒤로 잡아당겨 말아 올리고, 거칠게 터진 두 볼은 소매로 문지른 흔적이 남은 데다가 기분 나쁠 정도로 붉게 상기된, 누가 보아도 촌티가 역력한 계집아이였다. 게다가 때 묻은 연둣빛 털목도리가 늘어져 있는 무릎 위에는 커다란 보자기가 놓여 있었다. 동상 걸린 손은 그 보따리를 감싸 안은 채 3등석 빨간 기차표를 소중한 듯 꽉 쥐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의 천박해 보이는 얼굴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을뿐더러 아이의 차림새가 지저분한 것도 불쾌했다. 무엇보다 2등석과 3등석조차 구분 못 하는 그 우둔함에 화가 났다. 그래서 궐련에 불을 붙인 나는, 먼저 아이의 존재를 잊고 싶은 마음에, 주머니에서 저녁 신문을 꺼내 무심하게 무릎 위에 펼쳐 보았다. 그때 신문 지면을 비추던 바깥 불빛이 갑자기 전등 빛으로 바뀌면서 인쇄 상태가 좋지 않은 무슨 기사인가의 활자가 웬일인지 싶을 만큼 선명하게 내 눈앞으로 떠올랐다. 기차가 지금 터널이 많은 요코스카 선의 첫 번째 터널로 들어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등 빛에 비친 저녁 신문을 훑어봐도 나의 우울함을 달래줄 만한 소식은 없었다. 세상은 너무 평범한 사건들로만 넘쳐났다. 종전강화 문제, 신랑신부, 독직 사건, 부고 ― 나는 터널에 진입한 순간, 기차가 거꾸로 달리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삭막한 기사들을 기계적으로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앞에 앉은 아이가, 마치 비속한 현실을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듯한 얼굴을 하고 내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줄곧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터널 속을 달리는 이 기차와 이 촌구석 계집아이, 그리고 평범한 기사들로 가득한 저녁 신문 ― 이것이 상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불가해하고, 천박하며, 지루한 인생의 상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모든 것이 시시하게 느껴져서 읽다 만 신문을 내팽개치고는 다시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 죽은 듯이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문득 무언가로부터 위협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어 무심결에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샌가 예의 그 아이가 맞은편에서 내 옆자리로 옮겨와 열심히 창문을 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거운 유리창은 생각처럼 열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이의 터진 뺨은 더욱 붉어졌고, 때때로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가 숨을 몰아쉬는 작은 소리와 함께 정신없이 귓가로 파고들었다. 물론 어느 정도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상황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기차가 곧 터널의 출구에 다다를 것이라는 사실은, 땅거미 지는 어둠 속에 마른 풀만이 밝게 빛나는 양옆 산비탈이 창가로 비쳐오기 시작한 것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 계집아이는 굳이 닫아놓은 창문을 열려 한다 ― 그 이유를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것이 나에게는 그저 이 아이의 변덕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음 깊은 곳에 여전히 날 선 감정을 품은 채, 저 동상 걸린 손이 유리창을 들어 올리려 악전고투하는 모습을, 차라리 끝내 열리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엄청난 소리를 내며 기차가 터널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아이가 열려 했던 유리창이 마침내 덜컹하며 밑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그 사각형 구멍을 통해 매연을 녹여낸 듯한 거뭇한 공기가 돌연 숨 막히는 연기가 되어 자욱하게 객차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원래 기관지가 좋지 않았던 나는 손수건을 꺼낼 틈도 없이 이 연기를 정면으로 뒤집어쓴 탓에, 숨도 못 쉴 정도로 콜록거려야 했다. 하지만 아이는 나를 신경 쓰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어둠 속을 가르는 바람에 말아 올린 머리카락을 날리며 기차가 나아가는 방향만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매연과 전등 빛 사이로 그 모습을 보았을 때, 이미 창밖이 점차 밝아져, 흙냄새와 마른 풀 냄새, 물 냄새가 창문을 통해 차갑게 흘러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간신히 기침을 멈춘 나는 이 낯모르는 계집아이를 무작정 혼을 내면서 창문을 다시 닫게 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기차가 터널을 부드럽게 빠져나와 마른 풀로 뒤덮인 산과 산 사이에 자리한 어느 가난한 마을 외곽의 건널목을 지나고 있었다. 건널목 근처에는 허름한 초가집과 기와집들이 비좁게 다닥다닥 늘어서 있었고, 건널목지기가 흔드는 것인지, 오직 깃발 한 폭만이 나른하게 땅거미를 흔들고 있었다. 겨우 터널을 벗어났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저 쓸쓸한 건널목 울타리 너머로 나는, 붉은 볼의 남자아이 셋이 밀고 당기며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은 모두 낮게 깔린 흐린 하늘에 짓눌린 듯 키가 작았다. 그리고 그 마을 외곽의 음산한 풍경과 같은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올려다보며 일제히 손을 드는가 싶더니, 이내 나어린 목을 높이 젖히며 무슨 뜻인지도 모를 함성을 있는 힘껏 뿜어냈다. 그 순간이었다. 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던 예의 그 계집아이가 동상 걸린 손을 쑥 뻗어 힘차게 좌우로 흔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마음이 두근거릴 정도로 따스한 햇살 같은 빛깔로 물든 귤 대여섯 개가, 기차를 배웅하는 아이들 위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계집아이는, 아마도 이제부터 남의 집살이를 하러 떠나는 이 계집아이는,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몇 알의 귤을 창밖으로 던져 일부러 건널목까지 배웅하러 온 동생들의 노력에 답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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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 진 마을 외곽의 건널목과 새끼 새처럼 소리를 지르던 세 아이, 그리고 그 위로 흩뿌려지던 선명한 귤빛 ― 모든 것은 기차 창밖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하지만 내 마음 위에는 애달플 정도로 또렷하게 이 광경이 각인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정체 모를 화사한 마음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반듯이 고개를 들고,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을 보듯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어느새 다시 내 앞자리로 돌아와, 여전히 트고 갈라진 뺨을 연둣빛 목도리에 묻으며 커다란 보따리를 안은 손에 3등석 기차표를 꽉 쥐고 있었다.

나는 이때 비로소 말로 다 할 수 없는 피로와 권태를, 그리고 불가해하고 천박하며 지루하기만 했던 인생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1919년 5월)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번역가의 한 마디>

말로 다 할 수 없는 피로와 권태, 천박하며 지루한 인생을 냉소하며 살아가는 하루하루. 어쩌면 현대인도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그런 우리에게도 가슴을 적시는, 눈물 한 방울 흘러내리는, 가슴 뛰게 하는 감동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촌스럽고 보잘것없지만 순수했던 과거의 어느 순간을 마주하게 하는 어떤 장면. 그게 영화일 수도 있고, 소설일 수도 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비루하던 자신의 마음이 청결한 무언가로 씻겨나가는 느낌이 든다. 카타르시스라는 게 그 일종일지도 모른다. 특히 지식인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이들의 냉소적인 사고 속에서는 순간적인 깨달음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귤’에서는 그런 냉소적인 지식인의 현학적인 허세를 정화하는 감동이 숨어 있다. 짧은 이 단편 속에서 잊고 있던 자신의 순수함의 어느 부분을 찾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芥川龍之介, 1892~1923)


"차가운 지성으로 인간의 심연을 해부하고, 그 끝에서 찰나의 구원을 찾다"

신현실주의의 기수: 나쓰메 소세키의 제자로, 일본 근대 소설의 기틀을 다진 '단편 소설의 귀재'입니다. 냉철한 관찰력과 정교한 구성으로 인간 이면의 이기심과 복잡한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합니다.

불안과 예술지상주의: 평생 광기와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예술은 인생보다 아름답다'는 신념 아래 완벽한 문장을 추구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아쿠타카와상'은 오늘날 일본 최고 권위의 신인 문학상이 되었습니다.

이방인의 시선: 지식인 특유의 허무주의와 냉소적 시선을 가졌지만, 때로는 그 냉소의 터널을 뚫고 나오는 소박한 인간미와 생명력에 깊이 감동하고 이를 작품 속에 눈부시게 박제해 두었습니다.


〈귤〉 — 어두운 터널 끝에서 만난 주황빛 인생의 온기


"지루하고 비루한 일상이라는 터널을 통과할 때, 당신을 구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감각적 대비의 미학: 이 작품은 잿빛 겨울 하늘, 검은 매연, 촌구석 아이의 때 묻은 옷차림 같은 '무채색의 현실'과,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주황색 귤'의 강렬한 색채 대비가 압권입니다. 이 시각적 반전은 화자의 심리적 반전과 정확히 궤를 같이합니다.

오만한 지식인의 성찰: 화자는 2등석에 앉아 3등석 기차표를 든 아이를 멸시하며, 거창한 국제 정세(종전강화 문제)를 읽는 자신과 아이를 분리합니다. 하지만 그 오만함은 아이가 보여준 '담담하고 숭고한 사랑' 앞에서 무참히 무너지고, 비로소 인생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찰나의 구원: 아쿠타카와는 인생을 '불가해하고 지루한 것'으로 정의하면서도, 타인을 향한 순수한 정성과 마음이 닿는 그 찰나가 인간을 얼마나 회복시키는지 보여줍니다. 터널 밖으로 흩뿌려진 귤은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삭막한 세상을 버티게 하는 '살아야 할 이유' 그 자체입니다.




유튜브에서 일본어 원작을 자막, 한국어 낭독으로 들어 보세요~! <클릭>


[일본근대환상문학]시리즈

01. 하라 다미키, 〈지붕 위에서〉 보러 가기

02. 니이미 난키치,〈빨간 양초〉 보러 가기

03. 오가와 미메이, 〈달밤과 안경〉 보러 가기

04. 하라 다미키, 〈휘파람새〉 보러 가기

05. 니이미 난키치, 〈사탕〉 보러 가기

06. 오가와 미메이, 〈까마귀와 허수아비〉 보러 가기

07. 무로 사이세이, 〈신비로운 물고기〉 보러 가기

08. 나쓰메 소세키, 〈열흘 밤의 꿈-첫날 밤〉 보러 가기

09.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묘한 이야기〉 보러 가기

10. 다자이 오사무, 〈기다림〉 보러 가기


[[동심과 성장] 시리즈

01. 유메노 규사쿠, 〈캐러멜과 눈깔사탕〉 보러 가기

02. 아리시마 다케오, 〈한 송이 포도〉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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