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身·心의 사용설명서2부 호흡이 지혜가 되는 문 4화

by 순야 착지

4화: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관(觀)]


지난 3화에서 우리는 내 마음을 CCTV처럼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이 이 단계에서 또 다른 벽에 부딪힙니다. 잡념이나 아픔을 발견하자마자 "이것은 실체가 없으니 빨리 사라져야 해!"라며 억지로 '공(空)'의 논리를 들이대며 밀어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태 지혜의 정수인 가관(假觀)은 다릅니다. 아픔을 지우려 애쓰는 것보다 더 빠르고 따뜻한 길이 있습니다. 바로 그 아픔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늪에서 빠져나오는 법: 발버둥이 아닌 평온

현대 심리학의 수용전념치료(ACT)에서는 우리 마음을 '늪'에 비유합니다. 늪에 빠졌을 때 살기 위해 발버둥 치면 몸은 더 빨리 가라앉습니다. 이때 살 길은 오직 하나, 몸을 넓게 펴서 늪 위에 그대로 눕는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과 아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프면 안 돼, 이건 공(空)이야"라고 부정하며 싸우는 것은 마음의 늪에서 발버둥 치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아, 지금 내 안에 커다란 슬픔이 왔구나"라고 그 존재를 온전히 인정하고 수용할 때, 우리는 비로소 고통의 무게로부터 가벼워집니다.


가관(假觀): 현상을 대접하는 보살의 마음

천태대사가 말한 가관(假觀)은 결코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실체는 없으나 인연에 따라 분명히 나타나 작용하고 있는 '현상적 실재'를 긍정하는 보살의 지혜입니다.

아픈 인연이 왔을 때 그것을 억지로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차가운 도피가 될 수 있습니다. 참된 관(觀)은 "비록 고정된 알맹이는 없으나(空),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찾아온 이 아픔 또한 소중한 생명의 작용(假)"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우는 아이를 억지로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품에 안아 "그래, 많이 힘들었구나"라고 인정해 줄 때 아이의 울음이 자연스럽게 잦아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실전 기술] 고통에게 의자 하나 내어주기

오늘 마음속에 지우고 싶은 불편한 감정이 찾아온다면, 억지로 지우려 애쓰지 말고 다음 단계를 따라 해 보세요.

① 저항 멈추기: "이 감정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저항을 잠시 내려놓습니다. 감정과 싸우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② 이름 불러주기: "지금 내 가슴에 '답답함'이라는 손님이 오셨구나"라고 그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줍니다. 이것이 실상을 바로 보는 가관의 시작입니다.

③ 공간 넓히기: 내 마음을 아주 커다란 방이라고 상상하고, 그 구석에 고통이라는 손님이 앉을 의자를 하나 내어줍니다. 고통과 함께 머물러도 나는 안전하다는 것을 느껴봅니다.

눈을 감을 때 보이는 '원융'의 세계

눈을 감고 가만히 지켜보십시오. 슬픔을 없애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슬픔을 가진 채로도 우리는 평온할 수 있습니다. 슬픔이라는 그림자가 비칠 수 있는 거울(마음)은 본래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고집을 내려놓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육묘법문의 다음 단계인 환(還)정(淨), 즉 근원으로 돌아가 본래의 맑음을 회복하는 여정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천오백 년의 처방전]

오늘의 증상

① "다 비어있다"는 말이 차갑게 느껴지고 위로가 되지 않는다.

② 감정을 억지로 없애려다 오히려 더 큰 심리적 반동을 겪는다.

천태의 진단 키워드

① 가관(假觀): 현상을 부정하지 않고 인연에 따른 실상으로 인정하는 지혜.

② 수용(Acceptance): 고통과 싸우지 않고 공간을 내어줌으로써 고통의 통제력을 약화시킴.

천태의 처방

① 아픔을 '지워야 할 얼룩'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손님'으로 대접한다.

② 억지로 공(空)을 깨치려 애쓰기보다, 지금의 고통과 함께 숨 쉬는 법을 배운다.


생활 적용 1분

불편한 감정이 올라올 때 딱 10초만 해보세요.

① 가슴에 손을 얹고 '그래, 그럴 수 있지'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줍니다.

②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그 감정 주위에 부드러운 공간이 생긴다고 상상합니다.


"거울은 어떤 추한 모습이 비쳐도 거부하지 않으며, 비친 후에도 더러워지지 않는다. 마음도 이와 같아야 한다." — 육묘법문의 관(觀)하는 마음


[참고문헌 및 추천도서]

① 스티븐 헤이즈 저, 문현미·민병배 역, 『마음에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라』(Get Out of Your Mind and Into Your Life), 학지사, 2010.02.25; 수용전념치료(ACT)의 고전으로, 고통을 제거의 대상이 아닌 존재의 일부로 인정함으로써 심리적 유연성을 확보하는 가관(假觀)적 치유법을 제시함.

② 러시 해리스 저, 강대봉 역, 『행복 함정』(The Happiness Trap), 세종서적, 2022.11.10;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고통을 유발함을 지적하며, 불편한 감정과 함께 살아가며 가치 있는 삶으로 나아가는 실천적 기술을 다룸.

③ 페마 초드론 저, 이지연 역,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When Things Fall Apart), 현암사, 2012.11.25; 고통스러운 감정을 밀어내지 않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마주하는 관법을 통해 아픔이 지혜로 전환되는 보살의 수행 과정을 서술함.

④ 욘게이 밍구르 리포체 저, 홍주연 역, 『언제 어디서나 평온에 이르는 법』(The Joy of Living), 담앤북스, 2018.05.20; 공황장애를 앓았던 수행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불안을 '친구'로 삼아 수행의 도구로 전환하는 원리를 뇌과학과 결합해 설명함.

[연재 안내]

<내 몸과 마음의 사용설명서> 제2부 <호흡이 지혜가 되는 문>는 매주 화요일 10시에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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