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화에서 우리는 내 마음을 CCTV처럼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이 이 단계에서 또 다른 벽에 부딪힙니다. 잡념이나 아픔을 발견하자마자 "이것은 실체가 없으니 빨리 사라져야 해!"라며 억지로 '공(空)'의 논리를 들이대며 밀어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태 지혜의 정수인 가관(假觀)은 다릅니다. 아픔을 지우려 애쓰는 것보다 더 빠르고 따뜻한 길이 있습니다. 바로 그 아픔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의 수용전념치료(ACT)에서는 우리 마음을 '늪'에 비유합니다. 늪에 빠졌을 때 살기 위해 발버둥 치면 몸은 더 빨리 가라앉습니다. 이때 살 길은 오직 하나, 몸을 넓게 펴서 늪 위에 그대로 눕는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과 아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프면 안 돼, 이건 공(空)이야"라고 부정하며 싸우는 것은 마음의 늪에서 발버둥 치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아, 지금 내 안에 커다란 슬픔이 왔구나"라고 그 존재를 온전히 인정하고 수용할 때, 우리는 비로소 고통의 무게로부터 가벼워집니다.
천태대사가 말한 가관(假觀)은 결코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실체는 없으나 인연에 따라 분명히 나타나 작용하고 있는 '현상적 실재'를 긍정하는 보살의 지혜입니다.
아픈 인연이 왔을 때 그것을 억지로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차가운 도피가 될 수 있습니다. 참된 관(觀)은 "비록 고정된 알맹이는 없으나(空),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찾아온 이 아픔 또한 소중한 생명의 작용(假)"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우는 아이를 억지로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품에 안아 "그래, 많이 힘들었구나"라고 인정해 줄 때 아이의 울음이 자연스럽게 잦아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실전 기술] 고통에게 의자 하나 내어주기
오늘 마음속에 지우고 싶은 불편한 감정이 찾아온다면, 억지로 지우려 애쓰지 말고 다음 단계를 따라 해 보세요.
① 저항 멈추기: "이 감정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저항을 잠시 내려놓습니다. 감정과 싸우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② 이름 불러주기: "지금 내 가슴에 '답답함'이라는 손님이 오셨구나"라고 그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줍니다. 이것이 실상을 바로 보는 가관의 시작입니다.
③ 공간 넓히기: 내 마음을 아주 커다란 방이라고 상상하고, 그 구석에 고통이라는 손님이 앉을 의자를 하나 내어줍니다. 고통과 함께 머물러도 나는 안전하다는 것을 느껴봅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지켜보십시오. 슬픔을 없애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슬픔을 가진 채로도 우리는 평온할 수 있습니다. 슬픔이라는 그림자가 비칠 수 있는 거울(마음)은 본래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고집을 내려놓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육묘법문의 다음 단계인 환(還)과 정(淨), 즉 근원으로 돌아가 본래의 맑음을 회복하는 여정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증상
① "다 비어있다"는 말이 차갑게 느껴지고 위로가 되지 않는다.
② 감정을 억지로 없애려다 오히려 더 큰 심리적 반동을 겪는다.
천태의 진단 키워드
① 가관(假觀): 현상을 부정하지 않고 인연에 따른 실상으로 인정하는 지혜.
② 수용(Acceptance): 고통과 싸우지 않고 공간을 내어줌으로써 고통의 통제력을 약화시킴.
천태의 처방
① 아픔을 '지워야 할 얼룩'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손님'으로 대접한다.
② 억지로 공(空)을 깨치려 애쓰기보다, 지금의 고통과 함께 숨 쉬는 법을 배운다.
생활 적용 1분
불편한 감정이 올라올 때 딱 10초만 해보세요.
① 가슴에 손을 얹고 '그래, 그럴 수 있지'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줍니다.
②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그 감정 주위에 부드러운 공간이 생긴다고 상상합니다.
"거울은 어떤 추한 모습이 비쳐도 거부하지 않으며, 비친 후에도 더러워지지 않는다. 마음도 이와 같아야 한다." — 육묘법문의 관(觀)하는 마음
① 스티븐 헤이즈 저, 문현미·민병배 역, 『마음에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라』(Get Out of Your Mind and Into Your Life), 학지사, 2010.02.25; 수용전념치료(ACT)의 고전으로, 고통을 제거의 대상이 아닌 존재의 일부로 인정함으로써 심리적 유연성을 확보하는 가관(假觀)적 치유법을 제시함.
② 러시 해리스 저, 강대봉 역, 『행복 함정』(The Happiness Trap), 세종서적, 2022.11.10;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고통을 유발함을 지적하며, 불편한 감정과 함께 살아가며 가치 있는 삶으로 나아가는 실천적 기술을 다룸.
③ 페마 초드론 저, 이지연 역,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When Things Fall Apart), 현암사, 2012.11.25; 고통스러운 감정을 밀어내지 않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마주하는 관법을 통해 아픔이 지혜로 전환되는 보살의 수행 과정을 서술함.
④ 욘게이 밍구르 리포체 저, 홍주연 역, 『언제 어디서나 평온에 이르는 법』(The Joy of Living), 담앤북스, 2018.05.20; 공황장애를 앓았던 수행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불안을 '친구'로 삼아 수행의 도구로 전환하는 원리를 뇌과학과 결합해 설명함.
<내 몸과 마음의 사용설명서> 제2부 <호흡이 지혜가 되는 문>는 매주 화요일 10시에 발행됩니다.
내 身·心의 사용설명서 2부 호흡이 지혜가 되는 문
제3화: 내 마음을 CCTV처럼 지켜보는 법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39
내 身·心의 사용설명서 2부 호흡이 지혜가 되는 문
제2화: 뇌를 속여서라도 멈춰야 할 때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38
내 身·心의 사용설명서 2부 호흡이 지혜가 되는 문
제1화: 생각의 스위치를 강제로 끄는 기술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36
내 身·心의 사용설명서 2부 호흡이 지혜가 되는 문
[2부 PROLOGUE] 왜 숨을 쉬는데도 여전히 불안할까요?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35
내 몸과 마음의 사용설명서 [1부 숨, 생명의 스위치를 켜다]
[1부 에필로그] 이제, 마음의 바다로 나갈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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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과 마음의 사용설명서 [1부 숨, 생명의 스위치를 켜다]
[6화] 心身 사용설명서의 3 조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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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과 마음의 사용설명서 [1부 숨, 생명의 스위치를 켜다]
[5화] 아픈 곳으로 숨 쏘아 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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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과 마음의 사용설명서 [1부 숨, 생명의 스위치를 켜다]
[4화] 머리의 열을 발바닥으로 끄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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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과 마음의 사용설명서 [1부 숨, 생명의 스위치를 켜다]
[3화] 숨의 꼬리를 잡고 따라가기(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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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과 마음의 사용설명서 [1부 숨, 생명의 스위치를 켜다]
[2화] 머릿속 소음을 끄는 숫자 세기(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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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과 마음의 사용설명서 [1부 숨, 생명의 스위치를 켜다]
[1화] 입을 다물라, 그래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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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과 마음의 사용설명서 [1부 prologue]
숨, 생명의 스위치를 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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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과 마음의 사용설명서 [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