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야구하는 여자들
2회말 - #어떤 여자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가녀린 주장님은 어마어마한 소프트볼 선수출신이자, 국가대표였다. 가녀림은 무슨 근육이 장난 아니다. 팔뚝을 만져보면 딱딱하고, 얇다뿐이지 등 근육은 만져보고 싶은 남자의 등판 그것이었다. 그런 정체를 숨긴 채 직장에서는 가녀린 사무직 직원으로 샤방샤방한 미소를 띄우며 일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실력 좋은 그녀가 사무직으로만 일한다니 아쉽다.
야구는, 아니 여자야구는 프로 선수가 없다. 프로여자야구 리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한국여자야구에서 선수출신은 누구일까? 엘리트 체육으로 소프트볼을 최소 중학교, 빠르면 초등학교 때부터 경험한 사람을 선수출신 선수라고 한다. 물론 해외에 서 여자프로야구를 경험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선수출신이겠지만, 그런 선수는 거의 없기 때문에 한국여자야구는 소프트볼 출신 선수들을 줄여서 ‘선출’이라고 부른다.
애석하게도 이 부분은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아마추어리그 기록을 모으고 있는 사이트에서도 대부분의 소프트볼 선수가 ‘비선출’로 명기 되어있다.(야구 선수가 아니긴 하니 맞긴하다.) 여자야구의 경우에는 경기력 차이가 워낙 크기 때문에 체육선수 출신도 별도로 명기해서 리그를 세부적으로 분리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지금 처럼 운영하고 있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가녀린 주장님외에도 우리팀의 체육선수 출신들은 전공했던 종목 관련 일을 하지 않았다. 주로는 부상인 경우가 많았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해당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는 오를 수 없는 애매한 상태, 재활을 하더라도 예전의 본인의 100%를 하지 못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자신에게 갑갑함을 느껴 원래하던 종목을 버리고 다른 종목을 취미로 하게된다. 또는 정말 스포츠 계열의 문화에 질려버린 경우도 있고.
관록이 느껴지는 감독님은 무슨 스포츠인지는 몰라도, 프로를 경험한 것 같다. 관록이 넘치는 매서운 눈매, 엄청난 근육을 자랑하는 등판. 실로 카리스마가 넘치는 여성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녀린 주장님과는 다르게 등 뒤만 보면 멋진 남자 트레이너 같다. 약간 벌크업도 되어있고, 접영하면 간지가 넘칠 것 같다. 저렇게 몸이 좋으신 분이 그냥 사무직을 하실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와중에 만나면 “나이는?”. “뭐하는 사람인데?” 를 묻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사고패턴으로 빠져들고 만다. 사업 할려고 골프하는 것도 아니고, 야구를 같이 하는데 직업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예전에 호주에서 나를 팀에 넣어준 사람들은 나의 이름은 무엇인지, 야구는 얼마나 했는지만 물어봤다. ‘야구를 하는 어떤 사람’이면 되지, 비자도 직업도 나이도 상관없었다. 내가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들어온 오렌지를 따는 외국인이건, 동네 시의회 회장이건 간에 공을 잡는 순간 우리는 같은 사람이었다. 그 나라 사람들에게 받은 인종차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운동장에서는 아니었다. 운동 시작하기 전부터 괜시리 직업과 나이를 생각하는 스스로가 부끄럽다.
몸풀기가 끝나고 둥글게 모여서는 짧게 이름, 나이로 자기 소개를 하는데 연령대가 다양했다. 18세 고등학생부터 20대 대학생, 30대 직장인 40대 주부 언니들까지! 가입한지 한참이나 지나서 알게 모르게 그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상상하던 것과는 달랐다. 학생이라면 체육학과 일 것 같았고, 일하는 사람들이면 체육관련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내 눈에는 그들의 건강함이 너무나 비상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도 있었는데, 남다른 체력을 자랑하던 이들이 많았다. 체육학과를 준비하거나, 체육 관련 학교를 다니는 경우도 있었지만 인문계, 이공계 학생들도 있었다. 직장인은 사무직도 있지만, 경찰관, 헬스코치, 수영강사, 회계사, 디자이너, 재무팀, 프로젝트매니저, 프로그래머, 컨설턴트도 있었다. 가장 희귀했던 직업이라면 오히려 “주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부였던 언니들에게 있었지만, 주말 이틀을 야구로 뺀다는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평일에는 늘 집에 있으니 너무 갑갑해서 주말에는 나오고 싶은데 야구로 주말 이틀을 나와버리고 나면 남편이 알게모르게 삐져 있다고 한다. 평일에 일했으니 주말에는 쉬고 싶은데, 애를 보면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평일 내내 애를 보느라 지친 그녀의 주말은 누가 챙겨주는 것일까? 주말에야 말로 아이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때일텐데, 그런 모습을 보면 메리지블루라는 것을 뼈저리가 간접 경험하게 된다. 늘상 겨우 연습만 짧게 참여하고, 팀원들이 다같이 밥먹을 때 그녀는 남편과 아이의 밥을 챙기러 이동했다. 굶은 채로 1-2시간은 가야 할텐데, 그 강인함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일은 힘들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고, 집에 갇혀 아이와 지내는건 정신적으로 무너진다. 내가 한다고 생각만해도 갑갑하다. 청소, 빨래, 애 밥주고, 치우고 나면 하루가 다 가있는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그 시간들을 최소 1년-3년은 보내야한다. 물론 그러지 않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행 가서 남의 집을 숙소로 쓰는 것도 불편한데 여리고 약한 나의 아이를 남에게 맡기는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중 한 언니는 평일에는 애를 보느라 꼼짝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주말에는 나와서 야구를 하고 싶어했다. 남편 분은 같이 체육을 한 사람이라, 집에 있을 언니가 얼마나 갑갑한지를 이해를 해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일이 바빠지거나 하면 언니는 남편의 눈치를 봐서 연습을 하다말고 일찍 가곤 했다. 언니는 엄마이기 이전에, 작지만 날렵하고 센스넘치는 수비수이자 타자였다. 나로서는 언니가 애만 보고 하루 종일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 언니가 어느 날 남편이 너무 힘들어한다며 팀 연습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야구는 작은 공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날아 다닌다. 아이들이 조금 더 큰다 하더라도 경기장에 데려오기는 쉽지 않다.
저마다 바쁘고, 사연이 있는 평범한 여자들이었다. 길가에서 마주치는 여성들과는 조금 다르지만 엄청나게 특이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헬스장에서 운동 하다 보면 ‘저 언니 몸이 좋네’. ‘열심히 하네’ 싶은 사람들이다. 1-2시간 러닝은 거뜬하고, 스쿼트는 매일같이 취미로 하는 정도가 다르긴하다.
많이 다른게 있다면, 시간이 날 때 공중에 볼을 던져 볼 컨트롤을 연습하고, 저녁에는 야구 중계를 보거나 하이라이트를 챙겨서 본다. 자신의 포지션 선수가 어떤 동작을 하는지, 어떤 포메이션으로 상대 선수를 공략 했는 지, 어떤 공을 던지고 치는 지를 연구한다. 그리고 주말에는 이미지 트레이닝한 그 동작으로 연습을 한다. 본인들은 그게 대단한 일인지 잘 모른다. 원래 그렇게 연습 하는게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겠지만, 나로서는 이정도는 해야 취미로 제대로 빠져서하는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이 여자들이 특별히 짧은 머리에, 어깨가 남자보다 넓고 트라이애슬론 할 것 같은 기이한 여자들- 이면 좋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어떤 여자는 머리가 허리보다 길게 내려오고, 툭치면 쓰러질 것 같은 여자도 있다. 하얗고 뽀얗고 동글동글한데 유연하게 야구하는 여자도 있다. 웨이브 펌이 멋들어지게 들어간 분위기 있는 언니도 있다. 피부가 까만 사람도 있지만, 자외선 차단제의 힘으로 하얀 사람도 있다. 그렇다. 이 여자들 어떤 여자들이냐면, 그냥 야구 좋아하는 여자들이다.
1회 야구를 하고 싶습니다
1회 초 - #왜 하게 되었나
2회 야구하는 여자들
3회 소금 먹고 운동하기
4회 드디어 (동네) 리그를 뜁니다
5회 첫 안타 치던 날
6회 전국대회 벤치 입문
7회 여자야구 국가대표
8회 운동장에 엠뷸런스 오던 날
9회 우승하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