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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입문 Dec 27. 2019

[12] 6회말 - #기세는 벤치가 가져옵니다

. #여자야구 #야구입문

#기세는 벤치가 가져옵니

        착 가라 앉은건 잔디가 아니라 우리 팀 분위기다. 모든 선수들이 벤치에 모여있는데 개미 소리 하나 안난다. 지고 있다는게 실감이 난다. 주변 공기를 무겁게 누른다. 앞으로 한 회. 점수가 날 것 같지 않다. 데워진 공기가 슬슬 짜증스럽기 시작한다. 갑갑하다.




        그 묵직한 침묵을 깬 건 내 페트병이었다. 갑갑한 마음에 빈 생수병을 팡팡치며 응원하기 시작했다. 제발쳐라! 3번 타자.

       “3번 타자- 날려버려!!”

        머쓱함이 밀려온다. 내 외침 뒤에 민망한 침묵이 기다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

        “3번 타자- 오 좌완 안-타 오 좌완!”

        가장 먼저 받아준건 큰 언니였다. 벤치에서 연달아 두명이 큰소리를 내자, 막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로 벤치 삼자매의 우렁찬 응원이 시작된다.  프로 야구가 아닌 우리의 야구에서는 우리 3명의 목소리 만으로도 운동장은 우리팀으로 도배가 되었다. 흥이나기 시작하자 노래까지 부른다. 벤치 안에서는 작은 변화가 시작됐다. 자연스럽게 옆에서 큰 소리가 나고 있으니 자잘한 ‘궁시렁’ 소리들이 묻히기 시작했다.다른 모든 멤버들의 집중력도 올라가기 시작한다. 벤치를 누르던 묵직하고 싸늘한 분위기가 사르르 녹기 시작한다.

        “좌완 언니 화이팅!!”
        

        “냅다 날려버려!”

        야구장에서 ‘힘들다’의 경중을 따지기는 어렵다. 땡볕에 두꺼운 보호장구를 다 입고, 쪼그려 앉아있는 포수의 고충은 남들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기피하는 사람이 많은 보직인 만큼 소중하기도 하다. 그런 보직인 주장님이 가세했다.
 
        “굿 아이!!! 볼 잘 고른다!! 오좌안 화이팅!”

묘한 부채의식이 생긴다. 팀원들 머리 속에 ‘나는 힘들어서 쉬고 있을래.’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포수’가 옆에서 사력을 다해 응원하고 있다. ‘지금 내가 힘들어서 쉬는데, 나보다 더 힘들 포수가 저렇게 사력을 다해서 응원한다니’ 그 다음에 드는 생각은 하나 밖에 없어진다. 어쩔 수가 없다.

“안타를 날-려-줘-요-! 3-번. 오.좌.완!”

스타팅 멤버들도 가세하기 시작했다. 막상 경기 할 때 힘 빠질까 싶어 응원도 자제하던 그녀들이었다. 자제고 뭐고, 재밌는게 중요하지. 빈 페트병으로 만들어진 응원봉은 나의 전매 상품이 되었다. 소리가 구장을 떠날 듯이 크게 들린다. 손이 얼얼해진다.


임시 응원 팡팡이. 꽤 효과 좋다


        어차피 이렇게 우울하게 집에 갈 순 없잖아? 흥이라도 만끽하고 가자. 질 땐 지더라도 신나게 잔디 밟고 가자. 전광판에 우리 이름이 떠 있다. 이 순간, 이 구장은 우리의 이름이 들어간 작은 축제의 장인 것 같다.

        그 때 였다.

        ‘카-앙!’ 하고  쨍한 쇳소리가 들린다. 알루미늄 배트의 청명하고 경쾌한 울림. 타자가 치고 나갔다! 그렇게 기다리던 안타.

“꺄아아아 안타! 오좌완! 오좌완! 오좌완!”
“꺄악 언니! 달려 달려!!”

        여기가 올림픽 경기장인지, 이천인지 구분이 안간다. 아이돌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꺄악-‘소리 덕분이다. 손을 얼얼하고 귀도 멍멍하니 콘서트장 같기도 하다. 한번 분위기를 타니 쉴 새가 없다. 다음 4번 타자의 우익수를 넘기는 깊은 안타. 3번 타자가 질주해서 홈으로 돌아왔다..목말랐던 첫 득점을 맛봤다. 이제 시작이다. 이어서 5번, 6번 타자도 2루타를 쳐내면서 순식간에 4대 2.

        입가에 보조개가 걸려있다. 이상하다. 왠지 이번 3회는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이번 회는 이상하게 우리가 아웃 카운트 하나 잡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묘한 자신감이다. 오는 공마다 다 칠 것 같고, 치면 다 넘길 것 같다.

        이게 기세라는 것일까? 야구는 '정신력' 싸움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때는 흘려 들었는데 몸으로 기세를 느껴보니까 다르다. 이길 것 같은 기분으로 올라가면 이긴다. 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진다. 억지로 기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최선을 다한 결과물을 내놓을 때는 후회가 없기 때문이다.

        관객석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정신력 싸움이 대회 때는 피부로 느껴진다. 이런 긴장감은 리그 경기에서도 느끼지 못했다. 아까의 묘한 자신감이 서서히 현실이 되기 시작한다. 타순이 빙글빙글 돌았다. 7번 타자 마저 의외의 3루타를 치면서 4대 3. 상대팀의 턱 밑까지 쫓아왔다.

        그야말로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앤드리스 3회’다. 상대편 감독이 투수교체를 요구한다. 어째 동작이 크다. 심판에게 뭐라 이야기를 하는데, 그냥 투수 교체를 요구하는게 아닌 것 같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이건 아니잖아 심판 어필.



        심판님이 뚜벅뚜벅 우리팀 감독님을 향해 걸어온다.  다가와서 감독님에게 일갈.

        “감독님. 저 쪽에서 너무 시끄럽데요. 그 뭔지 모르겠는데 시끄러운 팡팡이는 치지 말아달라고 하는데요?”

    감독님은 짐짓 모른 채 하며 말한다.

        “아니 이 구장에서 3명이 응원하는게 뭐가 그렇게 시끄러워서? 안 들리게 본인들도 응원하라고 하세요.”

        보아하니 그도 본격적으로 말릴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아 그래도 말은 해야해서...” 하면서 어깨를 들썩이더니 돌아선다.

        그야 그렇지, 야유나 인신공격이 아닌 이상 프로에서도 하는 응원을 막을 이유가 없다. 감독님은 뒤돌아서서 작게 ‘작전지시’를 보냈다.

        “그냥 해. 잘하고 있어.”

        우리 벤치 삼 자매를 향한 응원이다. 잠깐의 의아함과 침묵 때문에 기세를 놓칠 새라 다시 페트병을 마구 친다. 음정 이탈한 노래가 구장에 울려 퍼진다. 찌그러진 생수통이 우르릉쾅쾅 울린다.

        보라, 이것이 프로야구 관람을 수없이 한 프로 ‘야구 관람러’의 실력이다. 나만 프로는 아니다. 야구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야구를 오랫동안 봐왔다. 각자 응원하는 프로 구단에서 좋아하는 응원법을 부른다. 10구단의 응원단이 합쳐지지 우리팀의 응원 레파토리도 점점 다양해진다. 응원은 부싯돌처럼 우리팀의 기세에 불을 붙였다. 그 불이 이 경기를 활활 불태우기 시작했다.    

        “언니 기록이랑 사진은 제가 할께요..” 막내는 배트를 재빠르게 갖다 놓으며 말한다.
           
        “다른 정리는 신경쓰지말고 여기 앉아있어.” 큰 언니가 말한다.

        오늘로 나는 전문 응원담당으로 승격된 것 같다. 내가 공이라도 친 것 마냥 신이 난다. 그 날의 체력과 기술 만이 승부에 영향을 주는게 아니다. 이 놈의 ‘분위기’가 우리 오늘의 경기를 뒤집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 언니이이이!!!”  막내가 달려 나간다. 또 점수를 냈다. 덕아웃은 점수를 따고 온 타자들을 위해 일제히 나가서 같이 손뼉을 마주친다. 이 하이파이브는 싸우고 살아 돌아온 전우를 위한 의식같은 것이다.

        생각해보면 축구나 다른 구기 종목들은 공으로 적장의 집을 공격하면 점수를 준다.  야구는 멀리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그제서야 1점을 준다. 타자는 싸우기 위해 준비하고, 투수의 공을 치고나서 멀리 나갔다가, 다른 타자의 도음으로 ‘홈’을 밟고, 집인 벤치로 들어온다. 그렇게 살아돌아온 이들에게 이정도 의식은 필요하다..

        역전했다. 4대 6. 우리는 0점에서 한번에 6점을 몰아치며, 역전에 성공했다.아픈 목을 가다듬고 이온음료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배트 한번 안잡았는데 손이 얼얼하다.공을 치고나면 배트의 진동으로 치고나서도 손에 짜릿한 감각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오늘 배트에 공하나 대지 않았는데, 홈런이라도 하나 친 것 마냥 손이 아픈 것이다.

        “지금 시간이 몇 시야?” 막내가 재빨리 체크.
        “이번 이닝이 마지막이에요.”

        우리의 야구는 애석하게도 제한 시간이 있다. 원래 야구는 시간 제한이 없어서 재미있는데, 아마추어인 우리에겐 거기까진 해주지 못한다. 예전엔 이런 전국대회도 없었는데, 너무 욕심이 과한가. 아니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다. 여자 야구단이 하나씩 생겨서, 리그가 생기고, 전국대회가 생겨난다.

        “오늘 국대가 마무리하자.” 국대언니가 묵묵히 준비한다.     

        마무리 투수로 들어간 국가대표 출신 언니가 마운드 위에 섰다. 오승환 저리가라는 실력의 돌직구를 날린다. 타자는 공에 손도 못대고 허공에 방망이를 돌린다. 찰떡을 매치는 듯, 글러브에 공이 꽂힌다. 이 경기를 지킬 수 있을까? 긴장감도 잠시, 연속으로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꽂아 넣은 언니는 당당히 승리를 확정짓고 두 팔을 들어올렸다.

        4대 6 우리의 승리였다. 신난 나머지 잠시 정렬을 잊고, 서로를 얼싸 안는다. 심판 분들이 우리를 부르자 그재서야 잔디를 향해 달려간다. 상대팀에게 경례를 하는데 흥분이 가라 앉지를 않는다. 손이 얼얼해서 그런가.

        양쪽으로 일렬로 선 다음 경례. 우리팀과 오랜 시간동안 함께 해준 상대팀에 대한 예를 다한다. 서로에 대한 격려의 마음을 담아 악수하고 손뼉을 마주 치면서 서로를 보낸다. 팀의 일원으로 벤치 멤버도 모두 나와 상대팀과 마무리 인사를 한다.

경기가 끝나면 악수하며 마무리한다


       누군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악수하던 와중에 누군가 내 손에 힘을 꽉 준다. 정신이 번뜩 들어 고개를 들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상대팀 이 언니. 악력이 장난이 아니다. 차 문에 손이 끼인 것 같다.  

        “저기요. 진짜 응원 거슬렸어요...뭐 보기는 좋더라구요.”

        “아.. 죄송... 아니  감사합니다.”

        화를 내시는 건지, 칭찬해주시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끝이 ‘좋다’여서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제서야 상대편 언니의 악력으로 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오늘은 손이 남아나질 않는다. 경기를 끝내고 우리는 다시 마운드에 둥글게 모였다.

        “오늘 진짜 수고 많았다. 다들 반성할 부분도 많고, 고민할 부분도 많았어. 그래도 오늘 꼭 박수를 받아야할 멤버가 있다.”

        감독님은 나와, 막내와, 큰 언니를 가르켰다.

        “아픈데도 와줬어. 본인이 못 나가는거 뻔히 알면서도- 응원도 목이 터져라 해줬어. 쉽지 않은거 다들 알지?”

        다들  알고있기를, 기억해주기를.

        야구 기록은 경기에 나와 활약을 한 사람을 남긴다.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는가. 기록에 남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걸까? 그건 누군가의 기억이다. 비록 우리가 기록에 남진 않아도, 내 머리 속에서는 그 날 물을 가져온 사람. 쿨 파스를 나른 사람. 허리가 아파도 같이 응원했던 사람을 영웅처럼 기억할 것이다. 오늘의 기세를 가져온 건 의외로 우리 ‘나머지’의 반란 이었기에. 화려한 전국대회 벤치입문이었다.

        “막내야. 이거 내가 들고 갈게-“

        경기 초반에 속을 들들 복았던 문제적 여성, 유격이가 지나간다. 커다란 볼가방을 들고서 말이다. 경기가 끝날 즈음엔 들끓어 올랐던 화도 어느 샌가 사라졌다. 팡팡이는 내 안의 분노도, 다른 선수둘의 분노도 날려 버렸다.

        사회에서는 가볍게 거리감을 둔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프지 않도록. 그래서 누군가 나를 실망하게 하더라도 덜아프게 말이다. 야구에서는 그 거리감을 잠시 잊게 된다. 그래서 서로에게 실망하면 화가 나기도 한다. 질투하기도 한다. 이 부대낌이 힘들 때가 있다. 이상하게 야구를 하다보면 이 거리감을 잊게 된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인데 때때로 가까운 형제 같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크게 싸우기도 한다. 싸울 수 있기에 오히려 가까워지기도 한다. 사람과의 질척임이 야구의 매력이다.







1회         야구를 하고 싶습니다
              1회 초 - #왜 하게 되었나

              1회 말 - #어떻게 하게 되었나


2회          야구하는 여자들

              2회 초 - #첫 연습 가는 길

              2회 말 - #어떤 여자들


3회          소금 먹고 운동하기

              3회 초 - #식염포도당님 영접

              3회 말 - #냉탕과 온탕


4회          드디어 (동네) 리그를 뜁니다

              4회 초 - #얼마면 돼?

              4회 말 - #선물하시게요


5회          첫 안타 치던 날

               5회 초 - #패배감

               5회 말 - #첫 안타


6회          전국대회 벤치 입문

                6회 초 - #벤치도 공사가 다 망합니다

                6회 말 - #기세는 벤치가 가져옵니다


7회          여자야구 국가대표

               7회 초 - #국가대표의 대가

               7회 말 - #그 많던 언니들은 어디로 갔을까


8회          운동장에 엠뷸런스 오던 날

               8회 초 - #운동장에 구급차 오던 날

               8회 말 - #솜사탕 같은 뜬 공


9회          우승하던 날

               9회 초 - #금메달

               9회 말 - #모자를 던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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