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첫 안타 치던 날
5회말 - #첫 안타 치던 날
무안타가 이어졌다. 주자 대신 루에 나가거나, 선구안을 통해 포볼로 1루에 나가기는 했지만 좀 처럼 볼이 내 배트에 맞지 않았다. 연습 타격장에 비해서 훨씬 느린 볼인데 왜 맞지 않는걸까? 연습에서는 곧잘 휘둘러서 꽤 멀리까지 나가는데 대체 왜 안맞는것인지, 언니들도 꽤나 의아해했다.
이유는 알고보니 의외로 단순한 것이었다. 공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말 그대로 내 시력이 나쁜 것이 한 몫하고 있었다. 자세나 피지컬도 썩 좋진 않았지만 의외로 간과하고 있던 시력이 중대한 문제가 됐다. 내 눈은 좀 얄밉게 나쁘다. 안보여서 안끼면 안될정도는 아닌데, 평소에 늘상 쓰고 있어야 할만큼 나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첫 시즌에는 두려워서 안경을 끼고, 운동장을 들어가지 못했다. 안경을 끼면, 그 상태로 공에 맞을 것 같아서였다. 일상생활을 하는데 큰 문제가 없어서 일할때 아니면 안경을 잘 끼지 않는다. 헬스장에서도 안경알에 김차는게 싫어서 왠만하면 안끼고 했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건 캐치볼을 하면서 였다. 공이 빨라지니까 미묘하게 맞거나 아니면 피했다. 뭔가 갑갑하긴 했지만 연습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어서 열심히 연습에 참여했다.
언니들이 내가 평소에 안경을 낀다는 걸 알게된건 내가 야구 기록을 배우면서 부터였다. 운동장에서 몸풀러 가던 언니들이 기록지를 챙기는 나를 놓고 물어본다. 나랑 자주 캐치볼을 하던 2루수 언니가 물었다. “너 원래 안경 껴?”, “네”, “왜 야구할 때 안껴?”, “김 차고 불편해서요. 게다가 맞으면 대참사나니까...” 언니가 묵묵히 쳐다만 본다. “어이. 속는 셈치고 한번 끼고 들어와봐.” 사실 이전에는 공에 익숙해지기 급급해서 끼고 들어가면 무조건 맞을 것이라는 환상아닌 환상이 있었다.
이젠 꽤 신입 티도 많이 벗어서, 내 뒤로도 꽤 신입이 한 두명 들어온 상태였다. 그냥 공을 맞을정도로 어설프지는 않은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가? 안경을 끼면 마냥 불편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되려 왠지 공도 잘보이고, 잘 잡히고, 잘 쳐진다. “역시...진작에 끼웠어야했네. 아님 렌즈나.” 잘 쳐진다고해서 홈런 마냥 공이 신박하게 날라가는 것은 아니었다. 토스 볼이 배트에 맞는 소리가 맑고, 경쾌해졌다. 그리고 공이 확실히 쭉쭉 뻗어서 망에 맞았다.
예전에 했던 헬스나, 수영이나 굳이 안경이 필요한 종목이 아니었다. 헬스는 내 몸 근육에만 집중하면 되지 디테일하게 맞추거나 할 일이 없다. 수영은 수경을 끼고 보긴하지만 내가 삐둘게 가는지, 나를 향해 돌진하는 물체는 없는지만 볼 수 있으면 된다. 게다가 물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보지 않아도 민감한 사람은 물의 흐름에서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력의 의존도가 생각보다는 적다
하지만 야구는 다르다. 먼 외야로 날아오는 공을 타자가 친 그 순간을 봐야한다. 공이 뜨자마자 어떤 각도로, 어떤 속도로 오는지를 보고 판단해야한다. 가장 높은 곳에 떠 있는 공이 하강하는 궤적을 끝까지 따라가고, 내 글러브 속까지 들어오는 걸 확인해야 한다. 타석에서는 찰나의 순간에 공과 내 배트와 부딪히는 포인트 -임팩트 포인트-를 맞춰내야한다. 맞춘 뒤에는 공이 어디로 어떻게 날라가는지를 보면서 1루를 갈지, 2루를 갈지를 생각해야한다. 주자인 상태에서도 늘 공을 확인한다. 모든 플레이들이 짧은 찰나지만 좋은 시력이 있어야 정확도가 올라가는 일이다. 이 팀에서 안경을 안 낀 언니들 중에 눈이 나쁜 언니는 없다. 본인이 눈이 좀 안 좋다 싶으면 애초에 그냥 안경을 끼고 있다.
사실 스포츠 안경 (**스포츠안경 : 기아의 양현종, 테니스의 정현을 떠올리면 된다. 안경테 부분이 부드럽고 가벼운 고무소재로 되어있고, 안경렌즈에 자외선차단, 방탄 재질로 되어있다. 깨질 때도 안전하게 부숴지는 재질이라고 한다. 투수는 야구 규정상 눈이 보이는 소재로만 렌즈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눈이 보이는 색이나 투명으로 렌즈를 한다. 본인의 포지션에 따라 자외선 차단여부 및 도수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 ) 이 아니면 위험하긴 한데, 언니들은 내가 공이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지금끼고 있는 일반 안경으로도 크게 무리한 동작만 하지 않는다면 문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래 여튼 나는 아이템을 장착했다. 이번 경기는 느낌도 좋았다. 생일이기도 했다. 배팅장갑도 잘 맞고, 안경도 뒤에 고정 장치를 해서 딱 상태가 좋다. 지난 경기 때는 몰랐던 ‘루틴’도 하나 만들었다. 멀리로 치는 듯한 흔들거리는 동작. 왠지 멀리 나갈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게다가 이번 상대팀. 져서는 안되는 상대라고 들었다. (달리 져도 되는 상대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내 타석의 승리요건을 심리적으로 하나씩 쌓고 있었다. 오늘 벤치 분위기 마저 좋고, 팀 장비가 깔끔하게 정리되어있고, 완벽하게 보호대를 차고 있고, 모든 것이 괜찮은 것 같은 이 기분과 자신감.
타석에서도 왠지 여유로웠다. 투수가 지나치게 시간을 끄는 것이 보였다. 이제 제법 선수들이 하던 경기를 구경해서 그런지 한 번 정도는 나가도 되겠다 싶어서 배트박스 밖을 나가서 운동화를 툭툭 털었다. 멀리서 언니들이 까르르 웃는다. 제법 여유롭다면서. (웃지 말고 도와주자. 팀 언니들아)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투수의 공이 유달리 느리게 보였다. 아니, 정확하게 보였다. 평소에 연습하는 토스 공처럼, 지하철 역 앞의 배팅센터 공처럼 왠지 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냅다 휘둘렀다! 공이 “캉-!” 하고 유격수를 살짝 넘어서 떨어졌다. ‘허, 진짜 맞았다?’ 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배트를 오른쪽으로 팽 던지고 달려나간다. 내 발은 왜 이렇게 느린걸까? 가는 길이 천리길 만리길이다. 1루에 겨우 도착했다. 주자로 한 바퀴를 돌아 홈을 밟고 결국 벤치에 들어갔다. 하이파이브를 신나게 하고는 언니들이 궁시렁거림이 시작됐다. 자기들이라면 2루는 너끈 했을거라는 둥, 걷는지 뛰는 질 모르겠다는 둥이다. 요는 잘쳤다는 말이다. 퉁명스러운 칭찬을 들으며 쑥쓰럽게 알겠다구를 연발하며 웃으며 답했다. 여튼 0안타 0득점 0타점을 하던내가 처음으로 1타점을 내고 1득점을 했다.
드디어 잠깐 이 자리에 앉을만한 이유를 찾을 것 같아서 기뻤다. 경기에 스타팅 멤버가 아니더라도, 수비수 한 자리를 꿰차지는 못하더라도, 가끔 나가서 한 방씩 칠 수 있는 타자가 되어 이 경기의 승리에 한조각을 채울 수 있었다는 기쁨이 컸다. 벤치에서 하던 역할들도 의미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이 팀에게 ‘도움’이 되었을 보여주는 수치를 획득했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기록된 기쁨이 이렇게 뿌듯하다니, 기록물이라는 것이 이런 힘이 있다. 감사장이나, 감사패를 이래서 만드나 싶기도하다. 그 종이 하나로 내가 누군가에게 1타점이었음을, 그 누군가도 나에게 1타점이었음을 기억하게 된다.
1회 야구를 하고 싶습니다
1회 초 - #왜 하게 되었나
2회 야구하는 여자들
3회 소금 먹고 운동하기
4회 드디어 (동네) 리그를 뜁니다
5회 첫 안타 치던 날
6회 전국대회 벤치 입문
7회 여자야구 국가대표
8회 운동장에 엠뷸런스 오던 날
9회 우승하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