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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입문 Nov 17. 2019

[09] 5회초 - #패배감

5. 첫 안타 치던 날

5회초 - #패배감


           좌절과는 다른 느낌이다. 이번주도 왠지 모를 패배감을 적립하고 있었다. 금요일이 다가오자 ‘이번주에 나가도 또 벤치에만 앉아서 물 갖다 주다 하루가 끝나겠지’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오른다.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어쩐지 민망하다. 남들에게 들키기 전에 얼른 호떡 반죽처럼  둥글게 뭉쳐서 철퍽 하고 철판에 던진다. 쎈 불에 바싹 구워내어 언제 그랬냐는 듯, 빈 철판 인냥 행세한다 호떡 한장짜리 스트레스가 커피가게 스탬프 마냥 한 장씩 적립된다. 10장 채우면 뭐주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쌓아두나 모르겠다. 


            두가지 마음이 교차한다. 실력이 부족하니 당연히 기다려야한다. 아주 바람직하고도 이상적인 마음이다. 무림고수가 되기 전에 오랜 훈련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여러 이야기에서 익히 들어봤다. 때문에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손오공도 무천도사의 훈련을 참아냈다. 무림의 고수는 폭포수 아래에서 때를 기다렸다. 그 때가 언젠가 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지금이 아니라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이해하고 있다.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냉철하게 생각하면 물을 가져오거나, 장비를 정리한다는 것이 중요한 역할이라는 윗 분들의 설명에 반론의 여지는 없다. 문제는 내 마음이다.


           이 이상적인 마음에 현실이 역습한다. 직장인의 일주일은 고되다. 직장인으로 일주일 내내 기다리고, 참았다. 그 고된 기다림을 풀기 위해서 취미로 야구장에 온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도 기다리고 참고, 스트레스를 쌓고만 간다면 취미를 처음 시작한 이유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것인가?’ 


           여튼 ‘리그비’ (**리그비)도 내고, 여튼 ‘선수등록비’ (**선수등록비) 인지 내라는 돈은 다 낸 것 같은데 앉아있는 시간만 늘어간다. 당연히 수련이 필요하고, 당장 경기 나갈만한 실력이 아닌 것은 맞다. 스스로가 점점 스트레스만 쌓고 간다면 ‘취미’로써는 이 활동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씩 모래시계의 모래가 쌓여가듯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다. 이렇게 스트레스만 쌓여서는 취미를 지속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계속해서 벤치에서 선수들 물만 갖다주는 나날들. 응원한다면서 바라보지만, 감정이 한걸음 멀어져 있어서 경기에 몰입이 되지 않는다. 나도 나가고 싶은데, 10년치 경력자인 언니들보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들보다 잘하지 못하면 나갈 수 가 없다. 머리로는 상황이 이해가 가는데 그래도 마음은 묵직한 돌 하나를 목으로 넘긴 것 처럼 답답하다.


           경기가 있는 날은 가끔은 나가기 싫어지기도 했다. 차라리 일반 훈련이 있는 날은 몸이라도 많이 움직이고 오니 보람차다. 경기 있는 날은 조금 걷긴하지만 경기 내내 앉아만 있으니 운동도 안되는 것 같고, 장비만 챙기고, 밥 만먹고 오는 시간이 왠지 아깝기도 했다. 회사 스터디를 가거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휴식을 가지는 편이 더 낫지 않나 라는 고민이 쌓였다. 마음이 쫓기고 있기 때문이다. 쉬는 날 마저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강박감.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사회인 x년동안 내 몸에 깊이 박힌 “성실해야만 하는” 대한민국인 병이다. 이 병에 따르면 경쟁 사회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 다음주의 일을 위해서 주말에 ‘체력 보충’을 위해 쉬거나,  일을 위해서 부단히 ‘자기 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두가지를 못하고 있으면 이 병은 ‘불안’과 ‘초조’ 증상을 보인다. 재미있어서 스트레스가 해소되거나, 아니면 이 빈 시간에 뭔가 공부를 해야하는데 나 이러고 있어 되는 걸까? 지금 재미있어서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있지 않은데다가, 아무것도 공부도 못하고 있다. 


           그런 마음이 모래알처럼 쌓여가던 어느 날이었다. 감독님이 크게 내 이름을 부른다. “대타, 김입문! 심판님께 전달드려.” 막상 나간 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이 들었다. 내가 정리해놓은 헬멧을 내가 써본 적이 없어서 어디 있는지 찾아해맨다. 사이즈는 뭐가 맞는지도 모른다. 뭐가 맞지? 한참을 해매다 헬멧을 겨우 챙겨 쓰고는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뒤에서 주장님이 “언니 천천히 나가도 되요. 근데 언니 이거 가져가야....” 하는 소리가 들려야하는데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들을 뒤로 하고 서둘러 타석으로 나간다. 심판님에게 “대타 39번입니다.” 라고 말했는데 심판님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 심판이 대타를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고개를 저으신단 말인가. “네? 안 된다고요? 들어가요?” 의문이 가득한 상황에서 뒤돌아 벤치를 본다. 주장님이 뭘 흔들고 있다. 


           “언니 보호대!!” 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수십번 다른 선수들에게 챙겨줬는데 정작 내꺼를 챙기지 못했다. 그렇다. 팔꿈치 보호대, 투수가 던지는 공에 맞아도 다치지 않게 차고 들어와야한다. 이 리그는 보호대 착용이 의무라 보호대가 없으면 타석에도 들어서지 못한다. 그러니까 심판님은 ‘초보 대타’를 거부하신게 아니라 ‘보호대 미 착용자’를 거부하신 것이다. 음, 나무랄데 없는 타당한 판단이시다. 다시 헐레벌떡 돌아가 보호대를 차고 타석에 섰다. 


           초보티를 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벤치는 내 당황한 표정과 우스운 타격자세에 빵 텨져서 킥킥거리고 난리도 아니다. 여러분 팀인데 제 응원은 해주셔야하는거 아닙니까. 아니 귀뜸도 없이 대뜸 나가게 되니 초보는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못 나가서 억울한 마음이 호떡 뒤집듯 휘릭하고 뒤집어졌다. 


긴장감이 빡 들어간 김입문. 그리고 스트라이크 존

           

        첫 타석은 ‘루틴’이고 뭐고 할 생각도 없이 우승 직전 한국시리즈 7차전에 나간 선수마냥 긴장감이 빡 들어가 있었다. ‘루틴’이라고 타석에서 선수들이 준비 동작을 하는 행위 들이 있는데 나는 애초에 준비행위도 해본적이 없으니 루틴이고 뭐고 냅다 배트만 들고 서있다. 상대 포수 입장에서 보자면 “요놈 딱 보니 초짜구나~” 싶은 자세, 헐레벌떡거림을 그녀는 목도 하였을 것이다. 이를 목도한 이상, 봐줄 수는 없는 법.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사인을 보낸다. 내 팔꿈치 밑을 노리는 강력한 안 쪽 직구가 쇄도해 온다. 당연히 쫄았다.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싶으니 냅다 휘둘렀다.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 기다려야하나... 생각도 끝내지 못했는데 바깥쪽으로 직구가 또 슉하고 들어온다. 순식간에 아웃! 체인지.


        뭐가 이리 짧고 섭섭한지 돌아오는 길이 멀게 느껴진다. 벤치는 어두운 기색 하나 없다. 사실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며 킥킥 웃으며 언니들이 반긴다. 태권도 선수 였던 좌익수 언니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어땠어?’ 라고 물어보는데 “갑자기 끝났어.” 하고 대답했다. 언니가 또 꺄르르 하고 넘어간다. 내가 바로 살아있는 몸치 개그이자, 언니들 리그의 웃음 꽃이다. 프로리그 급 긴장감을 조성한 첫 타석은 이렇게 시시하게 끝났다.






1회         야구를 하고 싶습니다
              1회 초 - #왜 하게 되었나

              1회 말 - #어떻게 하게 되었나


2회          야구하는 여자들

              2회 초 - #첫 연습 가는 길

              2회 말 - #어떤 여자들


3회          소금 먹고 운동하기

              3회 초 - #식염포도당님 영접

              3회 말 - #냉탕과 온탕


4회          드디어 (동네) 리그를 뜁니다

              4회 초 - #얼마면 돼?

              4회 말 - #선물하시게요


5회          첫 안타 치던 날

               5회 초 - #패배감

               5회 말 - #첫 안타


6회          전국대회 벤치 입문

                6회 초 - #벤치도 공사가 다 망합니다

                6회 말 - #기세는 벤치가 가져옵니다


7회          여자야구 국가대표

               7회 초 - #국가대표의 대가

               7회 말 - #그 많던 언니들은 어디로 갔을까


8회          운동장에 엠뷸런스 오던 날

               8회 초 - #운동장에 구급차 오던 날

               8회 말 - #솜사탕 같은 뜬 공


9회          우승하던 날

               9회 초 - #금메달

               9회 말 - #모자를 던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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