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길들여져 가는 것이 좋다면
士내女내 #8_시나브로 길들여지기
그녀가 나에게로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
분명 같은 하이힐 소리이지만
매일이 전쟁터인 회사에서 듣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뭐 비록 이 소리뿐이겠냐마는
"안녕하세요."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일수록
준비해왔던 말은 꺼내기가 힘드네.
뻔한 인사말 뒤 숨은 '예쁘다'는 한마디.
사실 아직도 많이 낯설고 어렵다.
여자들이 입는 옷들의 모양과 이름부터
그 다양한 색상들까지.
부담스럽지 않은 화사한 연분홍빛 원피스
생기발랄한 긴 생머리와 은색 구두.
오래 알아가고픈 이성과의 첫 만남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오늘 날씨 많이 덥죠?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일분일초라도 더 빨리 이 사외만남을 환기시키고 싶다.
같은 땅 어느 누구라도 공감하기 쉬운 날씨를 말미암아
안부와 감사의 말을 전해 본다.
"네 많이 덥네요. 규민 씨도 많이 더우시죠?"
밝은미소로 화답하는 이 여자.
알게 모르게 테이블 가까이로 당겨지는 의자.
초점은 어느새 그녀 두 눈에 맞춰지고
주변 시야는 좁아져만 간다.
"유미 씨, 여기가 파스타 맛집이래요.
주변 사람들이 하도 맛있다고 하길래
언제 한번 꼭 오고 싶었는데 이제야 왔네요."
솔직히,
처음 와본 레스토랑은 아니었다.
한 달 전, 편하게 알고 지내는 대학 여자후배가
그렇게 밥을 사달라 조르기에
여기를 가보자기에 한번 와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성적인 감정이 없었던 그 후배.
그 후배와 밥을 먹으며 계속 들었던 생각은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과 꼭 함께하고 싶다는 것.
"그런데 규민 씨, 저는 괜찮은데 지금 저녁 먹어도 괜찮아요?
5시면 조금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어서요."
"저도 좋아요. 전에 버스에서 같이 얘기했을 때,
유미 씨 주말엔 보통 여유 있게 브런치 먹어서
저녁 일찍 먹는다 하셨었잖아요.
사실, 저도 그래요."
오 다행이다.
자칫 내 위주인 이기적인 성격으로 오해받을 것을,
너와 했던 이야기들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던
너에게 집중하고 있었다는 신호로 바꾸었으니.
어느새 나만의 노트에 적히기 시작한다.
그녀와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과 하고 싶은 것들
사소한 것들부터 그녀의 생활패턴들.
혹자는 이런 나를 이해 못한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어쩌나,
나에게 중요한 것들은 잊어버리기 싫다.
"제가 오기 전 인터넷 검색해보니
이거랑 이게 인기가 제일 많대요.
주문받으러 오면
어떤지 한번 물어볼까요?"
"좋아요, 주문받으러 오면 같이 한번 물어봐요."
좋다 좋아요.
무언가 자꾸 물어보고 확인받으려 하는 내 모습이
그 후에 반응을 살피는 내 모습이
어른아이 같기도 반려견 같기도 하다.
두근두근 조마조마한 내 마음은
단순하지만 정확한 그녀의 '좋아요'로 진정된다.
"규민 씨는 예전 학생이었을 때,
어땠었어요?"
역시나 나올 줄 알았다.
전혀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질문은 아니다.
몇 시간 전이든, 며칠 전이든, 몇 년 전이든
누군가 나의 과거를 궁금해한다는 것만큼
나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은 긴장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에게
먼지 덮인 과거를 털어내고 예쁘게 포장할지
조금은 못났어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줄지
예상 질문들에 맞추어 미리 준비했던 몇몇 답변들을
주섬주섬 꺼내어 본다.
너로 인해 변하기 전 나의 모습이
네 마음에 쏙 들기를 바라며.
본 에피소드는 한창 연재를 진행 중인 로맨스 소설 '士내女내'의 여덟 번째 이야기입니다. 아래는 이전 에피소드 목록이며, 전편을 읽어보지 않은 분들은 차례대로 읽어봐도 재밌을 듯싶습니다.
1편 - #1_'쿨하다'는 것
2편 - #2_'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그럼
3편 - #3_오작동! 내 이성적 사고회로
4편 - #4_그 한마디가 나오기까지...
5편 - #5_설레임,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6편 - #6_넌, 이런 내 맘 알까?
7편 - #7_너라는 우주에 첫걸음
8편 - #8_시나브로 길들여지기
9편 - #9_보통남자? 보통이 아닌 듯
10편 - #10_보통여자? 내게는 다른 걸
11편 - #11_이 밤의 끝자락
12편 - #12_갈피와 타이밍
13편 - #13_참 묘한 '첫 통화'
어느새 올해도 4분의3이 지나버렸네요. 과거에 어떻게 살았냐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과거도, 지금을 정성스레 살고자 하는 현재의 나에 따라 미화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모두들 올해 지나간 4분의3보다 몇 배는 더 멋진 4분의1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
- 퍼피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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