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인간 대 AI: 나는 누구인가?>에 이어 WHY의 <Being: 거짓 속의 진실>을 읽고 밑줄 친 내용을 토대로 생각을 담습니다.
디지털 전환을 논하는 시대를 이해한다면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단순한 도구를 넘어 우리 몸과 감각을 확장하는 기술로서의 미디어, 사회관계를 지배하는 메시지이자 주체로서의 미디어는 지금 더욱 유효해졌다.
혹자는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치운다고 표현하는 현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면 미디어의 지배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신체도 뇌도 더 이상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본질이 아니라면, 무엇이 인간을 정의할 것인가? 무엇이 우리를 살아있다고, 존재한다고 말해 줄 것인가?
일론 머스크와 뉴럴링크를 키워드로 구글링을 해 보면 저자가 말한 현상에 대한 기록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코를 긁고 싶어요.'라는 단락에서 밑줄 친 글입니다.
신체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호소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삶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노년을 옆에서 보았기 때문에 다음 문장(포기말)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사소한 것들을 혼자 할 수 있게 되는 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삶을 뜻한다.
이번에는 '진화의 끝은 어디인가?'라는 단락에서 밑줄 친 글입니다.
매클루언은 미디어를 인간 신체의 확장으로 보았다. <중략> 한자리에 모이지 않고 각자의 집에 있어도 메시지를 한 번에 전할 수 있는 전기 미디어가 거실로 들어왔다.
저자는 이어서 몸의 확장으로서의 미디어라는 문제를 말합니다.
몸의 확장으로서의 미디어라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관계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관계를 매개하는 모든 것은 미디어다. 어떤 연결/관계를 만드는지가 각각의 미디어를 구분한다. 연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미디어를 살아 있는 네트워크로 정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난 10월에 썼던 <디지털 기술의 일상 침투와 사라지는 인터페이스>는 아마도 아래 다발말[1]의 영향을 받았을 듯합니다.
미디어에서 우리의 행동을 유발하는 실체가 곧 인터페이스다. 미디어의 세 가지 구성 요소에서 컨테이너에 해당한다. 여기서 실체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리적, 시각적 장치뿐만 아니라 소리, 촉각 등의 모든 감각적sensorial 대상, 즉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모든 기호를 포괄한다.
이어서 다음에 인용한 문장은 소통 방식과 매개체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갖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문장입니다.
각각의 인터페이스와 내가 소통하는 방식은 다시 나와 세상을 매개한다.
그런데 점진적으로 바로 그 매개가 되는 인터페이스가 사라지면 인공지능과 사람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져 가겠네요.
내 마음mind과 생각이 인터페이스를 온전히 대신하게 되는 경우다.
그러다가 나아가 서로의 몸이 될 수도 있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뇌가 컴퓨터와 인터 페이스 없이(즉 생각이 인터페이스로서) 직접 연결됨에 따라 손을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컴퓨터와 소통할 수 있게 되는 것, 컴퓨터로 매개된 상대방과 더 직접적으로, 더 빠르게 생각만으로 연결되는 경험이 현실적으로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문제와 고민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생각만으로 서로 연결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 서로의 생각을 단숨에 읽어 버리는 불편한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더 많이 이해하게 될까? 아니면, 더 많이 분노하게 될까? 겉과 속이 다른 거짓말이 사라지게 될까? 신체적 고통이 뇌의 자극에 의한 것이라면, 이제 분만의 고통을 남자들도 알게 되는 것일까?
그리하여 피할 수 없는 질문과 부딪힐 수 있습니다.
한 몸, 한 신체의 일부로서 나는 이제 무엇이 될 것인가? 무엇을, 왜 연결하는 주체로 살아갈 것인가?
경계가 흐릿해지면 어디까지가 나인지 혼란스럽고,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지 물어야 합니다.
오래 읽고 깊게 사고하고 본질을 질문하는 근육을 단련시킬 시간도, 명분도 없으니(시험에 나오지 돈 않고, 전문가로 인정받는 데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중략> 그런데 문제는 미래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시간의 굴레를 알아채고 시간을 다시 인식한 상태여야 가능한 주장입니다. 이때 인터페이스가 사라지고 인공지능과 나의 경계가 모호하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인터페이스의 핵심은 행위에, 행위가 만드는 '관계'에 있다. 신체적 성능의 진화는 생각이 연결되는 극단적 구조에 도달했지만, 연결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존재적인 진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공지능이 아닌 내가 만드는 가치에 대해 물어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연결을 만드는 행위자actor가 될 것인가?
그리고 다음 인용문은 소름 돋는 문장입니다.
단백질 덩어리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관계다.
핵심을 찌른 메시지에 소름이 돋기도 하지만, 또 다른 지인이 최근 했던 말과 그대로 일치하는 탓도 있습니다.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단락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회 96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96. 보편기계인 컴퓨터가 에이전트로 이름을 바꾸려나?
97. 해피엔딩의 함정에서 나와 네트워크의 시간을 살기
100. 모멘텀을 통해 연결을 만들어 성장하라
101. 인생의 전환점을 만드는 감정 활용법
102. 감정의 민첩성은 의미 있는 삶을 위한 훌륭한 친구이다
103. 한 방향으로 만드는 새로운 세상: 동료, 발견, 세상
105. 인간 대 AI: 나는 누구인가?
106. 감정의 민첩성을 얻기 위해 감정에서 한 걸음 비켜나기
107. 생각이 살아서 여행을 멈추지 않도록 돕는 동반자다
108. 감정의 민첩성을 얻어 자기 목적에 맞는 길을 걸어가기
109. 사람보다 똑똑한 인공지능을 위한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