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철거 공사
1. 싱크대는 집 전체에 한 개만 있을 것
2. 방의 수가 총 네 개를 초과하지 말 것
온전한 대출을 위해 은행이 내건 조건은 이렇게 두 가지였다. 그런데 싱크대는 세 개, 방은 무려 여섯 개나 되다 보니 공사 규모가 커질 수밖에. 마침 시공사에서도 견적을 내기 위해 집의 부재를 확인해 보고 싶다고 하니 내친김에 천장까지 모조리 열어 보기로 했다.
현장에서 환한 얼굴로 맞아 주시는 건축가님의 미소 뒤로 보이는 혼돈의 도가니. 장판을 들어내고, 벽을 허물고, 싱크대를 부수고. 안 그래도 좁은 마당에 온갖 자재가 가득 쌓이니 들어서는 것조차 어려웠다. 게다가 천장을 잡아 뜯으면서부터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날리는 분진까지. 왜 하필 오늘 비말용 마스크를 챙겨 왔을까!
여러 과정 중 천장을 내리는 순간에 대해서 만큼은 기대했던 게 있는데,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가느라 숨겨뒀던 금덩어리가 떨어진다거나, 왜정(倭政) 시대의 금서(禁書)가 발굴된다거나 하는 것이다- 물론 뭐가 나오건 잔금을 내기 전이라 나와는 별 관계없는 이야기가 되긴 하겠지만. 여하튼 '누구 것이 되면 어떤가 뭐든 멋진 게 나와주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으로 천장을 열었더니 정말 뭔가 멋진 게 나왔다.
"안녕하세요 H.O.T. 입니다. 키워주세요!"
의식이 있는 채로 90년대 중반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애고 어른이고 이들을 모를 사람이 있을까?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충분히 어울리는 바로 그 보이그룹, H.O.T. 의 포스터.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공사하시는 분의 손에 무참히 뜯겨 나가기는 했어도 기대했던 바와 같이 고완품(古玩品)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에 뽀얀 먼지 속에서도 잠시간 다 함께 웃을 수 있었다. 철거 비용이 꽤 나왔는데, 천장 속 저분들을 곱게 내려 다시 몇십 년 모시고 있었더라면 좀 도움이 되었으려나?
여든 살 먹은 집 치고 철거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하루가 마무리되었으니, 오늘은 그야말로 대성공. 무엇을 더 바랄까.
2022.01.14. 세 번째 실시설계(인테리어) 미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