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의 4학년 여름방학도 끝이 보인다.
지우의 일곱 번째 방학, 심플하고 깔끔했다. 정말 이렇게 놀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원 없이 놀았다. 학원이란 곳은 당연히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며, 새음학교에서 허락되어 있는 예체능 학원조차 가지 않았다. 원래 방학이면 어른들이 고기를 먹고 당연히 냉면을 먹듯이, 두레 아이들은 수영과 바이올린 조합처럼 운동과 악기 하나씩은 배우곤 한다.
민주적인 우리 집, 이번 방학을 앞두고 지우에게 뭘 하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맘 속으로는 수영과 피아노 조합을 밀고 싶었지만 먼저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지가 하고 싶다는 걸 해야지. 근데 물어보는 게 아니었나. 지우의 대답은, 아주 제대로 일방적이고 확실하게 원 헌드레드 퍼센트 야무지게 놀고 싶다고 했다. 물론 지우의 정확한 워딩은 아니다. 지우는 '원 헌드레드'와 같은 영어를 아직 모른다. 얼마 전 They의 소유격을 There라고 써놓고 '나 영어 잘하지?'란 으쓱한 표정을 짓길래, 그저 머리를 쓰담쓰담해줬을 뿐이다. 발음이 같으면 됐지 뭐.
지우의 워딩은 '방학답게 집에서 늦잠도 자고 하루 종일 뒹굴뒹굴 좀 하고 싶어. 그게 방학 이잖아. 그러니 학원은 아무 곳도 안 갈래'였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놀아야 방학이지. 매일 영풍문고 코엑스점 아이들 코너에 한 번씩 가보는 사람으로서, '놀이를 통해 배운다'는 책들도 많이 봤다. 주로 핀란드나 북유럽 아이들이 또래들과 놀면서 배우는 내용들이었다. 이런 내용으로 EBS 방송이 나오면 꼭 챙겨 보기도 했다.
이런 책들과 영상들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이들은 또래와 놀 때 평상시보다 더 성숙하게 행동하고 책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능력을 펼쳐볼 수 있는 기회를 접하면서, 결국 가장 중요한 자기조절 능력을 배운다는 내용들이었다. 놀이를 통해 배우는 자기조절 능력이 결국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지능이나 집안 환경보다 훗날 학업성취도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귤을 먹고 비타민을 섭취하고, 멸치를 먹고 칼슘을 섭취하는 것처럼, 또래와의 놀이를 통해서만 그런 자기조절 능력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럴듯한 이론이지만, 조금 삐딱하게 놀이를 통해 자기조절 능력을 못 배운들 어떠랴. 11세면 가장 행복해야 할 나이 아닌가. 난 우리 지우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 깔깔깔 웃으며 행복한 오늘을 즐기기만 바란다.
그런데 놀이를 통해 배운다는 내용의 책이나 영상들의 문제는, 대부분 놀이를 통해 배우는 대상이 1~2살이거나 가장 범위가 넓어봤자 3~7세였다. 난 교육 전문가는 아니지만 경험으로 터득한 나만의 감이 있다. 10~15살이야말로 친구들과 놀면서 배워야 할 최적의 나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지우의 '이번 방학 땐 아무것도 안 할래' 선언을 철저히 존중하기로 했다. 본인의 선택대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 네가 싫으면 이번 방학 땐 아무것도 하지 말고 뒹굴거리기만 하자.
그래서 주 1회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수영을 끝으로 모든 학원과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진짜 세상의 기준으로 생산적인 일을 1도 하지 않고 베짱이의 여름 나기를 시작했다. 우리 집을 놀면서도 이것저것 미끼를 물어서 뭔가를 학습할 수 있는 융복합형 공간으로 만들려는 어설픈 시도조차 하지 않고, 대놓고 놀기만 하는 공간으로 바꾸었다.
그래도 가슴속 하나의 아쉬움은 독서이었다. 난 그래도 저 나이 때 ABE, 위인전, 괴도 루팡 시리즈 등 방학 때마다 한 종류씩 꽂혀서 쌓아놓고 봤는데, 지우는 이번엔 책도 별로 안 읽는 듯했다. 공부하란 말은 안 할 자신은 있는데, 책은 좀 읽으란 잔소리가 몇 번씩 나올 뻔했지만, 꼰대처럼 보일까 봐 강요하진 않았다. 그래, 자고 일어나면 소가 되어 있을 것처럼 쉴 땐 확실히 쉬어라. 책을 읽으란 소리를 안 하니 진짜 읽지 않았다. 그동안 책을 읽었던 것은 주 2~3회 개인 취향저격 책을 사 오던 아빠의 공이 컸는데, 아빠의 부재로 인해 새로운 책의 공급이 끊기니 기존 책을 다시 꺼내서 읽지는 않았다. 최후의 보루, 마법천자문마저 신간 나오는 텀이 너무 길어 흥미가 끊겨 버렸다. 우리 딸, 아빠가 퇴근길에 사 오던 새 책을 좋아했던 거지 책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구나.
그러니 지우의 하루 일과는 심플했다.
매일 스쿨버스를 타느라 7시 20~30분에 일어나는 게 힘들었던지 9시경까지 꿈에 그리던 늦잠을 잤고, 일어나서 동생이랑 세상 귀찮은 사람들의 축축 늘어지는 만담을 나누며 뒹굴거리며 놀고 있으면, 엄마 카톡으로 친구들과의 놀이 스케줄이 잡힌다. 매일 만나는 친구들과 만나는 장소가 바뀌었다. 우리 집, 친구 집, 도서관, 교회, 만화방, 박물관, 수영장, 캠핑 등등. 그것도 안 잡히면 만능키 동갑내기 사촌 가현이에게 전화해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하루 종일 노는 걸로도 모자라 일주일에 두어 번은 외박까지 이어졌다. 내가 저 나이 때 가장 좋아한 것이 친구 집에서 자고 오는 것이었는데, 우리 딸이 제대로 이어받고 있다. 간혹 아무도 놀 사람이 없는 날이면, 3층에 내려가 삼촌, 할머니, 할아버지를 따라다녔다. 삼촌을 낙타 부리 듯 올라타서 놀거나, 할머니가 마트에 가시거나 할아버지가 도서관에 가실 때 따라나섰다.
4학년이면, 신체는 많이 컸지만 정신은 여전히 어린아이의 끝자락이라 이런 방학이 더 어울린다.
교육에 대한 철학은 사람마다 다르다. 정답이 있을 수는 없고 내 방식을 남들에게 추천할 마음도 없다. 난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공교육을 아주 잘 받고 큰 사람으로서 공교육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다만 공부를 해 본 사람으로서 경험상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공부는 본인이 스스로 하고 하고 싶을 때 해야 하고, 좋아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새음학교의 선행학습 금지와 세련된 자기주도 학습은 나의 교육관과는 잘 맞아떨어진다.
그래도 공부를 1도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 앞에서만 안 했을 뿐이지 학교에서 내 준 방학숙제가 있었다. 선행학습은 안되니 미리 공부해야 하는 것은 없고, 4학년 1학기 때 배운 수학 문제집을 복습하며 한 권 푸는 것이 숙제였다. 지난 방학 땐 개학 임박하여 벼락치기로 힘들게 풀었더니, 이번 방학 땐 그래도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친구들과 놀 때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기특하게 다 풀어놓았다. 와, 제법 시간이 걸렸을 텐데 이 아이들은 실컷 놀면서도 그 와중에 몸에 배어있는 자기주도 학습을 한 것이다.
지우가 퇴원하고 집에 오니, 문제집 다 풀었다며 채점을 해달라고 가져왔다. 나로선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지우가 어떤 걸 틀리는지 알 수 있는 시간.
내가 개인적으로 교육에 있어서 가장 가치를 두는 부분은, 아이들은 나이에 맞게 커야 한다는 것이다. 지우는 딱 4학년 학생이다. 놀 때도 딱 4학년처럼 논다. 핸드폰이 없고 미디어 시청을 제한하다 보니, 친구들과의 놀이에 핸드폰을 만지거나 아이돌이나 연예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주로 친구들과 역할 놀이를 하며 놀았다. 마니또 게임을 하면서 서로 편지도 주고받고, 햇빛이 뜨겁지 않으면 놀이터에 가서 그네와 미끄럼틀을 타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며 놀았다. 80년대 아날로그 시절의 4학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다.
공부도 딱 4학년이다. 채점을 해보면, 10문제 중 2문제 정도는 틀린다. 그렇게 놀고도 8개를 맞추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그런데 맞고 틀린 문제들을 뜯어보면, 4학년으로서 맞춰야 할 문제는 맞추고, 4학년이니 틀릴 수 있는 문제는 일관되게 틀렸다. 왜 틀렸는지가 명확히 보였으니 설명해주기는 훨씬 쉬웠다. 조금만 문제가 어렵거나 국어로 꼬아놔도 실수를 했다. 간혹 친구랑 놀면서 풀었기에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터무니없는 실수도 보였다. 난 이런 오답에 더 좋았다.
"지우야, 이 문제 다시 한번 읽어봐. 그리고 왜 틀렸는지 한 번 찾아봐"
정답보단 왜 틀렸는지 찾는 게 더 중요했다. 그러면 지우는 눈이 초롱초롱해지며 초집중을 하기 시작하고 잠시 후 "아하~!"하면서 왜 틀렸는지를 찾아냈다. 난 이 과정이 가장 즐겁다. 본인이 틀린 문제를 왜 틀렸는지 알아가는 과정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정답을 한 번에 맞혔으면 알 수 없었을 실수의 패턴을 발견하고 다음부터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지도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그래서 난 지우가 많이 틀리면 틀릴수록 기쁘다.
난 4학년이 5학년, 6학년 문제를 풀거나, 아직 우리말 단어도 많이 모르면서 영어를 유창하게 하거나, 시험만 보면 항상 만점을 받는 걸 경계한다. 물론 그런 교육을 잘 소화하는 아이들도 제법 있을 테고, 그런 교육이 더 잘 맞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우리 두 딸은 아빠 엄마를 닮아 지극히 평범하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커왔던 것처럼 나이에 맞는 교육을 받고 나이에 맞게 성장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4학년이 4학년다워야 중2 때는 중2답게, 고3 때는 고3답게, 대학생 때는 대학생답게 공부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다고 믿는다. 너무 어려서 에너지를 몽땅 소모해버리고 뒷심을 발휘하지 못해서 꽃 피우지 못한 재능들을 얼마나 많이 봐 왔는가. 우리 아이들은 조금 늦더라도 그 나이에 맞게 성장하길 바라는데, 새음학교가 이 역할을 원 헌드레드 퍼센트 해주고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새음학교에는 중도 입학한 아이들도 많다. 아이들이 처음 중도 입학했을 때 새음학교를 처음부터 다닌 아이들과 눈에 띄는 차이점이 하나 있다. 새음 학생들은 절대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1학년 때 반의 캐치프레이즈가 '비교 없는 성아반'이었을 정도로 입학과 동시에 선생님, 학부모님들, 학생들 할 것 없이 일체 비교란 하지 않는다.
지우가 시험에서 90점을 받아오면 일부러 가끔 물어본다. 100점 받은 친구도 있어?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한 친구도 있어? 그러면 지우의 대답은 한결같다. "몰라. 있겠지?" 정말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듯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이 아이들은 정말 친구와 비교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 중도 입학을 한 친구들은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에게 몇 점 받았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기존 학교에서 비교하던 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도 순수한 두레학교 아이들과 섞여서 시간을 보내고 나면, 기존 새음 아이들처럼 주위와 비교하지 않고 온전히 스스로가 서 있는 아이들로 변해간다.
친구는 경쟁자가 아니라 동반자가 되는 축복을 새음학교 아이들은 선물처럼 받고 있다.
나 역시 시간이 지나니, 경쟁자였던 친구들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동반자였던 친구들만 내 옆에 남아 있더라.
니체가 말했다.
지금 이 인생을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다행이다. 난 내 인생을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 지금 겪고 있는 병마까지 포함하더라도 모든 게 감사할 뿐이다. 그래도 만약 누군가의 인생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면, 지우로 태어나고 싶다. 이토록 하루하루가 행복하기만 한 아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 아이 행복의 30%는 외할머니, 30%는 엄마 아빠 이모 외삼촌 사촌 가현이 등 나머지 식구들, 그리고 40%는 새음학교 덕분이다. 새음학교에 기꺼이 지우 행복의 최대주주 지위를 넘겨주겠다.
이번 방학을 이렇게 보냈더니 좋은 점도 있다.
지우가 그렇게 하기 싫어하던 태권도를 개학하면 다시 하겠다고 한다. 할렐루야.
아빤 네가 피아노도 쳤으면 하는데, 입 밖으로 꺼내진 않을게. 뭘 배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They의 소유격이 There가 아닌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처럼 계속 두레 아이들과 행복하자.
아빠가 살아보니, 오늘이 행복한 사람들이 내일도 행복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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