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20 목요일
드디어 출발하는 날.
지난번 여행은 새벽 두 시에 퇴근해서 영화 <폭력서클> 한 편 보고 여섯 시에 출근했으니,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출발했다. 최대한 잠을 아끼고 버티다가 비행기에서 푹 잘 계획이었는데, 내가 지아를 과소평가했던 것이었다. 현실은 기내에서 지아의 밤샘 칭얼거림을 온몸으로 달래야 했고, 결국 이틀을 거의 자지 못해 심신 밸런스가 완전 무너진 상태로 하와이에 도착하여, 여행 초반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었다.
그래서 이번은 지난번과 완전히 다르게 준비했다. 전날 밤 10시에 가족 모두 잠자리에 들어서 아침 7시까지 푹 잤다. 4인 모두 약간의 감기 기운이 있어서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푹 자고 일어난 덕분에 감기가 더 악화된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하루의 시작이다.
난 정상 출근을 했고 오늘부터 휴가인 와이프가 애들과 짐을 챙겨서 오후 5시까지 도심공항터미널로 오기로 했다. 지난번에는 카드사 에쿠스 리무진 서비스를 활용해서 럭셔리하게 출발했는데, 그 서비스는 1년에 1회만 가능했다. 이번엔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고생 좀 하게 생겼다. 그나마 도심공항타워에서 일하는 것이 이렇게 편리할 때도 있구나. 난 살금살금 걸어나가 5시 10분 출발하는 리무진 표 네 장을 사놓고, 가족들을 만났다.
출발 5분 전. 헉! 아이패드를 사무실에 충전해놓고 빠뜨리고 온 것이 기억났다. 누군가가 아이패드를 보는 것을 봤다던지, 혹은 뭐 빠뜨리고 온 게 없는지 마지막 체크를 해봤다던지 한 것도 아니고, 떠올릴 만한 단서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아이패드를 사무실에 두고 온 것이 떠올랐다.
아이패드가 없으면 아이들과 정상적인 여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거의 여권 급의 준비물이었다. 거기엔 여행기간 동안의 숱한 이동 시 아이들의 벗이 되어줄 만화 동영상이 가득 들어 있다. 지난 며칠 동안 지우, 지아가 공통적으로 좋아할 동영상 만화들만을 골라서 가득 담아놨었다. 하나라도 더 담아주려고 기존 파일, 용량 큰 앱들까지 지워가며 남은 저장용량이 거의 0이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받아놓은 후, 마지막 충천 몇 %를 더 하려고 꽂아뒀다가 두고 온 것이다.
그래도 기적과 같은 타이밍에서 그것이 떠올랐다. 또 한 번 사무실이 바로 옆이란 것에 감사했다. 회사 직원에게 아이패드를 좀 가지고 내려와 달라고 부탁하고, 난 코엑스몰 지하를 전력 질주해서 아이패드를 계주 바톤처럼 이어받은 후 다시 전력 질주하여, 버스 마지막 탑승객으로 아슬아슬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스.
리무진에 이미 사람들이 꽉 차있고, 일진들이 앉는 제일 뒷자리만 비어 있었다. 내가 짱인걸 어떻게 알고 비워놨지? 그래서 우리 4인 가족이 위풍당당하게 입장하여 젤 뒷자리를 접수했다. 역시 공항리무진은 쾌적하고 편안했다. 비행기 비즈니스 좌석 수준이다. 지우가 옆에서 이거 타고 하와이까지 가고 싶다고 했다. 응, 내 마음도 그래.
하지만 버스는 비행기에 비해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화장실이 없다. 공항까지 한 시간 반 정도 가야 하는데, 시한폭탄 지아가 버스 출발하자마자 하늘이 노래지는 소리를 한다.
“엄마, 쉬!”
완전 낭패다. 지아는 최근에 쉬 주기가 부쩍 짧아졌다. 게다가 물을 엄청 좋아해서 항상 물통을 가지고 다니며 마신다. 일단 만능 치트 키인 아이패드를 조기에 꺼내서 만화를 틀어주었다. 만화로 정신을 혼미하게 함으로써 시간을 최대한 벌어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10분 정도 집중하더니 다시 쐐기를 박는다.
“엄마 쉬! 엄마 쉬!”
현재의 위치는 퇴근시간에 접어들어 주차장이 되어버린 올림픽대로 위. 한반도에서 가장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다. 이곳은 80년대 시골길을 가다 버스를 잠시 세워두고 논두렁에 쉬를 하고 오는 것과 같은 훈훈한 장면을 기대하기 가장 어려운 곳이다. 짐은 모두 공항리무진 밑 화물칸에 실려있고, 가지고 있는 가방에서 쉬를 해결할 만한 것을 찾아보니 지퍼백이 나왔다. 지퍼백 안 내용물들을 다 비운 후, 입구를 벌려 쉬를 담았다. 자기 자식의 쉬나 응아는 하나도 더럽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 다 거짓말이다. 아기들의 쉬도 냄새날 거 다 난다. 손 끝만을 이용해서 서둘러 뜨뜻해진 지퍼백을 닫았다.
다행히 우리 자리가 제일 뒷자리라 아무도 눈치채지 않고 “엄마 쉬”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 휴, 큰 산을 넘었다. 다만 내 앞 의자 등받이 수납 그물에 쉬가 담긴 지퍼백이 찰랑거리고 있는 것이 찝찝했으나 지퍼백을 믿어 본다. 새기만 해봐라, Ziploc 고소해버릴 테다.
이번 여행을 앞두고 아이들 정신교육도 많이 시켰다. “여행 가면 어떻게 해야 하지? 비행기를 타면 어떻게 해야 하지?” 등등 질문을 하면, 사도신경이나 국민교육헌장을 외우 듯 좔좔좔 앵무새처럼 잘도 대답했다. 특히 지아는 바디랭귀지까지 곁들이며 “비행기 타면, 밥 먹고 코 자야 돼. 떠들면 안 돼. 울면 안 돼”하며 대답을 잘했다. 하지만 버스 타자마자 격렬히 말다툼을 하는 자매를 보며, 역시 9세, 4세 아이들에게 사전 정신교육 따위는 사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치열한 다툼 후 지우가 잠시 잠드는 것으로 드디어 버스 안의 평화가 찾아왔다.
이제 우리도 좀 쉬려는데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또 물을 쪽쪽 빨아먹던 지아는 인천공항을 10여분 앞두고 또다시 “엄마 쉬”를 외쳤다. 10분이면 도착하니 좀 참으라고 했는데, 지아는 좀 전에 서서 지퍼백에 쉬를 한 것이 재미있었던지 목소리를 더 높였다.
“엄마 쉬, 엄마 쉬, 엄마 쉬, 엄마 쉬”
할 수 없어 찰랑거리는 지퍼백을 다시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준에 실패하여 바닥에 일부가 흘렀다. 쉬가 앞자리로 천천히 흘러갔다. 앞 좌석 사람의 가방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가방으로 천천히 돌진하고 있는 이 거대한 물줄기를 막아야 했다. 그래서 서둘러 가방에서 와이프의 화장솜을 꺼내서 버스 바닥을 닦았다.
참 쉽지 않은 여행의 스타트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Hawaiian Airline 출국 수속 시간이다. 지난번에 고생을 하며 배운 노하우가 있어서 좀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일단 공항에 조금 더 빨리 도착하다 보니, 수속 대기 줄이 상대적으로 짧았다. 와이프가 줄을 서고, 난 카시트 두 개를 박스 포장하러 갔다. 인천공항 3층 출발지 맨 끝으로 가면 수화물 보관소가 있는데, 주로 따뜻한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두꺼운 외투들을 맡기고 있었고, 구석에선 수화물 크기에 맞춰 박스 포장을 해준다. 셰프들의 칼질만큼 능숙한 솜씨로 카시트 포장도 큰 박스를 공중으로 훽훽 돌리며 10초면 끝낸다.
그리고 미리 환전 신청해놓은 돈을 환전 전용 ATM기를 통해 찾았다. 1층에 들러 Wifi 공유기까지 받아올까 했는데, 지난번보단 수속이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대기 줄로 돌아갔다.
함께 비행기에 탑승할 사람들을 쭈욱 둘러봤더니, 이번엔 유독 어르신들이 많다. 이 분들은 밤 비행기에서 숙면을 취하셔야 할 텐데, 비행기에서 난장을 피울만한 아이는 지아 밖에 안 보였다. 내심 다른 아이들로 인해 깰 일은 없겠다고 마음이 놓이면서도, 대란의 주인공이 우리 아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부담감도 밀려왔다. 배고프면 짜증이 폭발하는 아이들의 변신을 미리 차단하고자, 면세점에 들어가서 저녁부터 먹었다. 이런 곳에선 만만한 게 우동과 돈가스다.
아이들의 허기를 서둘러 달랜 후, 와이프가 계산대에서 추억의 밀크카라멜을 하나 사 왔다. 이름도 카라멜도 아니고 캬~라멜이다. 지우에게 이거 엄마 아빠 어릴 때 먹던 캬라멜인데 정말 맛있을 거라고 하며 하나 건넸다. 지우는 원래 처음 보는 음식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데, 심지어 똥 색깔을 하고 있는 정육면체 무언가를 건네주니, 역시 처음엔 입을 쉽게 벌리지 않았다. 하지만 코로 캬라멜 향기가 전해지는 데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그제야 입에 조심스럽게 캬라멜을 넣었다. 난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내 예상대로 정확히 3초 만에 반응이 왔다. 생선을 본 길고양이처럼 순식간에 동공이 커졌다. 지우가 그렇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정말 오래간만에 봤다. 목소리도 흥분해서 하이톤이 되었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다. 왜진작 이걸 안 사줬어”
언니가 감탄하는 표정을 보고 지아도 빨리 달라고 입을 쩍쩍 벌려서 냉큼 하나 입에 넣어 줬다. 지아는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는데, 잠시 오물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뱉었다. 사탕을 기대했는데 물컹거리는 식감에 놀랬던지 당황한 표정을 하며 뱉고 말았다.
지우에게 지아는 맛이 없다며 뱉었다고 했더니, 지아가 뱉은 거 자기 달란다. 혹시나 해서 줬더니,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진짜 입에 넣었다. 평소 지우를 아는 우리에겐 굉장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평소엔 포크나 컵도 같이 안 쓸 만큼 과하게 깔끔 떨던 아이였는데, 동생이 두어 번 씹다 뱉은 캬라멜을 먹다니. 이것은 이 아이가 이성적으로 깔끔 떨 수 있는 수준을 넘어버린, 정말 천국의 맛이라는 말이다. 내가 처음 참치캔을 따서 먹었을 때와 오양맛살을 먹었을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다시 그 식당으로 돌아가서 5개를 더 사줬다.
비행기를 탔는데 생각보다 자리가 괜찮았다. 처음엔 몰랐는데 이코노미와 비즈니스 사이의 프리미엄 이코노미 좌석이라고 했다. 어쩐지 내가 다리가 줄어든 것도 아닌데 무릎과 앞칸과의 거리가 제법 남는다 싶었다. 만석이 아니어서 중간 4자리에 두 명씩 앉은 곳도 눈에 많이 띄었는데, 우린 어쩔 수 없이 4명 꽉 채워 앉았다.
다행히 헬비행은 아니었다. 전날 푹 재우고 배도 든든히 불려놓고 좋은 컨디션으로 비행기를 탔더니, 고분고분하게 잘 자고 잘 먹고 잘 보면서 왔다. 지난번처럼 밤을 꼬박 새우면서 지아의 칭얼거림 및 소란과 싸우지 않은 것만으로도 버스에서의 쉬 따위는 가볍게 덮어버릴 만큼 굿 스타트였다. 아이들은 각자 좌석 두 개씩 누워서 8시간 중 약 6시간은 잔 듯하다.
그렇다고 평화롭기만 한 비행은 아니었다. 기내가 잠시 흔들릴 때 지아가 사과주스를 쏟아서 옷을 다시 갈아 입혔고, 지우는 착륙 30분 전부터 귀가 아프다고 엉엉 울었다. 또한 와이프와 나는 애들에게 좌석 두 개씩 사용하여 침대를 만들어서 재운 후, 혹시 움직이다 이 평화가 깨질까 두려워 불편한 부동자세를 하고 있다 보니, 허리에서 골반으로 내려오는 우리 몸의 활성단층들이 여러 곳에서 폭발하여, 분명 자긴 잤는데 몸은 더 피곤한 상태가 되어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다.
도착은 현지시간 오전 11시 30분이었고 마우이행 비행기는 오후 5시 30분이었다. 수속 시간을 빼더라도 약 3시간 정도의 시간이 비었다. 물론 이 시간에 대한 준비도 세 가지 옵션으로 완벽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래서 우선 택시부터 타고 와이키키로 향했다.
비행 끝난 컨디션에 따라 고를 수 있는 싸고 맛있는 맛집을 세 군데 찾아놨다. 1번 옵션은 일본 라멘집. 애들이 좋아하는 면 음식에 공깃밥까지 먹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2번 옵션은 스팸 무수비를 사서 바닷가에 가서 먹는 것. 가장 와이키키스러우나, 아이들 한 끼라도 든든히 먹여야 하는 상황에서 쉽게 선택하긴 어려운 옵션이다. 그리고 3번 옵션으로 괜찮은 브런치 가게를 하나 찾아놨다.
택시에서 지우에게 세 가지 중 하나를 골라보라고 하니, 팬케이크를 먹고 싶단다. 내 마음도 팬케이크 집으로 기울어 있어서, 일부러 마지막 옵션으로 넣고 감정을 실어 설명을 해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멘을 먹는다고 할까봐 신경쓰였지만 다행히 옵션 3으로 결정했다. 지도 검색도 필요 없다. 이미 내 머릿속엔 팬케이크 집으로 향하는 지도가 그려졌다. 난 택시 아저씨에게 와이키키 Ross 앞으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Ross 정문에서 내리자마자, 마치 고등학생이 쉬는 시간에 학교 매점에 가 듯, 단 한 번의 두리번거림 없이 가뿐하게 브런치 가게에 도착했다.
Heavenly Island Lifestyle (주소 342 Seaside Ave, Honolulu)
내가 식당을 고르는 기준은 일단 맛인데, 그중 Egg’n Things처럼 과하게 유명한 집은 일단 제외한다. 그리고 지난 번 여행에서 마지막 만찬을 했던 Westin Hotel의 Moana Surfrider와 같이 고급 레스토랑도 우리 여행 Lunch 컨셉에는 맞지 않아서 일단 배제한다. 이번에 고른 Heavenly는 예쁘고 고풍스러운 간판과 이름, 그리고 레스토랑 리뷰 앱인 YELP의 후한 평가에, 가격까지 저렴하니 잠시 쉬어가는 식당으로는 제격이었다.
우리 4인 가족이 식당에 들어가면 항상 메뉴를 3개를 시켜서 먹고 남긴다. 넷 다 양이 많지 않아 2개를 시켜도 되지만, 여행지에선 적당히 잔반 남기는 맛도 있어야지.
우린 볕이 잘 드는 야외 테이블에 앉았고, 푹 자서 쌩쌩한 아이들은 비둘기를 쫓아다녔다. 난 친한 것도 아니고 안친한 것도 아닌 주변 신혼부부들을 구경했고 마음속으로 국적 맞추기 놀이를 했다. 분명 중국 커플처럼 보였는데 그들의 입에서 완벽한 서울말이 나왔을 땐, 가서 머리 좀 감고 오라고 한 마디 하고 싶어 졌다. 아님 나처럼 간지나는 MLB 모자를 좀 쓰던가.
음식이 나오고 와이프와 아이들이 몇 스푼 뜨는 모습을 바라보며, 난 K POP Star에서 퍼포먼스를 끝내고 심사평을 앞두고 있는 연애 지망생 같은 마음으로 가족들의 평가를 기다렸다. 그 때 지아가 말 대신 몸으로 평가를 해줬다. 엄지 척!
뒤이어 지우와 와이프도 맛있다고 난리다. 준비한 보람이 있구나. 이제 나도 한 번 먹어보고 맛을 평가해보자. 허기가 최고의 애피타이저라서 이렇게 반응이 좋은 게 아닐까 의심하며, 나도 3가지 음식을 다 먹어보니 정말 굿이었다. 기분이 업되어 있는 지아처럼 엄지 척!을 남발할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옆에서 알짱거리는 비둘기들에게 잔반을 남겨주기는 아까운 음식들이었다.
만족스러운 첫 번째 식사를 마치고, 와이키키의 메인 거리인 Kalakaua Ave를 산책했다. 칼라카우아 애버뉴, 참 산책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길이었다. 줄지어 늘어서 있는 명품 가게들이 우리에게 “안들어오고 그냥 지나갈 거냐, 거지야”라며 손짓하는 것 같았다.
우린 이번 여행에서는 쇼핑을 하지 않기로 했지만, 이런 결의는 지우 지아가 이제 싸우지도 않고 만화도 안 보겠다는 다짐 수준밖에 안 된다. 그나마 우리 부부는 여행자로서의 품격과 소양을 갖추고 있어, 이젠 명품 가게에 기웃거리며 몇 % DC하는지 알아보러 다니지도 않고, Sepora나 ABC Store에서 저렴하면 일단 사고 보는 행위들도 하지 않는다. 우린 쿨하게 갈 길을 갈 수 있다. 하지만 와이프에게도 쉽게 지나치기 힘든 곳이 있으니, 바로 Victoria’s Secret이다.
와이프는 두 아이를 데리고 Victoria가 비밀을 알려준다는 그곳으로 사라졌고, 난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속옷들이 널려있는 가게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가게 앞에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뜨거운 햇살에 온 몸을 골고루 살균하며, 선글라스를 끼고 동공의 위치를 숨긴 채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관찰하는 것도 나름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이번에도 Victoria의 비밀은 많은가 보다.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심심해서 카카오 택시를 불러봤다. 위치를 켜고 출발지는 “현재 위치”, 도착지는 “삼성동 도심공항타워”를 찍었다. 현재 나의 위치가 Kalakaua Ave의 H&M과 Victoria’s Secret 사이로 정확하게 잡힐 것으로는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Do not know location’이나, ‘not have a clue’ 정도의 영어는 나올 줄 알았건만, 성의 없게 ‘null’이라 표시된다. 정확한 위치가 잡히고 여기서 택시 타면 소요시간 27,000시간 정도로 뜨면 재미있었을 텐데.
잠시 후 엄마를 대신하여 지우 지아가 “아빠 지갑 줘”라 외치며 뛰어나왔다. 10불과 1불짜리로 새 지폐 백여 장이 들어있어서 반으로 접히지도 않는 두툼한 지갑을 꺼내 줬더니, 지우가 잽싸게 낚아채서 뒤로 안 돌아보고 뛰어들어갔다.
옆에서 나처럼 혼자 앉아 태양을 바라보며 살균을 하고 있던 아저씨가 이 장면을 보고 말을 걸어왔다. 내가 슬로베니아와 슬로바키아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그 나라 사람들은 축구 선수 몇 명 밖에 모르지만, 왠지 슬로베니아나 슬로바키아 출신일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슬로우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심지어 동공도 굴리지 않고 마네킹처럼 앉아있던 분이었다.
자기도 와이프가 저 가게에 들어가서 혼자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남자들은 항상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여자들에게 지갑만 강탈당하는 것이 Not good 하다고 했다. 난 영어 아주 잘하는 사람들이나 취할 수 있는 포즈로 'Yay~'하며 씨익 웃어줬다. 나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나 보다. 난 순간 동병상련을 영어로 표현하고 싶었는데 기억나지 않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Misery loves company”였다.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표현이다. 아무튼 그는 엄청 친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몇 마디 더 이어갔는데, 나도 뭔가 멋들어진 대답을 하고 싶어 그의 말을 집중해서 듣진 않고, 영어드립 타이밍만 찾고 있었다.
그래서 만든 나의 대답은, “저 지갑 가져가 봤자 소용없어. 돈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거든. 카드도 다 정지됐어. 조만간 가족들이 화난 표정으로 나올 거야.”
난 농담이었는데 이 사람은 애매한 표정으로 웃었다. 심지어 애잔한 눈빛마저 보냈다. 내가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드립을 쳐서 진짜라고 믿는 걸까. 이봐, 나도 나름 캡틴 아메리카 티셔츠와 MLB 모자를 쓰고 있는 와이키키 여행객인데 진짜 돈이 없을라고.
때마침 와이프와 아이들이 Victoria’s Secret의 알록달록한 쇼핑백을 들고 행복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난 슬로베니아 아저씨한테 고개를 까딱하며 “나 거지 아니지?”하는 눈웃음 지어주고 그 자리를 일어났다.
그리고 시간이 더 남아 Ross에 들렀다. 이번 여행은 장면 장면마다 준비물을 빠뜨리는 사태가 많이 발생했다. 이미 아이패드를 빠뜨렸다가 구사일생으로 가져왔는데, 추가로 셀카봉과 내 운동화를 집에 두고 왔다. 셀카봉이야 내 팔의 관절을 최대치로 늘려본다고 치더라도, 난 지금 와이키키 해안가에 구두를 신고 있다. 진정한 화이트칼라 멋쟁이가 아니겠는가.
난 구두를 계속 신고 다닐 수도 있지만 와이프가 그 꼴은 못 보겠는지, ROSS에서 운동화를 골라보라고 했다. 하지만 역시 미국 땅에서 내 사이즈를 찾긴 힘들었다. 9~11 사이즈에선 이쁜 신발들이 눈에 띄던데, 내 사이즈인 8 1/2 코너에선 웬만하면 그냥 하나 사자는 열린 마음으로 살펴봐도, 차라리 구두 신고 다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운동화들만 전시되어 있었다. 게다가 조리 슬리퍼는 하나 넣어왔다. 그것만 신고 다니면 되지 뭐. 물론 조리 슬리퍼만으로 여행을 하겠다는 생각은, 화산섬인 하와이를 띄엄띠엄 본 것이란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됐지만.
와이키키에서의 세 시간을 나름 알차게 보낸 후 우린 다시 호놀룰루 공항으로 돌아와서 마우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8시간 반을 왔는데, 40분 더 가는 것 쯤이야. 너무 짧은 비행이라 이륙하고 콜라 한 잔 하면 도착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 짧은 시간인데도 나와 지아는 꿀잠이 들었다.
드디어 도착한 마우이. 어느덧 해가 넘어갔다. 수화물을 다 찾고 나니 인간적으로 짐이 너무 많았다. 여기선 짐을 싣는 카트 하나를 사용하는데 5달러였다. 카트를 타고 놀아도 될 만큼 충분한 수량이 무료로 갖춰져 있는 인천공항이 그리웠다.
난 분명히 다 쓰고 방치되어 있는 카트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한 바퀴 뒤졌는데 전혀 없었다. 그 5불이 뭐라고 무려 구두까지 신고 공짜 카트 찾아 어슬렁거리다니. 그냥 기계에서 정상 결제하고 쓰자는 생각이 들던 찰나에 카트 하나를 끌고 기계에 넣으려는 사람을 만났다. 할인점처럼 카트를 기계에 넣는다고 다시 100원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난 그거 다 쓰신 거냐고 물으려다가, 너무 속보여서 에둘러 카트를 어떻게 구했는지 물었다. 눈치와 배려가 있는 사람이면 혹시 그냥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카트 뽑는 기계를 가리키며, 저기 5불짜리 지폐를 넣거나 크레딧 카드로 결제하고 사용하면 된다고 또박또박 친절히 알려주었다. 네네, 알겠습니다.
짐과 씨름하며 차를 찾으러 갔다. Dollar Rent A Car. 회사명이 좀 저렴했지만 이번엔 뭔가 미국미국스러운 차를 몰아보고 싶어서 중대형 SUV로 신청했다. 서류를 작성하는데 직원이 보험을 어떻게 할지 물어보았다. 난 우리가 예약한 금액이 보험 포함 가격인지 알았다. 어쩐지 너무 싸더라. 그래서 보험이 얼마인지 물어보았더니 60불이라고 했다. 뭐 그 정도야 우습지. 그런데 다시 대화를 하다 보니 하루에 60 달러라는 것이었다. 헉, 여기서 7일이나 렌트를 할 건데, 생돈 50만 원 정도 추가로 나갈 판이었다. 뭔가 속은 기분이 들면서, 끝을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몰려왔다. 아까 5불 아끼려고 카트 찾아다녔던 나인데, 420불을 더 써야 하다니.
그래서 난 작전타임을 부르고 와이프와 상의했다. 그리고 보험을 빼버리기로 했다. 이 대목은 “No, thant you, Sir” 따위의 영어가 아닌 고급 영어가 필요했다. 그래서 와이프에게 바통을 넘겼다. “쏼라쏼라, 보험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직원이 아주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무조건 보험을 하는 게 좋을 거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보험의 필요성과 없을 때의 리스크를 설명해준다. 그만, 그만, 누가 그걸 모르나. 20년 무사고에 좀 더 안전하게 운전하면 되지 뭐. “쏼라쏼라, 그래도 빼주세요.”
그랬더니 그 직원은 마우이를 완전 범죄의 소굴처럼 묘사하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명씩 차 유리창이 박살 나고 강도를 당하고 등등.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우이는 완전 알카트라즈 섬처럼 범죄자로 득실거리는 곳인 듯했다. 그리고 “더구나 넌 지금 좋은 차를 렌트하기 때문에 이런 차는 무조건 사고가 나. 네 차 유리는 곧 박살 나. 그러면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 너 어쩌려고 그래”라는 톤으로 강하게 보험을 하라고 밀어붙였다.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내게 종신보험도 하나 가입하라고 할 태세다.
그래, 우리가 졌다. 보험 포함해라. 덴장.
차는 Nissan Armada, 8인용 8기통 5600cc, 내가 원하던 사이즈의 차였다. 드림카 지바겐이나 Hummer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능하면 픽업트럭 정도는 몰아보고 싶지만, 애들이 편한 차를 골라야 하니 트럭이 아닐 바에야 이런 사이즈와 무게감을 원했다. 다만 또 Nissan을 몰아야 하는 것이 좀 아쉽기는 했다.
첫 목적지로는 지난번과 동일하게 Costco로 향했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첫 번째 장을 보면서 물 한 박스, 사과주스 한 박스, 포도, 스팸, 안심 두 덩어리를 샀다. 목요일 밤인데 Costco에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 신기하여 구석구석 좀 더 구경을 다니고 싶었지만, 이미 우린 지칠 대로 지쳐 빨리 숙소에 가서 이 긴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어두운 고속도로를 질주하여 숙소로 갔다. 우리가 7박을 머물 곳은 Maui 남부인 Kihei와 Wailea 지역 사이에 위치한 Kamaole Sands였다. VRBO.com 사이트를 통해서 예약한 하루 170불짜리 콘도였는데, 입구를 찾기도 어려웠고 우리 주차 공간 365번과 콘도 건물을 찾는데도 한참을 헤맸다. 그리고 도착해서 보니 우리 집은 3층이었다. 이민 가는 수준의 짐들과 Costco에서 장 봐온 물 한 박스, 사과 주스 한 박스 등등이 더해져 난 3층까지 짐만 네 번에 걸쳐 나눠 옮긴 후에야 비로소 집을 둘러볼 수 있었다.
와우! 우리 숙소는 기대 이상 훌륭했다. 이게 정말 하루 170불짜리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깨끗하고 널찍한 공간에 인테리어와 소품들도 깔끔했다. 반갑다, Kamaole Sands.
그렇게 탈진 수준으로 힘쓰는 일을 다 끝내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니 불고기, 계란, 새우, 젓갈, 김치, 김, 밥이 준비되어 있다. 오 마이 갓, 한국에서도 이런 반찬 가지 수 드문데, 도대체 저 음식들이 전부 어디에 들어있었단 말인가.
이렇게 길었던 첫째 날이 저물었다.
난 인천, 오하우, 마우이를 거치며 새하얗게 체력을 불태웠건만, 촌스러운 이내 몸은 또 시차 적응을 못하고 헤매고 있다. 새벽에 자다 깨니 창문 밖에서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고 있다. 저 녀석들도 어디서 날아왔길래 나처럼 시차 적응 못하고 이 한 밤중에 울어대는 걸까.
잘해보자, Ma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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