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하와이 : Prologue

by 손창우
2016.09.19


2016년 9월 19일은 지극히 평범한 날이다. 기념일도 아니고 24절기 중 하루도 아니고, 그저 일 년 중 262번째 하루에 불과하다. 하지만 올해 달력에서 이 날을 찾아보면, 2016년 중 가장 슬픈 하루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9월 19일은 공식적으로 5일, 휴가를 붙여 쓴 사람들에겐 9일간의 황금 추석 연휴가 끝난 후 맞이하는 월요일이었다. 작년 이 날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올해 모든 사람들이 제발 오지 않기만을 바라는 하루를 배정받게 된 것일까.


난 지금 2016년 9월 19일을 24시간으로 쪼개었을 때 특히 더 슬픔이 극대화되는 아침 출근길, 그것도 만원 지하철 안이다. 현재 이 곳 사람들의 분위기를 중계하자면, 마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어쩔 수 없이 설국열차 꼬리칸에 탑승해서 양갱만 먹고 목숨을 연명하는 하층민들처럼 비통해 보였다. 올드보이로 묘사할까 하다가, 올드보이의 군만두가 양갱보단 맛있기에, 오늘 지하철 속 사람들은 군만두를 먹는 즐거움조차 찾아보기 힘든 얼굴들이었다. 잠시 스마트폰을 덮고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했다. 참 슬픈 표정들도 다양하구나.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아, 괜히 봤다.


그래도 난 다를 줄 알았는데, 나 역시 표정이 썩어있구나. 눈썹 꼬리가 처져서 안 그래도 심심하고 연약해 보이는데, 입꼬리까지 내린 채 무표정하게 서 있으니 참 의욕을 저하시키는 얼굴이다. 내가 지금 다른 사람들 얼굴 지적질할 때가 아니었구나. 이제 직장생활 14년 차로 월요병은 사라진 지 오래된 짬밥이지만, 이런 내게도 추석 연휴 후의 출근은 벗어나고 싶은 현실이구나. 하지만 내겐 입꼬리를 끌어올릴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으니…


"""2nd 하와이 여행, D-30"""


올 1월 말의 하와이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우린 두 번째 하와이 여행을 계획했다. 그동안 여행 일정만 수십 번 바뀌었다. 최초 계획은 2017년 여름휴가 기간에 가려고 했는데, 그때까지 기다리기 힘들어 내년 초로 앞당겼다. 그 이후, 내가 몸담고 있는 업계의 공식 휴가 기간과 다름없는 올 12월 말에 다녀올까도 생각했지만,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성수기 가격에 움찔하여 다른 일정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처제 가족이 10월 초에 하와이 여행을 간다고 해서, 그때 맞춰서 함께 가는 것도 괜찮겠다며 10월 카드가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지우 학교 일정, 와이프의 출장 일정, 저가 티켓 예매 가능 여부 등등을 모두 고려한 끝에 결국 2016년 10월 20일부터 10월 31일까지의 10박 12일 일정으로 최종 확정했다.


일정뿐만 아니라 하와이 내 여행 장소 및 숙소에 대한 변화도 많았다. 지난번엔 오하우 섬만 갔으니 이번에는 마우이나 빅아일랜드 중 한 곳으로 갈지, 섬 두 개를 섞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마음에 드는 숙소를 발견하면 거기에 맞춰 일정을 조정하기도 다반사였다.


그러다 제대로 된 하와이 여행은 카우아이 섬이라는 추천도 많이 받아서, 결국 섬 네 개 중 두 개를 고르는 4C2=4!/2!(4-2)! 만큼 많은 경우의 수를 검토했다. 아, 섬의 순서도 생각해야 해서 저 수학식은 아닌 것 같은데, 맞나? 에이, 모르겠다. 원래 문과생들은 학기 초 배우는 집합, 행렬 부분까지는 의욕적으로 수학을 공부해서 기가 막히게 잘하지만, 학기말로 갈수록 수포자들이 되어 삼각함수, 확률 부분은 약하다.


이렇게 일주일 단위로 마음 가는 곳이 바뀌다가 결국 마우이 7박, 오하우 3박으로 최종 결정했다. 아무래도 빅아일랜드는 섬 자체가 크다 보니, 차를 타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기엔 터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솔직히 아이들 핑계를 대곤 있지만, 장거리 운전을 싫어하는 내 취향도 반영된 결과였다. 그리고 하와이를 여러 번 다녀와 본 후배 정우가 “행님, 전 개인적으로 마우이가 제일 좋던데요”라고 무심코 했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아서, 마우이 섬을 이번 여행의 메인으로 결정했다.


일정 확정 후 마지막 결제 전에 항공편과 숙소도 여러 번 변경되었다. 아시아나 가족 마일리지도 모아보고 대한항공 가족 마일리지도 모아봤다. 하나로 몰아타지 않고 둘 다 어설프게 많이 탔구나. 모든 조합을 다 검토해 본 끝에, 이번 역시 국적기가 아닌 Hawaiian Airline을 타고 Early Bird 예약을 통해 가장 저렴한 옵션으로 다녀오기로 했다. 숙소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VRBO + 호텔 조합으로 정했고, 마우이에서의 7박은 VRBO 사이트를 통해 콘도를 예약했고, 오하우에서의 3박은 가성비 좋은 Embassy Suites by Hilton Waikiki Beach Walk로 예약했다.


결제 끝, 이제 퇴로는 없다.



2016.10.01


드디어 10월이 시작되었다. 안믿겠지만 난 그 동안 여행 준비를 정말 많이 했다. 아는 만큼 즐길 수 있기에, 지우에게 하와이에 대한 강의도 해줬다. 아이패드로 하와이 지도를 띄워 놓고 “하와이에는 카우아이, 오하우, 마우이, 빅아일랜드 4개의 큰 섬이 있어. 여기가 지난번에 다녀온 오하우, 여기가 제일 크지? 그래서 이름이 빅아일랜드, 빅이 크다고 아일랜드가 섬이야. 그 중간에 있는 섬이 마우이, 이번엔 여기에 갈 거야. 그리고 제일 위가 카우아이야. 큰 섬이 몇 개가 있다고? 하나씩 이름을 외워봐. 카마우마가 아니라 카우아이야”


이렇게 꼰대 아빠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아이패드 화면에 대고 손가락을 스윽스윽 펼쳐 지도 배율을 높여서 오하우 지도만 크게 띄우니, 역시 신기해한다. 그리고 지난번 쓴 하와이 책을 펼쳐 1일 차부터 내용을 다시 따라가면서 지도에서 설명해줬다. “우리 숙소가 있던 Wainamalo 지역이 여기야. 공항에서 이 길을 따라 이렇게 갔어. 그리고 이 길을 타고 쭈욱 올라가 보면 여기가 비밀 바닷가야.” 다시 배율을 스윽스윽 높여 로드뷰로 보여줬더니, 여기 맞다며 좋아한다. 이렇게 지우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재미있게 잘 듣다가, 5일 차가 넘어가니 한 마디 한다.


“아빠, 이제 좀 지겨워”


그래, 초등학교 2학년의 집중력과 학습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그래서 지난번 여행에 대한 복습은 끝내고 이제 본격적인 이번 여행 선행학습을 시작했다.


이번 여행의 11일간의 스케줄을 정리해놓은 회심의 엑셀을 열었다. 엄청난 리서치의 결과로 1일 차부터 11일 차까지 스케줄을 빼곡하게 적어놨다. 블랙락 스노클링, 할레이칼라 일출, Road to Hana, 라하이나 산책, The outlet of Maui, Paia 방문 등과 같이 굵직굵직한 일정들부터 Bubba Gump, Cheeseburger in paradise, Mama’s fish house 등과 같이 식사를 할 곳들, 그리고 렌터카, 숙소, 마트, 디저트 가게 등의 주소와 다녀온 후기 링크까지 디테일이 살아있는 자료였다. 칭찬받으려고 만든건 아니지만 칭찬받아 마땅한 자료인데, 지우는 엑셀이란걸 처음봐서 신기할 뿐이다.


복습에 다소 지겨워했던 지우도 다가올 일정에 대해선 큰 관심을 가지며 다시 눈빛이 살아났다. 해당 스케줄에 맞는 사진들을 보여줄 때마다 탄성까지 지르며 진도를 따라왔다. 대부분의 일정은 지우가 이해했지만, 매주 일요일 오전에만 열리는 Open Market에 대한 설명을 할 땐 감을 잡지 못했다. 그래서 교회 바자회와 비슷한 장터가 열린다고 해줬더니, 완전 재미있겠다며 눈에서 하트가 나왔다. 물론 기대치를 높이기 위해, 지우가 교회 바자회하면 가장 먼저 떠올렸을 오뎅, 떡볶이, 파전, 솜사탕을 팔진 않는다는 말은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새벽에 일어나서 할레이칼라라는 산으로 가서, 구름 위에 올라 일출을 구경할 것이라는 대목에서는, 겁 많은 지우가 다시 움찔했다. 구름 밑으로 떨어지면 어떻게 하냐는 등 초등학생다운 걱정들을 늘어놓는다. 지우는 이런 대목에서 오해를 풀어주지 않으면, 진짜 겁을 먹고 절대 안 갈 거라며 버틸 수도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할레아칼라 일출 사진들을 보여줬다. 머털도사처럼 구름 위를 날아서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잭과 콩나물’ 책의 잭처럼 덩굴을 타고 구름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차를 타고 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그 밑으로 낮게 떠 있는 구름들이 보이고, 구름 위로 해가 두둥실 떠오른다는 것을 사진을 보며 설명을 해줬다. 그제야 “우아~” 늦은 감탄사가 나온다. 모든 설명이 끝난 후엔 할레아칼라가 지우가 마우이에서 가장 기대하는 코스가 되어 있었다.


7일간의 마우이 일정 브리핑을 끝내고, 오하우 후반 3일간의 일정으로 넘어갔다. 지우는 이미 다녀와서 익숙한 오하우의 비밀 바닷가, 하나우마베이, 훌리훌리치킨 등 일정에 큰 반응을 했다. “나 여기 꼭 갈래”를 연발하며 너무너무 기대하는 모습을 보니 이 맛에 여행을 가는구나, 뿌듯함이 밀려왔다.


마지막으로 “하와이 큰 섬 네 개 이름이 뭐라고?”라는 첫 질문으로 돌아가니 다시 카마우마라고 했다. 카마우마가 아니라 카우아이라니까.


길었던 이번 여행에 대한 선행 학습을 마쳤다 옆에서 혼자 놀고 있던 지아는 하와이 건 제주도건 집 앞 이마트 건 어디로 가는지는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하와이라고 해도 감도 없다. “우리 호텔에서 잘 꺼야?” 이 질문만 반복해서 하고, 그렇다고 하자 좋아서 침대위를 방방 뛰었다.


난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이미 마우이를 한 번 다녀온 듯했다. 매일 밤 잠자리에 누우면 스마트폰으로 한 시간 정도는 마우이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녔다. 워낙 가고 싶은 곳들이 많아 준비 과정이 즐거웠다. 다만 그 여파로 요즘 눈이 쉽게 피로해진다. 밤마다 스마트폰과 아이패드를 너무 많이 봤나. 그래서 깨끗한 하늘, 바다, 산을 보며 눈을 좀 쉬어줘야 한다. 의사 라이선스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6개월에 열흘 정도씩은 대자연을 보지 않으면 눈이 실명할지도 모른다는 진단서를 써주면 좋겠다.


이렇게 온라인상에서지만 난 이미 마우이를 다녀왔는데, 와이프는 이번 여행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고 했다. 물론 아무런 정보도 없이 찾아갔다가, 도착해서 엄청나게 만족했던 괌의 Ritidian Beach처럼 무작정 떠나서 느끼는 것도 여행의 매력 중 하나다. 그래서 와이프와 아이들에게 그런 Ritidian Beach의 놀라움을 안겨 주기 위해, 내가 미리 공부하는 역할을 하기로 했다. 사실 난 영화도 재미있으면 꼭 한 번 더 챙겨서 보고, 두 번째 보면서 미처 보지 못했던 디테일을 챙기는 것에 더 큰 재미를 느끼는 스타일이라 이 역할이 더 맞는 듯하다.


리서치도 하면 할수록 요령이 생겼다. 매번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우리들의 여행 스타일에 맞춰 정보의 소스를 달리 가져가야 한다. 예전엔 블로그 글들을 많이 활용했는데 마우이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하와이 여행의 대부분이 오하우에 집중되다 보니 오하우에 대한 정보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데 반해, 마우이는 당일치기 혹은 길어야 2박 3일 정도로 짧게 들리는 여행지다 보니 내용들이 거의 비슷했다. 할레아칼라 일출, Road to Hana, 블랙락 스노클링, 부바 검프, 쿨라 로지, Mama’s fish house, 라하이나 거리, the outlet of Maui에 대한 포스팅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지난번 여행에서 블로거들의 추천지와 우리 가족의 선호지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 이번엔 거의 참고하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대세 인스타그램을 활용했다. 역시 정보의 보고 인스타그램은 최고의 여행 가이드였다. 사실 대부분의 블로거들은 2535 나이 때의 활동적인 여자분들이라 “쵝오” “꺄악” “날씨 정말 대박” “내 생애 최고의 요리, 숨도 안 쉬고 먹어 치운” “뱃살 어쩔” “너무 맛있어서 폭식, 도대체 다이어트는 언제?” “이건 꼭 사야 해, 프라다 가방”등과 같은 포스팅으로 피로감이 쌓이고 있었다. 반면 인스타그램은 주저리주저리 설명 없이 사진만 보면 된다. 맘에 드는 풍경이나 맛있어 보이는 음식 사진이 있으면 해시태그로 장소만 확인하면 된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올리는 블로그와는 달리 인스타그램은 전 세계의 남녀노소가 좀 더 다양하게 의견을 올리다 보니 좀 더 객관적인 정보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할레아칼라 일출을 보고 내려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Kula Lodge라는 식당에 들린다. 허기가 최고의 애피타이저라고, 새벽에 일어나 두 시간 이상 운전해서 일출을 보고 내려왔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겠는가. 내려오는 길에 무조건 아침을 해결해야 하는데, 내려오다 보면 이 식당밖에 없다. 경쟁이 없으면 발전이 없지.


예상대로 Kula Lodge에 대한 블로거들의 반응은 “쵝오” “팬케익에 시럽 듬뿍, 뱃살 어쩔” “커피 한 잔에 피로가 싹~” 등의 내용들이었는데, 몇몇 인스타그램 포스팅을 보니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 또 몇몇은 얼짱 각도로 뽀샵 처리된 음식 사진이 아닌, 정말 대학 구내식당에서 파는 3,000원짜리 스테이크처럼 보이는 사실적인 사진들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러면 난 엑셀에서 Kula Lodge 셀을 과감히 삭제하고 다시 지도를 편다. 할레아칼라에서 내려와서 가장 가까운 도시가 Paia 지역임을 확인하고, 인스타그램에서 #Paia #Paiafood #paiarestaurant 등을 검색해보면 많은 음식 사진들이 뜬다. 그중 식당 간판이 예쁜 곳 ‘café mambo’ 사진을 발견하고, Kula Lodge가 지워진 셀에 ‘Café mambo’를 추가하였다.


이렇게 엑셀의 한 셀 한 셀은 수많은 리서치의 결과를 바탕으로, 전 세계인들의 평균 의견들을 존중하고 우리 가족의 여행 스타일을 반영하며 탄탄하게 채워나갔다.



인스타그램에서 캡쳐해놓은 사진들 일부



2016.10. 10 (D-10)



여행 열흘 전. 와이프는 싱가포르 출장을 아주 평범하게 떠났다. 지난달 보름 짜리 브라질 출장 다녀온 후, 다음 주 하와이 여행 가기 전에 중간에 낀 4박 5일짜리에 겨우 6시간이면 도착하는 싱가포르 출장은 안중에도 없나 보다. 내가 지방으로 출장 갈 때도 이것보단 더 준비했던 것 같은데, 마치 "오늘 회식 때문에 좀 늦어"하는 듯한 뉘앙스로 "오늘 싱가포르 갔다가 금요일에 올게"하며 떠났다.


이로써 여행 전 주의 아이들 심성 관리, 컨디션 관리, 정신교육, 기대감 고취, 기타 준비 등이 나의 몫이 되었다. 지난 몇 개월간 폭염에 길들여져 있던 신체가 드디어 10월부터 기온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니, 어색하다며 콧물을 내놓기 시작했다.


여행을 앞두고 감기라도 걸리면 골치 아프다. 밤마다 눈 침침해질 때까지 스마트폰 보면서 만든 일정표도 한 명이라도 감기에 걸리면 다시 만들어야 한다. 시간대 별로 빼곡하게 정리된 내용들 다 빼고 "호텔 내 휴식"으로 심플하게 대체해야 한다. 그래서 자기 전에 아이들에게 이불은 꼭 덮고 자야 하고, 감기 걸리면 하와이 못 갈 수도 있다고 겁을 주었지만, 아이들은 불과 며칠 전까지도 덥다며 이불을 걷어차며 자던 관성이 남아 있었다. 자다가 습관처럼 옷을 들어 올려 배를 훌러덩 까서 내놓고 있고, 이불 따위는 꺼지라며 옆으로 던져 버리고 잤다. 난 두어 시간마다 눈을 떠서 옷을 내리고 이불을 덮어 줬다. 우리 제발 감기에 걸리지 말자.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처음으로 계를 했다. 성준이, 성철이 등등과 하루에 100원씩 3개월을 모았다. 떡볶이와 오락 한 판이 50원 하던 시절이니, 우리는 제법 큰 유혹을 뿌리치며 하루 100원씩 모았다. 종이에 이름이랑 날짜를 적어놓고 동그라미 치면서 관리를 했고, 돈이 밀리면 빨간 돼지저금통의 구멍으로 핀셋을 쑤셔넣고 동전을 꺼내서 연체한 돈을 갚아나갔다. 그래도 하교 때마다 떡볶이를 먹긴 먹은걸 보면, 나의 하루 용돈이 200-300원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위풍당당 하늘로 솟구치는 학이 그려져 있는 500원짜리 동전으로 용돈을 받던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기억이 나는 것을 봐선, 하루 용돈이 500원은 확실히 넘진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세 달이 넘어 만원씩 정도 모으면, 각자 집에서 5000원씩 더 찬조를 받아서 최종금액 일인당 15,000원을 가지고 우린 '부곡하와이'로 떠났다. 당시 '부곡하와이'는 엄청난 수영장과 놀이동산이 함께 붙어 있어서 부산경남지역 아이들에겐 꿈의 공간이었다.


결국 커서도, 난 매달 월급 모아 하와이로 가구나.


이번 여행의 도우미로 얼마 전부터 액션캠 고프로를 하나 살까 고민했다. 사진으로도 충분하지만 역시 동영상이 시간이 흐른 후 꺼내보는 재미가 훨씬 크다. 하지만 고프로는 가격이 30-40만 원대로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샤오미의 저가 액션캠을 봤더니 나름 괜찮았지만 액정이 없었다. 찍은걸 그 자리에서 확인해보는 재미가 있어야 되는데 액정이 없다는 것을 사긴 싫었다.


그때 나와 함께 고프로를 고민하고 있던 JTBC 카메라 전문가 한경훈이 톡을 보내왔다.

“중국의 elephone ELE Explorer 4K 액션캠. 가격은 겨우 54불.”


말도 안 되는 가격과 elephone이란 회사명만 봤을 땐 뭔가 elephant와 유사한 것이, 조잡한 싸구려 장난감 같은 제품이 아닐까 생각했건만, 나름 괜찮은 디자인에 4K 촬영 가능, 방수 케이스를 통한 수중 촬영도 가능하고 심지어 액정도 있다. 이건 뭐지? 샤오미도 4K면 279불이었는데, 이 무슨 오타가 의심 가는 가격이란 말인가. 역시 대륙은 실수를 화끈하게 하구나.


긴가민가하는 마음으로 주문을 했는데, DHL 무료배송임에도 불구하고 5 영업일 만에 도착했다. 540불짜리 전자제품에나 어울리는 깔끔한 박스에 담겨 있다. 방수 케이스를 입고 본체가 나왔고, 그 옆 박스에는 무려 17개의 액세서리가 들어 있었다. 저 작은 종이 박스에서 17개의 액세서리가 나오는 것은, 마치 티코에서 성인 남자 10명이 나온 것만큼 충격적이었다. 액세서리만 해도 54불이 넘을 것 같은데, 이 회사는 도대체 원가를 어떻게 맞춘 거지?


액션캠 하나 더 사서 경훈이에게 선물하며, 대신 Sony 카메라를 빌렸다. 지난번 폴더폰으로 찍은 사진들의 화질 테러를 겪은 후, 하와이를 담기 위해선 DSLR 카메라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참존 선크림 두 개, 국제면허증, 엑셀표, 액션캠, DSLR까지. 이제 내가 챙길 건 다 끝낸 것 같다. 남은 기간, 컨디션 조절만 잘 하자.


비장의 스케줄표



2016.10. 17 (D-3)



마지막으로 날씨를 체크했다. 지난번 여행에서는 11일간 계속 화창한 날씨였기 때문에 날씨가 전혀 변수가 아니었지만, Road to Hana, Haleakala Sunrise, Hanauma Bay 등의 일정은 기왕이면 더 날씨 좋은 날 가고 싶었다. 날씨 체크. 헉, 근데 이게 뭐지? 구글에서 찾은 weather.com 홈페이지에서 Maui이의 10 day weather forecast를 보면, 우리가 머무르는 내내 비가 온다고 한다. 어이가 없네.


다른 일기예보 사이트도 찾았더니 Sunny, Windy, Cloudy, 30% chance of Rain 등이 골고루 퍼져 있다. 여기도 물론 비, 바람, 구름 예보가 있었지만 주구장창 비가 온다고는 하지 않았다. 이게 좀 더 합리적인 것 같다. 아니, 이 예보를 믿고 싶었다. 구글 날씨 조회 따위는 잊자. 마치 구글 번역기에서 “옛날에 백조 한 마리가 살았습니다.”를 넣고 한영 번역을 돌리면 “Once upon a time there lived 100,000,000,000,001”이라고 나오는 수준의 오류투성이라 믿고 싶다. 이런 구글이 만든 알파고에게 이세돌은 왜 진 것이여.


요즘 나의 화두는 희로애락 감정의 부활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특별히 기쁘거나 노엽거나 슬프거나 즐거운 일이 줄어든다. 범위를 사랑, 미움, 욕심까지 넓힌 희로애락 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측면에서 보더라도, 난 죽을 죄를 지은 사람도 크게 미운 마음이 들지도 않고, 언젠가부터 돈, 물질, 경쟁, 인기에 대한 욕심도 없어지고 있다. 사람은 희로애락을 느끼는 동물로 태어났는데, 이런 감정들을 잃은 채 살아가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도 어긋난 일인 것 같다. 그렇게 감정을 잃은 아재가 되긴 싫다. 이 시점에서 나의 희로애락의 감정을 증폭시키고 싶다. 그래서 내가 일상에서부터 조금씩 하려는 노력은 글쓰기, 음악 듣기, 여행하기 등이다.


오늘 출근길에 음악을 틀었다. 트렌디하게 보이기 위해 순위 차트의 1~20위까지를 반복해서 듣는데, 가끔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떼창에 귀가 피곤해진다. 그러면 이문세, 이승환, 박정현, 전람회, 김연우 등의 음악을 랜덤으로 틀어놓는다. 참 아재스러운 가수 선택이지만 귀가 정화되는 걸 어쩌랴. 이들의 목소리는 뱅앤올룹슨이나 닥터드레 헤드폰을 굳이 쓰지 않더라도, 갤럭시 이어폰만으로도 몸에 전율이 올만큼 감동이 전해온다. 그리고 이들의 웬만한 노래는 웅얼거리며 따라 부를 수 있다는 매력도 있다. 오늘은 이승철을 틀었다. 청승맞게 이승철의 ‘그 사람’를 따라 부르고 있었는데,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강변북로 출근길에서 눈물이라. 희로애락의 애(哀)가 날 문득 찾아온 것이다. 난 이런 감정을 기다렸다. 여행 준비가 제대로 되어 가구나.


지난 여행에서 몰래 글을 썼다. 애들과 와이프가 방에 자러 들어가면, 거실에서 사진 정리하며 이것저것 써둔 것을 돌아와서 책으로 만들어서 와이프의 생일 선물로 주었다. 이번에도 물론 기록을 해두고 책으로 만들 생각이다. 다만 이번에는 이미 패가 다 오픈되어 있어서 조금 더 부담이 된다. 지난번엔 막 써도 내용보다는 책 자체가 서프라이즈 선물이었기 때문에 재미있게 막 썼다. 그리고 중간 중간 나의 예전 이야기들도 적당히 섞어 가며 분량을 채웠는데, 지난 몇 개월 동안 난 Brunch라는 글쓰기 플랫폼에 나의 서울생활, 부산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을 상당부분 글로 써버린 상태라, 소재의 고갈 문제도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좀 아껴둘걸 그랬나?


마지막으로 책에 대한 가족들의 기대가 컸다. 지우부터 시작해서 가족들이 또 한 번의 책을 잔뜩 기대하고 있다 보니, 조금 더 잘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부담이 조금 더 생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부담보다는, 새로운 글 소재거리들을 만날 생각에 설렘이 더 크다.


이번 여행에서는 어떤 에피소드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두둥.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https://brunch.co.kr/@boxerstyle/55

https://brunch.co.kr/@boxerstyle/56

https://brunch.co.kr/@boxerstyle/57

https://brunch.co.kr/@boxerstyle/58

https://brunch.co.kr/@boxerstyle/59

https://brunch.co.kr/@boxerstyle/60

https://brunch.co.kr/@boxerstyle/61

https://brunch.co.kr/@boxerstyle/62

https://brunch.co.kr/@boxerstyle/63

https://brunch.co.kr/@boxerstyle/64

https://brunch.co.kr/@boxerstyle/65

https://brunch.co.kr/@boxerstyle/66

https://brunch.co.kr/@boxerstyle/67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