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하와이 : 5일 차

2016. 10. 24 월요일

by 손창우


할레아칼라와 Hana 사이에 낀 휴식 같은 하루.


이런 날은 한없이 여유로워야 한다. 이런 날은 어설프게 움직이는 것보단 대놓고 늘어지는 것을 선호한다. 창문 밖을 보니 백로 혹은 왜가리 정도로 보이는 새들이 한적하게 걸어 다니고 있다. 난 어릴 때부터 동물을 좋아했는데, 예전에는 싸움도 잘하고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도 역임한 호랑이나, 구덕산 꼭대기에서 날개를 쫘악 펼치고 카리스마 넘치게 하늘에 떠 있던 독수리를 좋아했다. 하지만 커 가면서 내가 가장 부러워하기 시작한 동물은 신스틸러 나무늘보였다. 최고속도가 자그마치 시속 200미터, 하루에 나뭇잎 세 장만 먹고 대변은 일주일에 한 번만 보며, 하루 18시간 이상 자는 나무늘보의 삶이 부러웠다. 오늘 오전은 그렇게도 꿈꾸던 나무늘보가 될 수 있었다. 여기서 채팅을 한다면 닉네임은 '하와이 나무늘보'로 하리라.



84.JPG 여유로운 오전


_DSC1292.JPG 창문 밖 사진도 좀 찍고



여유로운 아침을 먹고 나서, 나무늘보 컨셉을 버리고 다시 한번 바다에 도전하기로 했다. 지난번 블랙락에서 파도 맞고 레슬링 당한 이후 지우는 여전히 파도를 불편해했고, 나도 애 둘 데리고 너무 힘이 들 것 같아서, 어떤 바다를 고를 것인가가 오늘의 핵심이었다. 난 Maui의 모든 Beach들을 다 검색했다. 모래사장이 드넓거나 바다 빛이 에메랄드색이거나 거북이들이나 인어공주가 함께 헤엄쳐줄 수 있는 바다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오로지 파도가 가장 적을 것으로 보이는 바다를 찾다가 눈에 딱 들어온 곳이 있었다.


Kalepolepo Beach Park.


이 곳은 Maui 바다를 소개하는 사이트에서 거의 가장 마지막인 20번째에 소개될 정도로 인지도가 낮고 현지인들도 별로 찾지 않는 곳이었다. 사진상으로 볼 땐 부산의 태종대 같이 심심해 보이기까지 한 해변이었다. 하지만 이 곳을 Maui의 기라성 같은 바닷가들 모두 제치며 선택한 이유는 파도를 막아주는 독특한 환경 때문이었다. 예전에 이 곳은 잡아온 물고기들을 풀어놓았던 fish pond였다고 한다. 물고기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돌담을 쌓아놓다 보니, 파도는 돌담 위에 부서지고 pond 안쪽 바다는 잔잔하기 그지없다. 위치도 콘도에서 10분 거리였다.


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것은, 모래사장은 좁고 별 볼일 없지만 뒤에 공원이 붙어 있었다. 지난번 오하우 여행 때도 유명한 Kailua Beach나 Wainamalo Beach 보다, 와이키키를 찾다가 주차비를 아끼려고 우연히 들렀던 Queen’ spark beach에서 애들이 제일 잘 놀았다. 수영도 하고 공원에서 새를 잡으러 뛰어다니고, 나무 그늘에서 밥도 편하게 먹을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이 곳이 제2의 Queen’s park beach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kale.jpg 위성지도로 선명하게 보이는 Fish Pond Footprint


20161024_122942.jpg 뭔가 3류 영화 제목같다. <붉은 꽃과 도마뱀>



우린 늦은 아침을 먹은 후 가벼운 마음으로 Kalepolepo Beach Park로 출발했다. 다행히 공용 주차장도 마련되어 있었다. 위성사진을 본 후로는 바다에 대한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도착해서 보니 Queen’s Park Beach보다는 풍경이 훨씬 예뻤다. 마우이 북서쪽의 푸우쿨쿠이(Pu’u Kulkui) 산이 보이고, 조금 멀리 하와이의 주요 8개 섬 중 하나인 라나이 섬도 보였다.



20161024_13415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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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4_134400.jpg Kalepolepo Beach Park 풍경들



저 멀리 보이는 라나이 섬은 신비로웠다. 마우이에서는 불과 14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카메라의 줌을 당기면 조금 더 선명하게 섬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전혀 사람의 손이 스쳐간 흔적이 보이질 않았다.


라나이 섬에 대해서 찾아보니, 인구는 약 3천 명인데 8백 명이 포시즌스 호텔 직원이라는 것이 이채로웠다. 마치 과거에 포항 사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포항제철 관련 일을 하는 것과 유사했다. 하긴 나도 대학교 오리엔테이션 때 처음 보는 서울 친구에게 부산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럼 너희 아빠 어부야?"라는 질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름 부산에서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먹고 엘레쎄 농구화 신고 다니던 사람인데, 부산 사람은 모두 어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때 그 친구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런 질문은 라나이 섬에 살다가 마우이 대학에 온 사람에게나 할만한 거라고. "너희 아빠 포시즌스 직원이야?"


라나이의 집들은 대부분 목조 건물이라 조용한 유럽의 시골 마을 분위기가 나며, 섬 전체에 주유소 1개, 식당 몇 개, 경찰서 하나가 전부고 거리에 신호등도 하나 없는 곳이라고 한다. 이렇게 묘한 매력을 가진 섬이다 보니 빌 게이츠가 결혼을 할 때 섬 전체를 빌린 것으로 외지인들에게 유명해졌는데, 한때는 이 섬이 세계 최대 파인애플 생산지였기 때문에 파인애플 섬이라는 별명이 붙었었다고 한다.


파인애플 섬답게, 이 섬은 얼마 전까지 Dole사의 회장님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적자에 허덕이다 세계 6~7위의 부자인 Oracle의 래리 페이지 회장이 섬의 98%를 Dole사 회장으로부터 샀다고 한다. 섬 매입 가격은 대략 5~6천억 정도로 알려져 있다. 시가총액 5천억짜리 회사보다 5천억짜리 섬의 주인이 더 멋지지 않은가. 지분 전체는 아니더라도 펀드 하나 만들어서 하와이 주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나머지 지분 2%라도 100억 원에 사 오고 싶다.


조용한 시골 마우이에 앉아서 더 시골인 라나이 섬을 바라보면서 미세먼지 가득한 삼성동과 테헤란로를 잠시 떠올렸다가 기분이 급 다운되는 것을 느낀 후, 빨리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어 졌다. 깨알 같은 PPL로, 백탁 없는 참존 선크림 알바트로스를 온몸에 덕지덕지 바른 후 본격적인 수영에 나섰다. 생각보다 주변 풍경이 예뻤고, 파도는 바람에 찰랑거리는 수준으로 호수 같았다. Kalepolepo Beach Park는 예상대로 파도를 기준으로만 보면 완벽히 찾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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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DSC114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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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딩보드를 타는 지우



파도는 완벽했지만 또 다른 변수 바람을 간과했다. 모자를 날려버릴 만큼 바람이 너무 강했다. 파도는 없었지만 바람의 힘만으로 잔잔한 호수를 뒤집어 놓았다. 그나마 물 안에 들어가 있으면 괜찮았는데 물 밖으로 고개만 빼면 바람이 귀싸대기를 때리는 듯했다. 차라리 물 안에 있던 지우와 난 괜찮았는데, 모래사장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즐겨야 할 와이프와 지아는 강풍 속에서 의자에 앉아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_DSC1152.JPG 바다만 보면 돌진하는 지우


_DSC1154.JPG 바다에 관심없는 지아



그래도 바다까지 갔으니 바람과 맞서 싸우며 제법 놀긴 했다. 지우를 패딩 보드에 태우고 다녔고, 액션 캠으로 바닷속을 처음 찍어 보았다. 하지만 호수 바다엔 물고기나 산호도 없이 모래 밖이라 수경을 끼고 바다 안을 들여다본 지우가 화들짝 놀래서 고개를 뺐다. 누렇기만 한 땅이 무섭다고 했다. 내가 봐도 바람 때문에 물속이 탁해져 뭔가 음침한 것이, 큰빗이끼벌레 따위가 나올듯한 바닥이었다. 이제 잠수는 안 하는 걸로.


한 시간 정도 수영을 한 후 철수를 결정하였다. 바람이 없고 화창한 날에 갔다면, 아이들이 놀긴 최고의 바닷가였을 것 같긴 했지만, 마우이는 계속 날씨가 도와주지 않구나. 다음에 또 마우이 오게 되면, 바람이 없는 날 꼭 다시 오고 싶은 곳이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차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차가 크니까 옷 갈아입는 건 참 좋다. 새 옷을 입고 뽀송뽀송한 기분으로 공원 벤치에서 빵과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 밥순이 지아는 또 밥을 달라고 해서, 김에 싸서 밥을 먹였다. 아이들은 또 새를 잡으러 뛰어다녔다. 정말 잡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하긴 아직 아빠가 호랑이한테 싸움 이기는 걸로 믿고 있는 아이들이니.



75.jpg 아이들은 옷을 갈아입고 와이프는 간식 준비


74.jpg Kalepolepo 공원 벤치



유일한 일정이었던 바다 수영마저 예상보다 일찍 끝내서, 공원에서 향후 일정을 잠시 고민했다. 바람도 강하고 구름도 잔뜩 낀 것이 언제든 비가 내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콘도 수영장도 답이 아니었다. 그래서 날씨와 상관없이 무난하게 평타는 칠 수 있는 라하이나 지역으로 가서 산책, 쇼핑 및 저녁을 먹기로 했다.


라하이나로 떠나기 전, 다시 한번 시나몬 가게로 향했다. 예전 괌 여행 때 제대로 된 시나몬 맛에 꽂힌 후, 우리 가족에게 시나몬 가게는 여행지에서의 필수 방문 장소였다. 마침 시나몬 가게는 공원에서 5분 거리였기 때문에, 어설프게 때운 점심식사를 마무리하기 제격이었다. 하지만 도착해보니 또 문이 닫혀 있었다.


어젠 일요일이라 닫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월요일도 문이 닫혀 있으니 억울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입구로 가봤더니, 유리문에 <Open 07:00 AM ~ 02:00 PM>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지금 시각은 오후 2시 20분. 덴장. 아슬아슬하게 놓쳤구나. 30분 정도만 야근하시지. 그래서 다시 그 옆의 ‘델리 808’로 갔다. 이 가게는 시나몬 가게의 조기 마감으로 두 번이나 수혜를 보구나.



20161024_144212.jpg 문이 닫혀있는 Cinnamon Roll Place



차에서 간식을 먹고 라하이나로 올라가는 길에 주유소에 들렀다. 기름을 가득 채운 차를 렌트했는데 벌써 바닥이 보인다. 주유비도 감이 없고 이런 사이즈의 차를 몰아본 적이 없어서 얼마를 넣어야 하는지 헷갈렸다. 그래서 지난번 오하우 여행 때를 떠올렸을 때, 30불을 주유했더니 3/4 정도가 채워졌었고 그 후로 충분히 타고도 많이 남은 상태로 반납한 것이 억울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이번엔 20불과 30불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둘 다 서운하지 않게 25불어치 넣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절반도 차지 않았다. 역시 탱크 같은 차는 기름을 많이 먹는구나. 그래서 우선은 출발했다가 다음 주유소에서 20불을 더 넣었다. 오늘 라하이나까지 왕복하고 내일 Hana 왕복까지 고려하면 그래도 절반 이상은 채워져 있어야 맘이 편할 것 같았다. 5분 가격으로 주유를 두 번 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법인 카드로 이렇게 주유했다면 십중팔구 카드깡일 것이다. 금융사기예방을 위한 Fraud Detection System을 갖추고 있는 카드사라면, 이런 주유 패턴이면 경고 등 한 번 울릴만한 시추에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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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DSC1165.JPG 라하이나 가는 길



라하이나로 가는 두 번째 길, 역시 운전하기 싫을 정도로 주변 경관이 탄성을 자아냈다. 지우는 점심을 부실하게 먹어서 배가 고프다고 했는데, 이럴 때를 대비해서 찾아놓은 곳이 또 있었다. 'Leopa’s Pie'라는 빵집인데, 여기서 파는 바나나 케이크는 아이들이 환장할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5분 후면 그 빵집 앞을 지나가고, 지우는 정말 드물게 배고프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이란 말인가. 이렇게 난 동선과 시나리오별 여행 준비를 완벽하게 한 나 자신을 쓰담 쓰담 칭찬해주고 있었는데, 와이프가 한 마디 했다. “방금 지나간 Leopa’s Pie란 집 맛있었겠다.”


헉, 까불다가 지나쳤다. 굳이 변명하자면 자신감이 하늘로 찔러 내비게이션을 찍지 않고 대충 위치만 알고 가고 있었는데, 그 가게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기습적으로 나타났었다. 일 차선 도로인데 유턴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오전에 파도가 없는 최고의 바닷가 Kalepolpo Beach Park를 발견했는데도 의외의 바람 때문에 제대로 놀지 못한 것이나 시나몬 가게를 아슬아슬하게 놓친 것보다, Leopa's Pie 지나친 게 더 아쉬웠다. 사실 아이들 핑계를 댔지만, 여기 바나나 케이크 사진들은 달달한 음식이면 무장해제되어버리는 나의 뇌신경도 엄청 자극시켜 마음속으로 가장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였는데, 이렇게 까불다가 지나치다니.


이 날은 뭐든 2%씩 부족하라고 세팅이 되어 있는 날이었다 보다. 날씨는 점점 흐려져서 마우이에서 처음으로 무지개도 보지 못했다.


너무 아이 같아서 엑셀 스케줄 표에는 표시하지 않았지만, 내가 라하이나에서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사탕수수 열차를 타보는 것이었다. Sugar Cane Train. 사실 여행 준비를 할 때, 믿기지 않겠지만 마우이의 역사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역사와 세계사는 왕조 이름, 도시 이름, 왕 이름, 연대기 등이 외우는 것이 너무 싫어서, 학창 시절 가장 싫어했던 과목이었기 때문에, 여행지의 역사공부는 정말 나와 어울리진 않았다. 그래도 하와이는 지역의 특수성 때문에 그 역사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11.png Sugar Cane Train. 장난감처럼 예쁘게 생겼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한국인의 이민 역사에 관한 부분이었다. 마우이는 옛날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이 번창해서 아시아에서 많은 노동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1902년 계속되는 전쟁 및 굶주림에 시달리던 121명의 한국인이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첫 이주를 시작한 이후로 1905년까지 약 7천여 명이 이주를 했다고 한다. 이들이 현재 200만 명에 육박하는 미국 한인 역사의 시작이었다. 100년 전에 7천여 명이라, 정말 많은 선조들이 하와이로 이민을 갔었구나.


그들은 새벽 5시부터 매일 12시간 동안 백인의 10분의 1인 한 달에 15불이라는 터무니없는 월급을 받으며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중 상당수가 하와이의 무더위와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거나 미국 본토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견뎌 내며 하와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DNA는 얼마나 강인 했겠는가. 하와이 2세, 3세, 4세들 중 성공한 사람이 많다는 것도 이런 강한 정신력과 생명력을 이어받아서일 듯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초기 하와이 이주민 7천 명 중 한 명의 후손, 전 UFC 챔피언 PJ Penn이다.


관련 책도 한 권 읽고 싶어 찾아보니, 『1902년, 조선인 하와이 이민선을 타다』라는 책이 있었는데, 역시 회사 밑 영풍문고에는 재고가 없었다. 그리고 연관 서적에 김영하의 『검은 꽃』이라는 책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인 1905년 멕시코로 떠난 한국인 이민자들의 삶을 장편소설로 그린 책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국가였을텐데, 막연한 희망을 안고 떠난 하와이와 멕시코에서 세계 최약소국 이주민으로서 얼마나 핍박받고 좌절하고 한 줄기 믿음마저 배반당하는 경험들을 했을까. 그들의 이야기를 한 번 읽어보고 싶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국내 소설가 중 끝판왕이라 생각하는 김영하의 소설이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지 않은가.


다만 김영하의 『검은 꽃』은 결국 사지 않았다. 항상 여행 때마다 책을 몇 권씩 챙겨가고, 지난 오하우 여행 때도 네 권을 넣어 갔었는데, 몇 번 다니다 보니 적어도 내겐 책이 여행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았다.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에 탁해져 버린 나의 동공을 위하여 맑은 하늘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집과는 달리 100%짜리 미소가 나오는 아이들 얼굴이라도 한 번 더 쳐다보고, 오롯이 혼자가 되는 저녁 시간엔 오늘 여행을 기록하고 내일 여행을 준비하는데 다 써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하와이로 이주한 이민 1세대를 기리기 위하여 그들이 타고 다녔던 기차를 그대로 살려, 당시 수확한 사탕수수를 제분소로 옮길 때 이용하던 철로를 따라 한 바퀴 도는 관광상품으로 만들어놓은 Sugar Cane Train을 꼭 한 번 타고 싶었다. 그 기차에서 지우에게 이런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관련 글들을 더 많이 읽기도 했다. 다만 우리가 라하이나에 너무 늦은 시간에 도착하여 이미 오늘의 운행은 끝났을 때였다. 마음으로만 이민 1세대들을 추모해본다.


지난번과 동일하게 outlet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우선 배고픈 지우를 위해 간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지난번 들렀던 부바 검프를 지나쳐 가다 보니 ONO Gelato 아이스크림 가게가 나왔다. Gelato면 지나칠 수 없지. Gelato와 빵을 사서 바닷가가 보이는 야외 의자에 앉았다.



77.jpg 지우와 와이프는 빵을 고르고, 지아는 자다 깨서 V


20161024_172340.jpg 'Enjoy the VIEW'가 가능한 야외 자리


78.JPG Gelato 먹고 있는 세 모녀.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


KakaoTalk_20161216_111741150.jpg 제일 좋아하는 사진이라고 하니, 경훈이가 편집해준 사진



간식거리로 아이들의 배를 채워 놓으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라하이나 거리를 산책하며 쇼핑 욕구를 한껏 고취시킨 후, 의욕 충만해져 아울렛으로 들어갔다. 지난번 토요일에 왔을 땐 사람의 거의 없었는데, 오늘은 제법 보였다. 마우이에서 거의 만나볼 수 없었던 한국 여행객들도 이 곳에선 제법 보였다. 대부분 신혼부부들이었다.

한국 신혼부부들은 육안으로 확실히 구분이 되었다. 일단 대부분 인물들이 좋고 커플티를 입고 있다. 그리고 차는 무스탕이거나 오픈카이거나, 혹은 무스탕 오픈카를 타고 다녔다. 우리도 아이들 둘만 없었으면 신혼여행객으로 분명 보였을 텐데. 믿어 의심치 않는다.



79.jpg 라하이나 거리 산책


20161024_165949.jpg The Outlets of Maui



워낙 쇼핑을 싫어하는 지우, 지아에게 쇼핑의 즐거움을 좀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향후 여정이 편해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이들 옷만 보러 다녔다. 예상을 깨고 본인들 옷만 구경하러 다니니 아이들은 완전 신나 했다. 그리고 지우 지아가 옷을 고르는 것을 보며 드디어 아이들에게 취향이란 것이 생긴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지아는 보는 것마다 “이거 이쁘다. 이거 사 줘.”를 연발하고 다녀서 취향이라 말하긴 힘들지만, 지우는 1년 전과는 예쁘다고 하는 옷들의 스타일이 많이 변해 있었다. 핑크색은 초등학교 입학하며 이미 졸업을 했고, 이젠 청색, 그레이색 등 제법 모던한 색깔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지우가 고르는 옷들이 전부 우리의 예상 범위를 벗어난 옷들이라 적잖이 놀랐다. 우리 딸이 세련된 아빠 따라다니면서 안목이 많이 고급스러워졌구나.


동선을 일부러 70% sale 코너 쪽으로 유도하여 아이들 옷을 몇 개 골랐다. 아이들이 쇼핑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가게도 딱 두 개, Tommy Hilfiger와 Gap 만들어갔는데, Gap 옷들을 더 좋아했다. 물론 Gap이 할인 폭이 더 커서 우리가 Gap 옷들을 조금 더 극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20161024_183000.jpg 맘에 드는 옷을 입고 신난 지아


쇼핑 후 신나서 노래하는 아이들



아이들 옷 쇼핑을 만족스럽게 끝내고 나오는데, 와이프가 본인은 됐으니 내 것만 몇 개 고르자고 했다. 와이프가 됐다는 말은 며칠 후 알라모아나 백화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금은 의심스러웠지만, 그래도 감사한 마음으로 내 옷도 한 번 골라봤다. 난 무조건 한 군데에서 쇼핑을 끝낸다. 그래서 브랜드 선택이 중요하다. 나이키, 아디다스, 리복 등을 제치고 이번엔 나도 좀 고급지게 'Brooks Brothers'로 들어갔다.


난 캐주얼한 남방이나 하나 사서 나올까 생각했는데, 와이프가 쿨하게 와이셔츠를 사자고 했다. 사실 지금 내 와이셔츠들은 두어 개를 제외하곤 너무 오래된 것들이라, 술 한 번 마시고 들어온 날 다 찢어버려버리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내가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관계로 지금껏 계속해서 입고 다니는 것들이었다.


그래, 어차피 캐주얼 옷들은 입을 기회가 많지 않으니,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입을 와이셔츠를 사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여기 점원 아가씨가 완전 선수였다. 우리가 합의 후 와이셔츠 쪽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줄자를 가지고 오더니 내 치수를 재버렸다. 눈 깜짝하고 나니 난 14 2/3이라는 내 사이즈를 받아 들고 와이셔츠 코너 앞에 서 있었다.


그중 제일 맘에 드는 놈으로 하나 골랐다. 그랬더니 이 선수가 다시 접근하여 세 개 사면 두 개 가격으로 주는 프로모션을 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눈 깜짝하고 나니 난 14 2/3 치수 와이셔츠 몇 개를 더 들고 있었다. 이 선수 잘 판다. 청소기 사러 온 사람에게 65인치 TV를 팔 수 있는 스킬이었다. 결국 난 세 개를 샀다. 새 와이셔츠를 산 것보다 집에 돌아가면 오래된 와이셔츠를 버릴 생각에 더 신이 났던 것 같다.


계산대에 섰더니 이 선수는 마지막까지 영업을 했다. 여자 옷은 무조건 추가 25% 할인을 더 해준다고 했다. 어허, 선수 양반. Ok, 거기까지. 내 와이셔츠만 세 개를 두 개 가격에 사서 나왔다. 만약 와이프 옷만 고르고 계산대에 섰으면, 이 선수가 남자 옷 추가 25% 해준다고 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쇼핑백을 차에 넣어두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번에는 라하이나의 또 하나의 유명 레스토랑 cheeseburger in paradise로 갔다. 난 인스타그램 사진 기준으로 Buba Gump보단 여기가 더 기대되었다. 저녁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줄을 많이 서 있었는데, 다행히 15분만 기다리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여기도 아이들과 함께 있는 가족들은 일반인들보다 더 빠른 배정을 받을 수 있는 Fast track 혜택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20161024_170728.jpg Cheese Burger in Paradise 앞에서. 난 항상 셀카.


20161024_193223.jpg 주문은 언제나 와이프.


20161024_192858.jpg 아이들은 또 색칠놀이.


81.jpg Cheeseburger 정말 맛있어 보인다. 실제로도 맛있었다.


82.jpg 지아 화난거 아님. 맛있게 먹고 있는 것임.



우린 이 집의 Signature 햄버거 두 개와 로꼬모꼬를 시켰고, 와이프는 맥주, 난 루트비어, 아이들은 쿠키 슬러시 음료를 주문했다. 지우는 라이브 가수가 노래 부르는 것을 처음 봤는데, 신기했는지 고개를 돌려서 아저씨가 노래하는 것을 계속 들었다. 라이브 음악과 음식은 매우 훌륭했다. 나의 Cheese Burger도 맛있었지만 아이들의 로꼬모꼬도 생김새가 너무 훌륭하여 다음번엔 꼭 시켜먹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는데, 이번 여행에선 기회가 오질 않았다.



20161024_195550.jpg Live 음악을 감상 중인 지우



이렇게 하루가 또 지나갔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내일 대망의 Road to Hana 여행을 위한 짐을 챙기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마우이가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것이 벌써 아쉽기 시작한다. 영어로 I already miss Maui.


Good-bye 5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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