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23 일요일
할레아칼라 가는 날. 새벽 3시 15분에 기상했다.
고 3 때도 이런 시간대에 기상한 적은 없었다. 알람을 3시 10분과 15분에 두 개 맞춰 놨었다. 사람은 일생을 살면서 1/3은 잠을 자는데, 난 마치 오늘이 마지막 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일 아침 몇 분이라도 더 자려고 발버둥 친다. 그래서 한 번에 일어나면 이상하게 억울해서 항상 5분이나 10분 간격으로 알람을 두 개 맞춰놓고 자는 습관이 생겼다. 가끔은 이런 5분간의 추가 잠이 밤새 잔 것보다 더 개운할 때도 있고, 심지어 5분 동안 꿈도 꾸기도 한다.
난 열악한 반지하 자취생활 속에서도 베개와 이불 대신 작은 옷을 베개 삼아 큰 옷을 이불 삼아 잘 살아왔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건 잠 하나만큼은 자신 있게 잘 수 있다. 술을 마셨을 때나 모기가 웽웽 거리거나 공포 영화를 봤을 때만 잠을 못 이룰 뿐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선 푹신한 베개와 뽀송뽀송한 Ralph Lauren 이불을 덮고도 이상하게 계속 잠을 설치고 있다.
어젯밤에도 두 시간 정도 잤나. 계속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새벽 3시경에 접어들고서야 눈알이 빠르게 움직이며 꿈도 꾸고 꿀잠에 빠지는 REM 수면 상태로 들어갔는데, 빌어먹을 3시 10분에 알람이 울렸다. 하와이고 뭐고 핸드폰을 던질 뻔했다. 알람 해제 버튼을 한 번에 누르지 못하여 더 짜증이 났다. 난 현실을 부정하고 다시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는데, 잠시 후 3시 15분 알람이 더 크게 울렸다. 아, 이건 휴가가 아니잖아. 역대급으로 일어나기 싫었다.
그래도 책임 회피를 위해 내가 할 껀 해야 한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실로 들어가서, 애들 데리고 자고 있는 와이프를 소극적으로 깨웠다. 나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눈도 제대로 안 뜨고 피곤에 쩔은 목소리로 "3시 15분이래"라고 했다. 내 마음이 전달되었기를 바랬다. 다행히 와이프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뜨더니 첫마디가 “애들 어제 11시 넘어서 잤어.”였다. 좋아, 이 말은 와이프도 지금 진짜 일어나기 싫다는 말이다. 그때부터 서로가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핑퐁 대화를 나누었다.
“어쩔래. 갈까?” “어쩌지? 피곤하지?” “우짜지” “애들 깨워야 하나?” “어떻게 하고 싶어?” "새벽 3 시래" "피곤하긴 하네" "......"
둘 다 상대방이 먼저 그냥 자자는 말을 해주길 기다리는 대화였다. 난 원래 이상한 꿈을 많이 꿔서 꿈 해몽 따위는 개나 줘버리는 스타일이지만, 전날 밤엔 꿈도 별로였다. 가기 싫으니 개꿈에까지 의미 부여를 하며, 꿈자리가 사나웠다는 말도 해버릴까 고민도 했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는 가장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그래, 내가 이 상황을 정리하자. 난 차분하게 “그럼 일단 더 자자. 할레아칼라엔 일몰을 보러 가던지 나중에 생각하자.”라는 말을 내뱉으려던 찰나였는데, 와이프가 먼저 한 마디 했다.
“어제 짐 다 챙겨놓았잖아. 가지 뭐.”
그렇게 1초 차이로 출발하게 되었다. 제길. 난 밤새 충전을 해놓은 전자기기들과 간식거리들을 먼저 차에 실어놓으려고 내려왔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어두운 풀숲을 보니, 지난번 여행 때의 바퀴벌레 트라우마가 되살아나 더 신경이 곤두섰다. 난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잠을 여전히 몸 안에 대기시켜놓고, 무거운 추가 달린 듯 아래로 짓눌리는 눈꺼풀만 억지로 든 채, 차를 후진해서 꺼내고 있는데,
“뿌지직!”
제법 큰 소리였다. 잠이 순간 달아나며 눈이 번쩍 떠졌다. 난 처음에 옆 차를 긁은 줄 알았다. 근데 옆 차와의 거리는 충분했다. 주차만 수만 번을 해왔는데, 아무리 졸려도 겨우 주차장에서 차 빼다가 옆 차를 박을 리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펴봤더니 뒷 타이어 근처에 유리 조각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어제 BUBA GUMP에서 선물로 받은 유리잔이었다. 어제 짐을 빼다가 그걸 떨어뜨렸다면 깨졌을 테고, 누군가가 땅에 놔두고 까먹은 것 같다. 근데 유리잔을 땅에 잠시 둘 일이 뭐가 있지? 어떤 시나리오건 이상했다. 새벽의 유리잔 깨지는 소리, 이건 마치 새벽의 전화만큼 불길한 신호다. 집을 나서지 말라는 경고인가? 혼자 또 가기 싫어서 별 생각을 다 해봤다.
난 유리조각들을 말끔히 치우며 마지막 남은 잠마저 완벽히 달아났다. 에이, 가야지 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가서, 자는 애들을 안고 차로 옮겼다. 우리 가족들은 이 책을 보기 전까지 선물로 받았던 BUBA GUMP 유리잔의 존재를 까마득히 까먹고 있을 것이다. 그래, 이 날 새벽에 내가 깨 먹었어.
24시간 중 가장 깨어있을 확률이 낮은 시간대인 새벽 3시 40분에 드디어 할레아칼라 산으로 출발했다. 내비게이션상 두 시간 반이 걸린다고 나왔다. 거리는 그 정도는 아닌데, 그만큼 가는 길이 험난하다는 말일 것이다.
주위 경치라도 보이면 기분이라도 상쾌할 텐데, 컴컴한 밤에 운전하니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하와이를 많이 다니셨던 지영이의 상무님이 마우이에서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가 도로 위 중앙선과 차선을 표시해주는 등이라고 했다. 정확한 용어를 찾아보니 ‘도로표지병’이었다. 참 희한한 이름이다. 구글 번역기로 도로표지병을 넣어봤더니, ‘a road sign bottle’이란다. 쯧쯧, 이래서 구글이 우주를 정복할 수 있겠나. 다시 찾아보니 우리말 순화어로 '길반짝이', 영어로는 'CAT’S EYE'였다. 고양이 눈처럼 빛에 비치면 반짝이는 것, 역시 영어 이름이 가장 잘 와 닿는 걸 보면 나도 반쯤은 외국인이다.
Cat’s eye는 야간이나 우천 시 운전자의 시선을 명확하게 유도해주는 역할을 한다. 헤드라이트에서 나온 빛을 반사하는 원리인데, 마우이 도로의 Cat’s eye들은 자체적으로 빛을 내고 있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비행기 활주로처럼 촘촘하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도로표지병을 주요 도로에 다 심었을 텐데, 왜 밤에 잘 안보였을까. 원래 차선 넘어갈 때 덜덜거리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밝게 차선을 표시해줘야 하는 거였구나. 개당 가격이 비싸서 야밤에 망치로 이걸 파서 팔다가 적발된 뉴스도 검색된다. 아무튼 마우이의 CAT’S EYE는 밤 운전의 또 다른 볼거리였고, 나처럼 약간 야맹증이 있는 사람에겐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지영이 상무님처럼 역시 여행 많이 다니신 분들은 각 도시에서 인상적이었던 포인트가 우리처럼 관찰력이 떨어지는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르셨다.
해발 3,000m가 넘는 할레아칼라 정상으로 가는 길은 역시 터프했다. 마지막 한 시간은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일 차선 도로였다. 난 힘 좋은 Muscle Car의 성능을 맘껏 뽐내며 산길을 치고 올라가고 싶었는데, 우리 바로 앞 차가 거북이였다. 이 차 때문에 뒤에 엄청나게 많은 차들이 밀려 있는데, 추월은 불가능한 도로였다. 물론 해가 뜨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고 어차피 다른 길은 없으니 이 순서대로 도착할 것이라, 혹시 모닝 응아가 급한 사람 정도가 아니면 서두를 필요도 없긴 했다.
정상에 거의 다 왔을 때, 반대편 차선 중앙에서 움직임 하나가 포착되었다. 느낌이 뭔가 귀여웠다. 속도를 늦추고 자세히 보니 하얀 부엉이 새끼였다. 우리 지아의 태명이 부엉이였는데, 여기서 만나게 되네.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었는데 날지는 못했다. 나도 그 마음 안다, 훨훨 날고 싶은데 날지 못하는 기분. 반대편 차선으로 차가 내려오면 어쩌려고. 그 순간 아기 부영이는 몸을 조금 틀더니 나와 분명 눈이 마주쳤다. Cat's Eye보다 더 큰 눈을 부릅뜨고 마치 “나 부엉이야. 어두운 걸 좋아하는 거 알 거잖아. 헤드라이트 안 끌래?”하는 것 같았다.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지난 여행에서의 달팽이처럼, 부엉이의 귀여운 날갯짓이 너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내가 운전하는 동안, 와이프는 연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별이 많은 하늘은 처음 본다고 했다. 나도 하늘을 보고 싶었지만 계속되는 꼬불 길에 소심하게 운전하는 앞 차가 언제 브레이크를 밟을지도 몰라서, 고객을 돌려 밤하늘의 별을 보지는 못했다. 난 굳이 따지면 일출이나 구름 보단 밤하늘에 촘촘하게 박혀있는 별이 더 보고 싶었다. 나중에 차를 세우고 나면 실컷 봐야지. 하지만 아쉽게도 정상에 도착했을 땐 새벽 5시 40분이었고, 이미 주변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별들은 이제 일출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양보하기 위해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도 큰 차를 빌려 놨는데, 1단 놓고 힘차게 산을 올라가는 기분을 누리지 못한 것은 좀 아쉬웠다. 난 앞차가 분명 초보 여성분일 거라 생각했다. 차종도 아담했다. 하지만 도착해서 그 차에선 내린 건 거대한 흑형이었다.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모습에선 카리스마 쩌는 스웩이 느껴졌는데, 운전은 그렇게 소심하게 하다니.
해는 보통 6시 20분 전후에 뜨니 40분 남았다. 주차장엔 이미 차들이 빼곡했다. 여행사 버스를 타고 온 여행객들도 많았다. 저걸 타고 왔으면 나도 별을 봤겠지. 버스 위엔 자전거가 20여 대씩 실려 있어서, 일출을 본 후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는 패키지도 있었다. 우리도 지우가 자전거 타는 걸 좋아하니 신청할까 고민하다가 인당 100불이 넘어서 놔뒀는데, 내려올 때 보니 아이들이 하기엔 너무 위험해 보였다.
첫 번째 줄에서 보려면 지금 나가서 좋은 자리 맡아야 했다. 하지만 애들은 여전히 꿀잠을 자고 있어서 내가 선발대로 먼저 나가봤는데, 일출이나 구름이 문제가 아니라 장난 아니게 추웠다.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에 춥다는 말들은 있었지만, 난 그래도 여기가 마우이인데 여름 치고는 추운 수준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긴 스키장 꼭대기 추위였다. 다시 차로 돌아가 복장을 점검했다. 지우 지아 옷은 충분히 두껍게 입히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걸로도 모자랐다. 혹시 몰라 넣어둔 이불까지 돌돌 말아서 데리고 나갔다.
해발 3,058m 할레아칼라 정상. 90만 년 전에 폭발을 시작하여 1750년에 마지막으로 용암을 내뿜은 후 쉬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휴화산이라고 한다. 그래, 사람이건 동물이건 산이건, 쉬고 있을 땐 건드리면 안 되지.
하와이 전설에 따르면, 마우이는 원래 반신반인인 불의 신의 이름이고, 할레아칼라는 마우이의 집이었다고 한다. 그 시대에는 해가 오후에 떠서 저녁에 졌는데, 마우이 엄마가 해가 떠있는 시간이 너무 짧은 게 아니냐고 한 마디 했단다. 그래서 마우이가 하늘로 점프해서 해 멱살을 잡고 끌어내린 후 밧줄로 묶어버렸다고 한다. 마우이는 엄마 말을 잘 듣는 터프가이였던 것이다. 끌려 내려온 태양은 사정사정하며 딜을 쳐서 마우이로부터 풀려났는데, 이제부터는 아침 일찍 떠서 저녁 늦게 질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지금처럼 해가 뜨고 지기 시작했고, 태양이 스러져가며 생기는 노을은 ‘나 약속 잘 지키고 있지?’라는 의미라고 한다.
할레아칼라가 일출 시간이 빠르고 일몰 시간이 늦어, 실제로 전 세계에서 일조량이 가장 많은 곳인 것에 착안하여 나온 전설인 듯하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정말 대충 지은 것 같다. 마늘만 먹고 곰이 사람이 되는 스토리가 훨씬 더 창의적이다. 내가 화장품 회사 일도 관여하고 있다 보니, 일조량이 가장 많은 이 곳을 떠올리며 다음 선크림 브랜드명을 ‘Haleakala’와 관련된 이름으로 지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나도 창의적이지 못한 건가.
우리가 서 있는 이 곳이 해발 3천 미터가 넘는다고 하자 와이프가 한라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묻는다. 난 조금 놀랬다. 백두산이 2,750m, 한라산이 1,950m, 이건 우리가 유일하게 좋아하던 교과서인 사회과부도에서 국내외 지도, 주요 도시 이름 및 통계표를 보며 놀던 학생들은 웬만하면 외우고 있는 숫자인데, 와이프는 외국 생활하느라 그 재미있는 사회과부도를 보지 않았구나. 와이프가 밤하늘의 별을 보는 동안, 남편이 두 시간반을 빡세게 운전해서 우린 지금 백두산보다 300m 더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주차장에서 조금 더 위를 보면 하얀 반구형 모양의 천체물리학 연구 단지가 있다. 와이프가 감탄할 만큼 별이 많이 보일 정도로 하늘이 맑은 데다 주변에 방해가 될만한 도시 불빛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별을 관찰하기 가장 좋은 장소 중 하나라고 한다. 그래도 난 별을 보지 못했다.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핀의 모험> 작가 마크 트웨인도 1886년에 이 곳을 방문하여 일출을 본 후 “The sublimest spectacle I ever witnessed”라고 했다고 한다. 나도 나름 김창우 작가인데 마크 트웨인에 질 수 없어, 정상에 올라 “Wow”라고 외쳤다. 내 표현이 조금 더 간결하고 여백의 미를 살린 듯하다. 1886년도엔 산길을 걸어 올라갔겠지. 그 유명한 마크 트웨인도 만 51세에 걸어서 올라간 곳을 난 Muscle Car를 타고 오른발만 깔짝거리며 페달을 밟으며 올라왔는데, 감히 힘들다는 말을 꺼내려하다니, 부끄러워졌다.
역시 일출 10분 전은 사람들이 겹겹이 서 있었다. 우리도 세 번째 줄 정도에 섰다. 근데 진짜 너무 추웠다. 차가운 공기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지우 지아 코에선 벌서 콧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참 정직한 코들을 가졌다. 일출도 좋은데 아이들 감기가 더 신경 쓰여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시야가 넓은 와이프가 실내 전망대를 발견했다.
실내 전망대에 들어가니, 정말 따뜻하고 사람이 별로 없었다. 단지 밖과의 차이는 유리 하나 있다는 것뿐이었다. 일출과 나 사이에 유리 하나쯤은 있어도 되잖아. 이불로 꽁꽁 싸매고 있던 아이들도, 이불에서 해방되어 편하게 몸을 녹이며 구름과 일출을 감상했다. 난 그래도 유리 자국이 없는 사진을 남기고 싶어, 추위와 인파 속으로 다시 나갔다. 사람들 정수리를 피해 두 손을 번쩍 올려서 사진을 찍어댔다. 보통 이런 곳에 오면 꼭 점프샷을 찍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들 너무 추웠던지 단 한 건의 점프샷 장면도 보지 못했다.
난 사실 일출에 별다른 감흥이 없다. 난 태어나서 한 번도 일출을 스케줄에 넣고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내일도 해가 뜬다는 생각이 강한 편이다. 다만 아이들에게는 일출을 한 번 보여주고 싶었고, 나를 닮아 일출에서 짜릿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구름은 좋아할 것 같았다. 아직 구름빵을 먹으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믿는 아이들이기에 눈 밑으로 구름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면 약간의 호연지기를 느끼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어땠는지는 물어보지는 않았다. 감상을 강요하는 듯한 기분도 들었고, 느낌은 각자의 몫이니.
써놓고 보니 여기가 별로였다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겠다. 그렇진 않았다. 앞으로도 일출을 제대로 볼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내가 본 유일한 일출이 할레아칼라라는 것은 아주 자랑스러울 것 같다. 전 세계 어디에도 이보다 더 멋진 일출은 없을 것 같았다. 특히 구름 위로 해가 떠오르는 순간만큼은 "아~"하는 감탄사를 제외하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19세기 마크 트웨인까지 가지 않더라도, 인스타그램만 봐도 할레아칼라 일출을 백만 불짜리 풍경이라 표현해놓은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내게는 여기 일출과 백만 불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무조건 백만 불을 고를 거라, 백만 불짜리의 감동까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제 내려간다. 어둠과 거북이 앞차로 인해 즐기지 못했던 길을 다시 여유 있게 내려오면서 보니,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구나. 할레아칼라의 건조한 화산 지형으로 인해 분화구 근처에서만 산다고 알려진 식물, 영어로 ahinahina고 우리 말로는 은으로 된 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은검초라 불리는 식물이 있다고 하여, 은검초가 보이면 잠시 차를 세우고 아침 도시락을 먹으며 쉬어가려 했는데, 운전하는 내 눈에 띄질 않았다. 그래서 논스톱으로 쭈욱 내려왔다.
할레아칼라에서 내려오는 길은 정말 한적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런 길목엔 브런치 집, 커피숍, 장어집, 장작구이집, 초계 국숫집, 모텔, 라이브 카페, 찜질방 등등이 차례로 들어섰을 텐데 이 근방은 Kula Lodge 식당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거긴 안 간다. 차에서 빵과 과일로 아침을 대신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제야 쌩쌩해진 아이들에게 아이패드를 맘껏 보라며 쥐어 주고, 와이프와 난 두 시간 꿀잠을 잤다.
눈을 뜨니 아이들은 이미 수영장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점심을 다섯 가지 반찬과 함께 먹고 콘도 수영장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두 번째라 익숙해서인지 지난번보다 훨씬 더 잘 놀았다. 물론 여전히 할머니들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놀긴 했지만. 그리고 처음으로 비장의 카드 액션캠을 써봤다. 와, 이거 대박이었다. 물속에서 동영상이 깨끗하게 찍혔다. 이게 54불 밖에 하지 않는다니, 두 엄지를 살포시 치켜들어주고 싶다.
원본 동영상 화질은 엄청 좋은데 여기 올리니 깨지네.
수영 끝내고 배가 출출해서 시나몬을 먹으러 나갔다. 마우이에서 가장 유명한 시나몬 가게가 콘도에서 5분 거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계획이 틀어진 위기 상황인가? 노노,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럴 때 충실한 사전 준비의 위력이 나온다. 당연히 시나몬 가게가 여의치 않을 시 옵션 2가 준비되어 있었다. 바로 옆 블락의 ‘델리 808’이란 레스토랑이었다. 그곳에서 아보카도 핫도그, 피자 핫도그, 파니니와 쿠키를 사 와서 차에서 먹었다. 아보카도와 피자 맛인데 맛이 없을 수가 없지. 다만 인간적으로 양이 너무 많았다. 이런 크기는 샤킬 오닐이나 돼야 다 먹을 수 있을 듯했다.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서 우린 또 한 번 장을 보기로 했다. 우선 밥순이 지아 때문에 햇반이 추가로 필요하여 코스트코에 먼저 들렀다가, Target으로 갔다. 와이프는 코스트코 처음 간 사람처럼 영수증을 버리는 바람에, 출입문을 통과하지 못해서 Information에 가서 영수증을 재발급받았다. 거기 직원이 우리가 한국에서 온 걸 듣더니, 한국에 꼭 한 번 오고 싶다고 와이프와 엄청난 수다를 떨다가 페이스북 친구 하자며 이름을 적어줬다. 외국 와서 현지 여자 번호를 따다니. 나 장담컨대 이 글을 보는 순간에도 와이프는 그분에게 친구 신청하지 않았을 듯. 내가 해버 릴라.
지우는 지난 여행에서 Target에 대한 기억이 좋았던지, 아니면 과녁처럼 생긴 로고가 맘에 들었던지, 한국에서도 Target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래서 지우를 위해 Target으로 옮겨서 며칠 더 일용할 음식들을 샀다. 그리고 이번엔 맥주도 샀다.
다시 콘도로 돌아오는 길에 경찰관이 길거리에서 한 남자와 실랑이를 하는 것을 보았다. 경찰관이 큰 소리로 “get on the side”라고 외치며 그 남자에게 비키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오히려 기세가 등등하게 경찰에게 뭔가를 막 따지고 있었다. 절대 물러설 분위기가 아니었다. 여기 미국 아닌가? 미국에서 경찰에게 저래도 되나?
우리가 지금껏 본 영화에서는 저렇게 하면 경찰이 돌변하며 총을 꺼내고 뒤돌아서 수갑을 채우고 경우에 따라선 헬리콥터가 날아오던데, 일반인이 경찰에게 대들고 있는 장면이 상당히 신기했다. 그때 신호가 바뀌었다. 내가 첫 차였는데 실랑이를 보느라 신호가 바뀐지도 몰랐다. 하지만 뒷 차들이 빵빵거리지 않은 걸로 봐서, 그들도 열심히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더 시간을 끌 수 없어, 이 흥미진진한 상황을 뒤로하고 아쉽게 출발했다. 그리고 뒤에서 기대했던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할레아칼라 때문에 하루를 일찍 시작한 탓에 저녁 일정도 일찍 끝냈다. 그리고 난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을 모두 정리했다. 지난번 여행에서 카메라를 도난당한 아픈 기억이 있었고, 첫날 렌터카 아저씨가 보험을 팔기 위해 마우이를 범죄의 소굴로 설명한 것도 생각나서, 틈날 때마다 백업받아놔야 했다. 사진을 쭈욱 본 가족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열심히 찍어댄 보람이 있네. 그리고 내 사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내 사진도 좀 찍어주시지?
일기예보를 다시 확인해 보니 또 바뀌어 있었다. 원래 내일 마우이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Road to Hana로 떠나려고 했었는데, 내일보단 모레 날씨가 조금 더 좋은 것으로 예보되어 있다. 그래서 Road to Hana를 모레로 미루고, 내일은 집 근처 바닷가에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일정이 뒤로 밀리자, 한결 부담이 없는 밤이었다. 그래서 맥주를 한 캔 깠다. 이번 여행에서의 첫 알코올. 물론 난 반 캔만 마셨고, 남긴 반은 다음 날 아침 이 집 싱크대가 마셨다.
맥주도 무려 반 캔이나 마셨으니, 오늘 밤은 제대로 한 번 자보자.
Good-bye 4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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