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28 금요일
하나우마베이 가는 날.
6시 30분 기상 예정이었으나, 역시 눈을 뜨니 7시 15분이다. 분명 알람을 맞추고 잤는데, 가끔씩 꿀잠을 잘 때 등장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또 나와서 껐나 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한 거지 뭐. 빨리 서두르면 오차범위 내 시간에 도착할 수 있다.
아이들을 깨우고 입히는 동안, 와이프는 내려가서 조식을 두 접시 챙겨 왔다. 호텔 조식 뷔페에서 음식을 가지고 나올 땐, 항상 눈치 보면서 휴지에 돌돌 말아서 몰래 가지고 나왔었는데, 이렇게 당당하게 접시에 챙겨 와도 되는구나. 난 참 어둡게 살았다.
간단한 아침과 더 간단한 점심 도시락까지 챙기고 7시 45분에 호텔을 출발했다. 출근 시간이라 조금 막혔지만 와이키키 중심가를 벗어나니 길이 시원하게 뚫렸다. 8시 15분에 대망의 하나우마베이 입구에 도착했더니, 다행히 문이 열려있었다. 문이 굳게 닫힌 채 ‘Warning: Jellyfish’ 푯말만 보고 돌아간 두 번의 기억 때문에 입구에 진입하는 순간, 승리의 짜릿함이 밀려왔다. 주차가 아무리 힘들다 하지만, 오전 9시 전에 갔는데도 주차 공간을 찾지 못했다는 글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한결 마음도 여유로웠다.
예상외로 주차 공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오하우에 와서는 일기 예보를 보지 않았는데, 오늘 날씨가 어떻게 되지? 많은 사람들이 일기예보를 보고 나오질 않았나? 스노클링엔 날씨가 더더욱 중요하다. 바람이 많이 불면 물도 차고 바다가 뒤집혀 시야도 흐려져 재미가 반감된다. 그런데 주차장에서 문을 열고 나오니 불길하게도 바람이 예사롭지 않게 불고 있었다.
해변으로 내려가면 바람이 잦아지리라 희망을 가지고 7.5불을 내고 입장했다. 이곳에서 경거망동하며 자연을 해치지 말고 산호를 밟지 말라는 10분간의 시청각 교육을 받고, 하나우마베이로 내려갔다. 바다는 예상대로 예뻤는데, 사진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예전에도 와 본 느낌이 들며 큰 감탄사는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좋은 곳에 갈 땐 관련 사진은 적당히 보자.
해안가로 내려오니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모래는 당연하고 여기저기 튜브가 날아다니고 파라솔들이 바람에 쓰러지기도 했다. 이번 여행은 끝까지 날씨가 깡패짓을 하구나. 우린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우마베이 모래사장 정중앙에 ABC Store에서 3불에 사 온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았다. 와이프와 지아는 모래사장에서 기다리고 나와 지우는 옆구리 운동 몇 번 같이 한 후 입수했다. 언니만 데리고 가면 항상 난리 치는 지아지만, 바다는 예외였다. 지우만 데리고 들어가는데도, 선글라스와 가운을 입은 채 쿨하게 보내줬다.
바닷물은 역시 차가웠다. 분명히 오색찬란해야 하는 하나우마베이 바닷속이 삼색 찬란 정도밖에 안되었다. 물론 Hana의 Red Sands Beach보다 물고기도 많았고, Hana에서 주인공 행세를 했던 물고기들이 여기서는 엑스트라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생명체들이 많았다. 50cm는 됨직한 물고기기들도 내가 회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아직 못 들었는지 겁 없이 내 주위를 얼쩡거렸다. 다만 갈수록 강해지는 바람 때문에 물속에서도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었다.
내려오기 전 시청각 교육 때 산호를 밟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준법정신이 투철한 지우는 산호 밟으면 안 된다며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했다. 산호 위를 가야 더 화려한 물고기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마치 산호가 지뢰라도 되는 것처럼 절대 접근하지 않고 주변만 맴돌았다. 그래도 Hana에서의 사전 연습 덕분으로, 내 손을 잡고 직접 액셤캠도 찍어보며 여유롭게 수영했다.
반면 이 곳에서 지아가 내뱉은 두 마디는 “엄마 쉬!” “집에 가자”였다. 지아의 마음은 이미 떴고 갈수록 강해지는 바람을 느끼며, 과연 계획대로 두 시간을 여기서 놀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나와 와이프는 번갈아 가며 솔로 스노클링을 했다. 난 드디어 멀리까지 나가서 산호 위 쪽에 떠 있었는데, 오리발이 아쉬웠다. 파도와 맞서 싸우며 자유롭게 원하는 곳으로 수영하고 다니기엔 오리발이 아닌 265cm 발로는 원하는 물질이 되지 않았다. 산호를 건드리면 지우에게 혼날 거라 바짝 긴장하고 다녔는데도 세찬 파도에 몇 번 부딪칠 뻔하기도 했다.
지우를 데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들어갔다 나온 후 철수를 결정하였다. 얼마나 벼르던 하나우마베이였는데 이렇게 일어나야 하다니. 점심 도시락까지 싸왔는데 이대로 떠나긴 아쉬워, 하나우마베이 공원 벤치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그곳에서도 생수통마저 넘어질 만큼 바람이 많이 불었지만 그래도 밥, 김, 장조림만으로 훌륭한 한 끼를 해결하였다. 이 곳에서도 역시 새들은 걸어 다녔고, 아이들은 새를 잡으러 뛰어다녔다.
우린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와이프는 애들을 데리고 호텔 수영장으로 가면서 나에게 자유 시간을 주었다. 내가 골프라도 치면 쿨하게 골프 치고 오라고 하고 싶은데, 그냥 알아서 시간 보내다 저녁때까지만 들어오라고 했다. 와이프는 내가 BJPenn 체육관과 그 옆에 있는 sports authority에 가서 쇼핑을 하고 올 거라 생각했다.
자유시간, 초코바 이름이 아니라 내게 정말 주어진 것이라니. 일단 차에 타고 어디를 갈까 생각했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땐 가질 않을법한 장소를 고르고 싶었다. 뭔가 Supernatural 하면서도 Brutal 한 곳. 하지만 여긴 아마존이 아니라 levely 한 하와이였다.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오하우 북서쪽 끝 카에나 포인트였다. 인상적인 바다 절벽을 따라 하이킹을 하고, 운 좋으면 알바트로스 갈매기나 천하태평 코 골면서 자고 있는 물개들도 만날 수 있는 코스였다. 하지만 왕복 세 시간은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가까운 곳 중 아이들과 함께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곳을 추려보니, 다이아몬드 헤드가 떠올랐다. 최근에 거기에 갔다 온 동기 한 명이 설렁설렁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라고 했다. 다만 난 등산을 10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할 정도로 가파른 길을 올라가는 행위 자체를 즐기지 않는다. 다이아몬드 헤드는 전혀 내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이때 아니면 결코 갈 일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 딱히 가고 싶은 곳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래, 가까운 곳으로 가자.
콘도에서 15분 거리였다. 난 조금이라도 덜 걸으려고 5불을 내고 입구 앞까지 올라가 파킹을 한 다음, 설렁설렁 산책을 시작했다. 어디가 다이아몬드인지 두리번거리다 저 멀리 산 꼭대기를 보니, 어렴풋했지만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부지런히 한 줄로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헉, 저기까지 가는 코스인가? 마치 수학여행 때 흔들바위까지 가는 줄 알고 널널하게 나섰다가 목적지가 울산바위임을 확인한 순간의 당혹스러움이 밀려왔다. 난 저렇게 멀고 높은 곳까지 갈 생각이 없었는데.
주위 사람들을 보니, 등산화 혹은 최소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내려오는 사람들의 옷에선 땀이 흥건했다. 그 순간 나의 발을 봤다. 내 발을 감싸고 있어야 할 아디다스 운동화는 남양주 가운동에 있고, 난 지금 조리를 신고 있었다. 와이프가 브라질에서 사 온 조리라 내구성이 검증되지도 않았다. 참고로 함께 산 와이프의 조리는 며칠 전 쇼핑할 때 끊어졌다. 그것도 터프한 산악 지형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길에서 산책하다가 끊어져버렸다.
아,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자유시간은 제깍제깍 흘러가고 있었고, 여기까지 왔으니 한 번 올라가 보기로 했다. 최대한 조리 끈에 부담이 가지 않을 걸음걸이로 조심스레 올라갔더니 정상까지 30분 정도 걸렸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와이키키부터 남서부 하와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와, 멋있다’라는 기분이 잠시 날 찾아왔지만, 내 안에서 30초 이상은 머무르질 않았다. 역시 난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행위에는 큰 감흥이 없었다. 더구나 좀 전에 하나우마베이 공원에서도 바람에 생수통이 넘어질 정도였는데, 산 정상인 여기는 어땠겠는가. 모자를 두 손으로 꽉 누르고 있지 않으면 훨훨 날아가 마우이에서 발견될 것 같은 미친바람이었다.
셀카만 수십 장을 찍고 내려왔다. 다이아몬드 헤드는 만 10세만 지나도 체력적으로 힘들 정도의 코스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조리 슬리퍼였다. 내려오는 길은 신발 앞 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리다 보니 조리 끈과 마찰되는 첫째 발가락과 둘째 발가락 사이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보폭을 최대한 줄인 내시의 걸음걸이로 아래까지 내려왔다. 굿바이, 다이아몬드 헤드. 널 다시 찾을 일은 없을 것 같다.
그것도 나름 등산이라고 시원한 콜라 한 잔이 땡겼다. 주차장 옆에 자판기가 눈에 들어왔지만, 순간 콜라를 마시고 싶은 장소가 떠올랐다. 하와이에서 콜라와 어울리는 장소도 떠오르다니, 아시아인으로서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그곳은 바로 지난번 여행 때 숙소 근처의 맥도널드였다. 전혀 특별할 것 없고 한적했던 맥도널드였지만, 내겐 아주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곳 중의 하나였다.
지난 여행 3일 차 아침에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리기 위해 25센트 쿼터가 8개가 필요해 집을 나섰다. 그 날은 날씨가 유독 좋아 집 앞에서 산책하는데 콧노래가 절로 나왔고, 그때 콧노래는 날씨나 여행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었다.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난 내 친구도 믿었기에~"라며 약간의 춤까지 곁들여 랩을 하면서 스웩 넘치게 걷다가, 동전을 바꿀 곳으로 근처에 있던 맥도널드가 생각났고, 난 그곳에서 10불을 내고 애플파이를 사서 쿼터 8개를 받아 나왔었다. 정말 별 것 아닌 스토리지만, 그 장면이 자주 떠올랐었다. 그래, 콜라를 마시러 그곳으로 가자.
다이아몬드 헤드부터 Wainamalo로 향하는 하와이 남동부 해안 길은, 지난번에 내가 처음으로 육성 감탄사를 내뱉었던 곳이었다. 중간에 경치를 구경할 수 있는 Outlook 장소도 두 군데나 있어서 혼자 여행객 기분을 내기 안성맞춤인 드라이브 길이었다. 지난번엔 모두 지나쳤지만, 난 이번에는 두 군데 Outlook에 모두 들러 눈을 호강시켰다. 성난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장면들은 장관이었다.
잠시 후 맥도널드에 도착했다. 차량털이범이 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동네라, 난 차가 보이는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 보니 점심도 제대로 먹지 않아 이 정도 허기면 맥도널드 햄버거를 원샷도 가능할 것 같았다. 난 맥도널드를 처음 와보는 사람처럼 메뉴판을 보고 한참을 고민하다 치즈버거, 애플파이, 콜라를 시켰다. 그때 쿼터 8개를 거슬러주던 여자애는 더 이상 일하지 않았고, 트럼프를 지지할 것처럼 보이는 덩치 좋은 백인 아저씨가 카운터를 보고 있다.
다 합해서 3.5불이라고 했다. 난 내가 너무 치즈버거 발음을 굴려서 이 아저씨가 못 알아들었나 싶었다. 그런데 계산서를 보니 진짜 세 개 합쳐서 3.5불이었다. 내가 중학교 때 부산 지역을 휩쓸었던 프랜차이즈 ‘990 돈가스’에서 990원짜리 돈가스를 본 이후 가장 쇼킹한 가격이었다. 이런 가격으로 하와이에서 배부른 점심이 가능하구나. 더구나 1.5불짜리 치즈버거는 며칠 전 Cheeseburger in Paradise에서 먹었던 Signature 햄버거만큼 맛있었다. 팁을 주는 곳이었으면 사상초유 60% 팁, 2불 정도를 놓고 오고 싶었지만, 이 곳은 맥도널드였다. 기분 좋게 3.5불짜리 점심을 즐기는 동안, 기다리던 차량털이범은 오질 않았다.
달달한 애플파이와 콜라로 일시적으로 뇌의 행복감을 극대화시킨 후, 지난번 묶었던 숙소로 가봤다. 반가운 마을 입구를 거쳐 보고 싶던 정문이 보였다. 문 두 개를 지나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이었다. 사실 입주자들만 알고 있는 사실인데 밖에서 문고리를 열면 그냥 열리는 문이었다. 그래서 난 집 안에 들어가서 수영장 앞에서 셀카나 하나 찍어 아이들에게 보여줄까 생각도 잠시 했는데, 집주인이 정문의 문고리를 없애고 번호 방식으로 바꿨다. ‘Private Property, No trespassing’이란 경고문도 붙어져 있었다. 지난 9개월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처럼 그냥 집에 들어가 보려는 사람들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알고 보면 무단침입인 위험한 유혹을 떨쳐버리고 밖에서만 기념사진 하나 찍고 돌아왔다.
이번 여행은 생각지도 못하게 날씨의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지난 번은 대놓고 겨울인 1월 말이었는데도 날씨가 좋아서 10월의 하와이 날씨에는 정말 큰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을 제대로 찍혔다. 바람의 신인 아이올루스는 폭풍을 넣은 긴 주머니를 몸에 감고 다니며 화가 나면 입김을 뿜어 세찬 폭풍을 일으킨다는데, 내가 아이올루스를 어느 대목에서 뽝돌게 만든진 몰라도 내가 가는 곳마다 구름과 비를 보낸다. 그래서 지난번과 동일한 위치에서 사진을 찍어 보니 확실하게 날씨 차이가 나는구나.
다시 남동부 드라이브 코스를 거쳐 와이키키로 넘어왔다. 자연친화적이라 인상적이었던 이 길도 마우이를 다녀온 후 평범한 길로 느껴지다니, 이제 남양주의 자랑 북한강변 드라이브 코스는 어떻게 다니란 말인가.
다시 호텔로 돌아오니 오후 5시.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한 것 같은데 자유 시간은 4시간만 쓰고 돌아왔다. 예상대로 애들은 신나게 수영한 후 자고 있었다. 아, 정말 40시간도 남지 않았다. 돌아갈 생각을 하니 벌써 아쉽고 마음이 급해졌다.
애들이 일어나자마자 우린 알라모아나로 갔다. 일단 저녁부터 해결하고, 와이프에게 하와이 쇼핑을 즐거움을 줘야 했다. 와이프는 끈이 떨어진 조리를 하나 사야 했고, 처제가 사달라고 한 것도 ‘Bath& Body Works’에 들러서 사야 했는데, 이 둘은 사실 쇼핑몰로 가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 일단 숙제부터 해결한 다음 자유 쇼핑이 시작될 것이다. 물론 애들이 쇼핑에 무한대의 시간을 허락하진 않겠지만. 이럴 땐 아이들과 나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애들 파이팅!
알라모아나에서 Mariposa나 California Pizza Kitchen에서 팁 좀 뿌리며 중급 수준의 만찬을 즐길까 했는데, 불금이다 보니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다. 둘 다 30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만만한 푸드코드로 가서, 추억의 1988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가 그려져 있는 Korean BBQ집 'yummy'에서 LA갈비와 미역국, 잡채밥을 주문했다. 점심은 3.5불짜리 맥도널드를 먹고 저녁은 푸드 코트라. 나 지금 베트남 여행 온건가.
여행지에서의 한식을 꺼리는 사람으로서, 인정하기는 싫지만 푸드코트의 미역국은 역대급이었다. 미역국 안에 삼겹살이 들어 있었는데, 삼겹살이 마치 부산 대신동의 마산집 돼지국밥 속 수육처럼 맛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서 서울 친구들에게 부산의 돼지국밥을 설명해주자, “그러니까 국밥 안에 삼겹살이 들어 있다는 거야?”라고 완벽한 서울 억양으로 끝을 올리며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삼겹살이 들어 있는 국이 어딨냐고 열폭했었는데, 여기 하와이 yummy 호돌이 가게에 있구나.
배가 채워져 행복한 아이들을 내가 잠시 맡고 와이프는 언제 끝나게 될지 모를 쇼핑을 시작했다. 와이프는 Aldo라는 브랜드에서 가죽 조리를 10불대에 득템 했다고 좋아했다. Aldo라고는 UFC 챔피언 조제 알도만 알고 있던 난 저런 브랜드도 있냐고 물었더니 나름 유명하다고 했다.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매일 다니는 코엑스 지하 통로에 Aldo 가게가 있었다. 그것도 제법 큰 가게였다. 난 도대체 뭘 보고 다니는 걸까.
와이프가 추가 쇼핑을 하는 동안, 난 Disney매장에 애들 데리고 가서, 마치 석유 재벌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거나 또 하나씩 고르면 사주겠다고 했다. 아빠가 소득세 최고세율 과표구간 소득자는 아닌걸 눈치채고 있는 효녀 지우는 신중하게 이것저것 고르다 자기는 안 사도 된다고 했고, 지아는 블링블링한 공주님 드레스들을 포함해서 눈에 보이는 대로 이것저것 막 골랐다. 물론 가격도 비쌌지만 공주님 드레스는 이미 집에도 사놓고 안 입는 게 많아서, 어렵게 설득하여 결국 걸을 때마다 뒤꿈치에서 불이 번쩍번쩍 나는 신데렐라 구두를 사줬다.
애들이 짜증내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쇼핑을 마치고 기분 좋게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로비에는 Halloween이라고 벤치에 해골을 앉혀 놓았다.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용감한 이 아빠가 낮에 혼자 다이아몬드 헤드 갔다가 진짜 해골을 발견해서 여기 놔둔 거라고 했는데, 역시 우리 애들은 진짜 믿었다. 내가 직접 해골을 업어 왔고, 체크아웃하기 전까지 우리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여기 벤치에 앉혀 놓기로 호텔 측과 이야기를 끝냈다고 했더니, 아빠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특히 지우는 이 해골이 정말 예전에는 살아있는 사람이었냐고 신기해했다. 착하고 순진한 우리 지우는 아직 이런 이야기까진 믿는구나. 지아는 아빠가 이 세상에서 제일 힘센 것까진 여전히 믿는데, 밤에 안 자고 떠들면 호랑이가 나온다는 말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 지우가 이 책을 내용까지 다 읽게 된다면, “에이, 아빠 그 해골 가짜였어?”할 것이고, 사진 위주 띄엄띄엄 읽는다면 몇 년 지난 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겠지. "미안, 지우야. 그 해골 가짜였어. 믿어줘서 고마워."
지우는 계속 해골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그중 한 번은 “어”라고 대답하려던 찰나에, 갑자기 뱃속의 콜라가 역주행하여 “꺼억”하며 트림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물론 어릴 땐 이런 장난을 많이 쳤지만, 내가 더 이상 초등학생처럼 방귀나 트림으로 대답을 대신할 정도로 유치하진 않다.
“어” 대신 제법 큰 “꺼억” 소리가 대신한 건 정말 우연의 일치였다. 그래서 조금 부끄러웠는데 의외로 지우가 완전 재미있어했다. “아빠 뭐야!”하면서 빵 터졌다. 그러고 보니 한창 이런 장난을 좋아할 나이구나. 나도 저 나이 땐 친구들끼리 모여서 낄낄댔던 대화의 대부분은 똥, 오줌, 방귀, 트림 등과 관련된 더러운 소재였던 것 같다.
지우는 호텔에 돌아와서 컨디션이 안 좋았던지 먼저 잠들었고 지아는 오늘도 역시 11시 넘어서까지 혼자 놀았다. 와이프와 나는 이제 정말 여행이 마무리된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이런 우울함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재빨리 다음번 여행을 계획해야 한다. 이번 여행을 통해 아직 아이들도 챙겨야 하는 상황에서 많은 짐을 가지고 섬 두 개를 이동하는 것은 힘들다는 것, 하와이 여행은 계절은 별 영향이 없고 머무르는 동안의 날씨가 중요하다는 것, 렌터카는 좋은 차 렌트해봤자 보험료만 비싸지고 차가 좋을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 한식당을 터부시 하지 말자는 것 등을 추가로 배우게 되었다.
둘이 앉아서 내년 달력과 항공편 등을 검색해봤다.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일단 내년 여름 즈음으로 계획을 세워보기 시작했다. 어느 주간이 항공권이 저렴한 지도 알아봤다. 그리고 우리 가족의 여행 스타일 상 빅아일랜드보단 왠지 카우아이가 더 구미에 당겼다. 섬 두 개를 이동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면, 오하우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카우아이로 1박 2일 정도만 다녀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눴다.
그래서 이 날 우리는 2017년 7월 14일부터 이번과 동일한 10박 12일 일정으로 다시 하와이에 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물론 사람일이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지만, 마음속으로라도 계획을 세우고 예약을 해버리는 것이 여행 마감을 이틀 앞둔 우리를 조금이나마 위로해줬다.
달라 빚을 내서라도 내년에도 꼭 가자.
Good-bye 9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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