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22 토요일
즐거운 토요일이다.
야구나 축구 감독은 스타팅 멤버를 짤 때 가장 믿음직한 선수들을 명단 표에 먼저 적어놓고 나머지 선수들을 당일 컨디션, 상대와의 매치업 등을 검토하여 확정한다. 히딩크 감독도 월드컵 때 박지성, 이영표 등 핵심 전력들의 이름부터 적어놓고 시작했다. 내가 이번 스케줄 표를 만들 때, 약 15개의 굵직한 일정들 중 가장 먼저 엑셀에 채워 넣었던 것이 토요일 오전 일정이었다.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사실 제일 먼저 채워 넣은 건 사실이나, 이번 여행에서 에이스급 일정은 아니었고, 매주 토요일에만 오전 7시부터 오후 1시까지 Maui Swap Meet이라는 이름의 전통 시장이 열렸다. 여긴 꼭 가보고 싶었다. University of Hawaii Maui College의 한 공터에서 장이 열리는데 로컬 과일 및 음료, 하와이 관련 의류 및 기념품, 각종 액세서리들을 파는 곳이라 재미와 득템이 보장이 되는 곳이었다.
University와 College는 대학원의 유무 등과 같이 구분하는 기준이 있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학교 이름에 University와 College가 모두 들어가 있는 것은 처음 봤다. 대학원과 대학교가 함께 쓰인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이런 느낌으로 뭔가 어색하게 보였지만, 내가 미국을 얼마나 안다고 건방지게 어색해하다니.
지영이와 난 항상 여행 가면 재래시장을 다녔고, 좋은 기억들이 많이 있다. 07년 여름 스위스 재래시장에서 산 빨간색 스위스 국기 문양 컵이 가장 생각나고, 시장 근처에서 먹는 싸고 맛있는 먹거리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추억들로 남아있다.
[9년 전 유럽 재래시장 사진들]
University of Hawaii Maui College로 들어가며 아이들에게 여기가 미국 학교라고 했더니, 지우가 학교엔 왜 왔냐고 물었다. 그래서 농담으로 "지우 이제 이 학교 보낼까 알아보러 왔다"라고 하자, 펄쩍 뛰며 거부했다. "절대로! 절대로! 여기 안 다닐 거야. 두레학교가 백 배 아니 천 배 더 좋아"라고 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를 이렇게 사랑하는 건 참 다행이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지우야, 네가 지금 감이 없겠지만 여긴 지상 낙원 하와이란다. 물론 네가 여기 학교 보내달라고 떼를 써도 보내진 않을 거지만, 농담으로라도 하와이 학교에 보내준다고 하면 무조건 받아야 해. 이건 아이 입장에서 함부로 거부할만한 카드가 아냐. 운동장이 좁아 100m 달리기도 못하고, 정글짐 하나에 수십 명씩 매달려 놀던 부산 동신초, 대동중, 대동고 출신 아빠의 말을 믿어라.'
우린 널찍한 대학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장료를 낸 다음 장터로 들어갔다. 와이프와 아이들은 역시 액세서리 가게에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갔다. 아이들은 본인들 팔찌와 머리핀, 사촌 가현이에게 사 줄 선물, 외할머니 액세서리 등을 골랐고, 와이프는 핸드메이드 밀짚모자를 하나 샀다. 난 마음은 로컬 푸드와 아이스크림 부스 쪽으로 향해 있었지만, 혼자 주변만 서성이다 코코넛 파는 아저씨와 눈이 마주치면 딴청 부리며 그냥 지나치곤 했다. 샤이한 여행객들을 위해 돈을 내면 나무에서 코코넛 하나가 톡 떨어지는, 코코넛 나무 자판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본인들 아이템 쇼핑이 끝나면 집중력과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제 아빠도 뭘 좀 골라보려니, 나가자고 난리다. 너무 이기적인 거 아냐? 아빠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하지만 태양마저 빨리 애들 말 들어주라며 더 뜨겁게 내리쬐기 시작했다. 그래, 가자 바닷가로.
시장 구경을 서둘러 끝나고 오늘의 두 번째 목적지로 향했다. 마우이에 유명한 바닷가가 많았지만 그중 스노클링 하기 가장 좋다고 알려져 있는 '블랙락'을 목적지로 선정했다. 가는 길에 라하이나(Lahaina)에 잠시 들러 점심을 먹는 것까지 포함하면, '재래시장 - 라하이나 - 블랙락'으로 이어지는 꽤 매력적인 하루의 동선이 만들어진다. 마우이에 하루짜리 여행을 온 사람들에게도 추천을 할 만한 꽉 찬 스케줄이다.
라하이나로 가는 해안길은 한 마디로 경이로웠다. 좌로는 코발트색 바다, 우로는 푸우쿠쿠이 산이 펼쳐져 있고, 다소 심심해 보이는 산의 생얼에 화장을 하 듯 무지개가 걸려 있다. 나도 운전대를 와이프에게 맡기고 눈을 좀 정화시키고 싶었으나, 국제면허증은 나만 가지고 왔구나. 이런 곳에 배산임수 명당자리를 찾아 집 짓고 살고 싶은데, 지우가 여기 학교를 다니지 않겠다고 해서 패스.
마우이에서 여행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장소인 라하이나는 하와이 말로 ‘무자비한 태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만큼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곳이라는데, 지가 아무리 더워 봤자 올여름 폭염기 우리 집만큼 더울까. 도망가는 모기와 쫓아가는 내가 둘 다 지쳐 쓰러질 정도의 무더위를 한 번 겪고 나니, 하와이의 더위쯤은 이제 신경도 안 쓰인다.
현재 하와이의 주도는 오하우의 호놀룰루지만, 과거에는 이곳 라하이나가 주도였다는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하지만 난 주도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관심이 없었다. 마치 우리 이력서에 '고등학교 동문회장'을 쓰는 것과 같이,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그게 뭐 중요하다고. 경상남도 도청소재지가 창원이건 울산이건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하이나는 전반적으로는 PAIA 지역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훨씬 볼거리가 풍성했다. 라하이나의 메인 거리인 Front Street은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유모차 끌고 잠시 산책하면 전부를 둘러볼 수 있는 조그만 길이었다. 그래도 오래전 주도였을 때의 모습을 많이 보존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Front Street을 중심으로 멋진 레스토랑, 갤러리, 옷가게, 기념품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과거 설탕 수출항이자 고래잡이 어선들이 모이는 곳이라 소설 <백경>의 배경이 된 곳이라고 한다. 내가 <백경>을 감명 깊게 읽었으면 저 바다를 보며 고래 '모비딕'이라도 한 번 불러봤을 텐데, 책을 읽었는지 조차 가물가물하다. <백경>을 떠올리면 <노인과 바다> 책 내용만 자꾸 떠오르는 걸 보니, 기억의 공소시효가 지났거나 혹은 책이 정말 재미가 없어 끝까지 안 읽었던 것 같다.
라하이나에는 1910년대에 지어진 뉴 잉글랜드풍 목조건물 양식의 호텔, Pioneer Inn이 있었다. 아직 투숙객을 받고 있다는데 너무 페인트칠이 말끔하게 되어 있어서였을까, 고풍스럽다는 느낌은 주지 않았다. 또한 1910년에 지어진 호텔에는 왠지 1910년에 태어나 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독한 바퀴벌레가 아직 살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며, 별로 묶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차가운 도시 남자가 다되었구나.
옛 건축물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좋으나, 그런 멋진 건축물에 너무 관광지스러운 컨텐츠들로만 내부를 꽉 채워 넣고 있어서, 여행객들을 대놓고 유혹하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여름 성수기의 해운대 같은 느낌? 난 티 안 나는 은근한 멋에 좀 더 끌리는 성향이다 보니, 조금은 아쉬웠다. 그래도 라하이나는 냄비 뚜껑의 구멍처럼, 젊은 여행객들의 에너지와 생동감을 뿜어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기에, 조용하고 시골스러운 마우이 섬이 지겹지만은 않게 밸런스를 잡아주는 장소였다.
라하니아 지역에 있는 아울렛, The outlets of Maui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몇 군데 레스토랑을 뽑아 놨는데, 우선 가장 가까운 BUBA GUMP부터 향했다. 워낙 유명한 식당이고 토요일 점심시간이다 보니 자리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갔는데, 의외로 빈자리가 많았다. 대기시간 없이, 그것도 바다 쪽 창가 좌석으로 앉을 수 있었다.
BUBA GUMP는 바다와 맞닿아 있는 레스토랑인데, 지우는 지금 바다 위에 떠 있는 거냐며 겁을 냈다. 음식은 사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기에 최적화된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의 음식들은 아니었다. 난 기본적으로 새우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이 곳의 Signature메뉴들은 모두 새우 요리였다.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이 귀여웠다. 키가 작고 통통한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말하는 것을 무지 좋아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친구였다. 메뉴판을 갖다 주면서 랩을 하듯 메뉴를 소개하기 시작했는데, 메뉴판 페이지마다 음식 설명 후 본인은 이 페이지에선 이 요리를 제일 좋아한다며 하나씩 콕 찍어주었다. 물론 음식 재고가 많이 남아 있는 메뉴 중심으로 주문을 유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친구의 얼굴은 진심이었다. 음식을 추천하면서 정말 먹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종업원이 열심히 메뉴 설명을 해줬지만, 우린 추천 메뉴와 하나도 겹치는 것 없이 마음대로 주문했다. 우선 애피타이져로는 난 Mac & Cheese류를 원했지만 치즈를 싫어하는 와이프가 Fish & Chips를 시켰다. 그리고 모든 테이블마다 디폴트로 놓여 있는, 4가지 새우의 맛을 볼 수 있는 Shrimper’s Heaven을 하나 시켰고,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파스타도 주문했다.
아이들에겐 크레파스와 색칠놀이 종이들이 제공되었다. 이런 서비스 너무 좋다. 아이들이 최소 10분 정도는 엄마 아빠가 자리를 떠도 모를 만큼 집중을 했다. 여행까지 와서 'Water, please' 할 순 없지. 어른 음료로는 콜라, 아이들은 스무디를 하나 시켰다. 스무디 컵이 아주 예뻤고, 유리컵 밑에 전구도 들어 있어 번쩍번쩍 불빛도 났다. 나중에 그 컵은 선물로 받았다.
Fish & Chips는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무난한 맛이었고, Shrimper's Heaven 요리는 새우임에도 불구하고 칭찬해줄 만한 맛이었는데, 파스타는 자신 있게 말하는데 내 생애 최악의 파스타였다. 면류를 워낙 좋아하고, 특히 파스타는 군말 없이 잘 먹는 지우도 한 입 먹더니, “이건 맛이 좀 이상해”하며 더 이상 먹지 않았다. 와이프는 본인이 시킨 메뉴라 말을 아끼는 듯 “맛이 좀 특이하네” 정도로 순화하여 표현하였지만, 두 번째 포크는 오지 않았다. 오히려 난 아무도 먹지 않기도 했고 대놓고 이상한 맛이라, 이게 뭐지 싶은 마음에 계속 먹게 되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BUBA GUMP에서는 지금 이 파스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가장 맛있을 자신이 없으면, 가장 특이한 맛으로 어필하는 것도 괜찮네.
그러고 보니 아직 가족사진이 없었다. 셀카봉도 없어서 기회가 될 때마다 많이 찍어놔야 한다. 식사를 끝내고 자기주장 강하고 먹고 싶은 거 많고 귀여운 종업원에게 가족사진을 부탁했다. 이 친구는 센스 넘치게 조금씩 다른 각도로 세 장의 사진을 찍더니, “난 마지막 사진이 제일 마음에 든다”며 전해준다. 역시 마지막까지 주관이 확실한 친구다.
귀여운 종업원에게 팁은 후하게 줬다. 우린 여행 중이니까.
결국 그 유명한 마우이 BUBA GUMP는 대기시간 없이 바로 바닷가 창가 자리에 앉은 것과, 아이들에게 크레파스와 색칠놀이를 준 것과, Reality Bites의 OST인 My sharona 음악이 흘러나온 것과, 나갈 때 BUBA GUMP 유리잔을 선물로 준 것을 빼면, 특별히 좋은 점은 느끼지 못했다.
밥을 먹고 나오니, BUBA GUMP만 한적한 것이 아니라 라하니아 마을 자체가 조용했다. 사람들로 북적거려야 할 The outlets of Maui에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유명한 여행지 아울렛에 심지어 토요일인데 사람이 이렇게 없을 수가. 살인 거북이라도 다니는 것일까. 그것이 알고 싶다.
주차비를 내지 않기 위해서 뭔가 하나를 사야 했다. 다행히 우린 무조건 사야 하는 것이 있었다. 아이패드, 셀카봉, 운동화부터 시작된 깜빡 퍼레이드는 그칠 줄을 몰랐다. 바닷가에 가면서 내 수영복을 놓고 온 것이다. 두 개나 가지고 왔는데.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ABC 마트에서 20불 주고 수영복을 하나 더 샀다. 그래도 그 영수증으로 주차비 8불을 세이브할 수 있었으니, 12불짜리 수영복인 셈이었다.
이제 애들 배도 불려놨겠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블랙락'으로 향했다. 마우이 북쪽 바다인 Kaanapali Beach의 맨 끝, 쉐라톤 호텔 바로 앞에 위치한 블랙락은 마우이에선 가장 유명한 스노클링 포인트였다. 무엇보다 이름이 정말 쿨하지 않은가, 블랙락. 남양주에 사는 나만 멋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뭔가 뽀대 나는 이름을 좋아하는 월스트리트에서도 '블랙스톤' '블랙락'이란 이름을 쓰는 회사들이 있다. 심지어 아주 유명한 회사들이다.
물론 내 기준엔 하와이에 더 멋진 이름도 있었다. 오하우의 스노클링 포인트인 '샥스코브'. 마치 스노클링 하다가 여드름이라도 터지면, 그 피 냄새를 맡고 식인 샤크가 몰려오고, 샤크를 피해 밖으로 나오면 코브라가 기어 나올 것 같은 강인한 이름이다. 실제론 연못 같이 조그만 바닷가에 손바닥만 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곳이라 아이들과도 스노클링을 할 수 있는 귀여운 곳이지만. 아무튼 '블랙락'은 스노클링으로 유명하면서 이름까지 멋있으니 안 갈 수 없었다. 오하우로 넘어가서 8일 차에 세계 최고의 스노클링 포인트 중 하나인 하나우마베이를 갈 예정이었지만, 이번에도 망할 Jellyfish가 또 나올 줄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수영실력이 급성장한 지우와 스노클링을 많이 해놓고 싶었다.
블랙락으로 가는 길에도 여전히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이번엔 심지어 쌍 무지개였는데 그중 아래 무지개는 너무나 선명했고, 한쪽 끝이 마치 10m 옆에서 시작된 것처럼 가깝게 보였다. 어릴 때 동화책에서 무지개 끝에는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본 것 같은데, 잠시 뛰어가면 무지개 끝이 잡힐 듯했지만, 괜히 보물을 발견하면 들어갈 때 세관신고 등 귀찮을 것 같아서 놔뒀다.
덕분에 아이들은 쌍무지개를 감상하며 재잘재잘 기분 좋게 떠들며 이동할 수 있었다. 지우가 “하와이에는 무지개가 정말 많다. 그래서 차에 전부 무지개가 있나 보다”라고 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차에 전부 무지개가 있다고?" 물어보니, 지우가 다시 설명해줬다. “저기 차 번호판에 무지개 있잖아.” 오호. 그러고 보니, 모든 차들 번호판에 무지개가 그려져 있다. 나와 와이프는 지우가 알려주기 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 특히 난 와이프 헤어스타일이 극단적으로 변해도 말해주기 전까지 잘 모르는 저주받은 관찰력을 가지고 있는데, 지우는 다행히 나보단 훨씬 관찰력이 뛰어나구나.
내비게이션에 블랙락을 찍고 가다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라는 안내 종료 멘트가 나온 곳은 쉐라톤 호텔 입구였다. 아, 주차가 문제구나. 그래서 난 잠시 차를 세우고 ‘블랙락 주차’로 검색을 해봤다. 한 블로거가 ‘블랙락 주차 꿀팁’이라는 글을 올려놨다. 블랙락 근처 주차를 위해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가장 먼저 쉐라톤 호텔 주차장 끝에 'Guest Parking'이라는 별도의 입구가 있다고 했다. 다만 주차 공간이 몇 개 없어서 이미 꽉 차 있을 거란 설명도 곁들였다.
우연히도 현재 내가 차를 세워놓은 곳이 쉐라톤 주차장 끝자락 근처였다. 그래서 “이 근처를 말하는 것 같은데…”하며 옆을 봤더니, 마치 짠 것처럼 똵! 'Guest Parking'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중간에 주차공간 한 곳이 비어있는 것까지 똵! 시야에 들어왔다. 이렇게 꼭 필요한 정보가 기막힌 타이밍으로 찾아오다니. 지금껏 내 삶은 이렇게 순탄하지 않았는데, 어쨌든 만세다. 이 세상의 모든 파워 블로거들을 사랑한다.
덕분에 우린 주차를 안전하게 하고 차에서 모두 옷을 갈아입고 해변용 의자 두 개를 포함하여 짐을 잔뜩 짊어지고 블랙락으로 향했다. 5분 정도 걸어가니 드넓은 바다가 나왔다. 이 곳이 Kaanapali Beach였다. 조금만 걸어가면 블랙락 포인트가 나오는데, 자다 깬 지아가 모래사장을 걷는 것을 힘들어했다. 그렇다고 안고 가기에는 짐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일단 그곳에 의자 두 개를 깔고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바다에 오니 날씨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갑자기 바람이 많이 불기 시작해서 파도가 세고 물도 찼다. 일단 와이프와 지아는 놔두고, 지우와 내가 먼저 물에 들어갔다. 목욕탕 찬물보다 더 차가웠다. 그래도 차가운 물에 지우가 나보단 더 잘 들어갔다. 난 “으…으…”하며 슬로우 모션으로 10초에 1센티씩 몸을 집어넣고 있었는데, 지우가 물속에 들어오면 따뜻해진다며 날 밀어 넣었다. 순간 지우랑 절교할 뻔했다.
지우는 계속 수영을 다니며 자유형, 배형, 평형까지 곧잘 하는 실력이었는데, 역시 파도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겨우 20kg 조금 넘는 여자 아이에게 이 곳의 파도는 완전 깡패였다. 파도가 없이 잔잔할 땐 무릎까지도 안 오는 깊이였는데, 파도가 올 때마다 휘청거렸다. 지우는 내 손만 꼭 잡고 버텼으나 미안하다, 아빠도 파도한텐 진단다. 부산 어부들에 따르면, 파도는 삼 형제가 있다고 한다. 잔잔하다가 큰 파도가 하나 오면, 뒤이어 더 큰 파도가 오고, 마지막으로 제일 큰 파도가 온 후, 다시 잔잔해진다고 한다. 아기돼지 삼 형제보단 훨씬 거친 녀석들이다.
그렇게 놀던 중, 지우가 파도에게 제대로 참 교육을 당했다. 내 계산으론 삼 형제 중 둘째 파도가 허리 높이까지 세차게 올라와 지우를 넘어뜨렸고 모자도 벗겨졌다. 지우는 모자를 줍느라 삼 형제 중 끝판왕 형이 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조력발전소 터빈도 몇 바퀴 돌릴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파도가 지우를 그대로 안고 모래사장 쪽으로 던져 버렸고, 데굴데굴 두어 바퀴 구르며 물을 잔뜩 먹은 지우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울까 말까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 순간 지우 모자가 내 옆을 지나갔으나 난 모자는 포기하고 지우에게 뛰어가 안아줬는데, 정수리까지 모래가 뒤범벅이었다.
삼 형제가 물러갔으니 이제 다시 잔잔해졌다. 물에 들어가서 온 몸의 모래라도 털어내자고 했는데, 지우는 트라우마 탓에 바다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온몸에 모래가 1kg는 붙어 있는 듯한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만약 웃었으면 지우에게 절교당했으리라.
그때 내 눈에 쉐라톤 호텔 수영장이 들어왔다. 이 날씨에 바다는 더 이상 힘들고, 모래도 씻어내고 쉐라톤 수영장에서 마음껏 놀지 못한 아쉬움을 좀 달래주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지우를 데리고 쉐라톤으로 들어갔다. 우리 콘도 수영장은 외부사람 출입이 안되게 문이 잠겨 있고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데, 쉐라톤은 친절하게도 오픈되어 있었다. 그래서 샤워부스에서 일단 큰 모래들은 다 털어내고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역시 지우는 호텔 수영장을 좋아했다. 아까 파도의 기억은 잊고 개구리처럼 평형을 하면서 신나게 놀았다. 난 중간중간에 계속 지우에게 잠수하라고 해놓고 물속에서 머리를 감겨줬다. 정수리에서 모래가 끝없이 나왔다.
난 눈가리개를 한 말처럼 옆을 보지 않았다. 마치 봐서는 안될 것을 피하는 것처럼, 지우 얼굴만 봤다. 그리고 지우는 수영, 난 모래 털어주기, 두 개의 미션을 모두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끝낸 이후에야 옆을 봤다. 그랬더니 벽에 예상대로 'Hotel Guest Use Only'라고 적혀있었다. 저 사인은 이제 본 것이다. 난 외부인 못 들어오는지 몰랐던 거다. "지우야, 외부인 출입금지래. 나가자." 수영장을 빠져나오던 우리는 이미 깨끗한 몸이 되어 있었다.
기대가 컸던 블랙락 스노클링은 날씨의 비협조와 파도의 힘만 확인한 채 서둘러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남은 일정과 날씨를 다시 점검했다. 출발 전 한국에서 날씨 검색한 것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내일 날씨가 그나마 낫고 월, 화요일은 cloudy 하지만 수, 목요일은 shower라고 나와 있었다. 그래서 일정을 다시 조정했다. 마우이 여행에서 가장 날씨 컨디션이 중요할 것 같은 할레아칼라와 Hana로의 여행을 미리 당겨서 내일과 모레 끝내버리기로 했다.
자, 내일은 할레아칼라다. 할레아칼라 정상까지는 약 두 시간 반이 소요된다. 일출 시간은 6시경이니 일출 전 넉넉한 도착을 위해서는 새벽 3시에 기상해야 했다. 우리가 선호하는 여행 스타일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마우이에 7박이나 있는데 한 번은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난 별로라도, 아이들은 구름빵을 먹고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는 기분을 좋아할 수도 있으니.
그래서 밤에 짐을 모두 차에 실어놓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하이퍼 된 아이들은 방에서 몇 시간을 더 뛰어다니고 놀았지만. 이렇게 셋째 날도 저물었다.
Good-bye 3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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