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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하당 Dec 07. 2021

묘하당

이름의 의미

사이클 부가 있는 중학교엘 다녔다. 그 부에 속한 친구들은 어찌나 바쁜지 얼굴 본 날을 손에 꼽을 지경이었는데, 조숙하게 인생의 침로를 정하고 자신의 길을 걷는 친구들이라 그저 남들 하던 대로 책장에 글이나 끄적이던 나와는 아주 다른 성적표를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단 한 과목에서만큼은 얼추 성적이 비슷했는데, 바로 한문(漢文)이다. 대부분의 과목에서 빼어나거나(수, 秀), 뛰어나다는(우, 優) 평가를 받은 나였지만, 유독 한문에서는 '좋다'라는 의미의 가(可)를 받았던 것(어쩌면 '가능하다'는 격려의 의미였을지도). 어쩌겠는가 오기가 뻗쳐 밤을 새워 공부 해봐야 아침이 되면 죄다 똑같은 글씨로만 보이는걸. 


한옥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다 보니 집에 이름을 지어줘야 한단다. 아름다운 한글로 지어주면 그만이겠으나,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이걸 꼭 멋들어지게 한문으로 지어주고 싶었다. 나중에 글씨를 여러 번 따라 그리다 보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세 글자 정도는 확실하게 외울 수 있을 테고, 그러고 나면 어디서든 그야말로 일필휘지로 멋지게 당호를 써 낼 수 있을것 같았기 때문. 하지만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거라고는 '흙 토(土)'처럼 획이 적은 글자뿐이니 그럴싸한 한자로 이름을 짓는 게 애초에 가(可)능 할리 없었다.


여하튼, 딴에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동네 고양이들이 강물처럼 놀러 오라는 의미에서 고양이 묘(猫)에 물 하(河), 그리고 집 당(堂) 자를 써서 ‘묘하당'이라는 이름을 지어냈다. 세상 복잡한 고양이 묘자를 써서 내가 뭔가를 만들어내다니 이런 기적이 또 있을까 싶었지만, 배우자는 이 이름을 단칼에 거절했다. 집 이름 짓는 게 무슨 애들 장난이냐는 이유였다. 장난으로 지은 게 아닌데. 


그래서 그 다음에는 물 하자를 여름 하(夏) 자로 바꾸어 여름의 고양이처럼 축 늘어져 살자는 의미라고 했더니만 대충 그냥 좋단다. 물론 좋지 않다는 의미로 제대로 이해했다. 정월의 보름달을 열 번도 넘게 함께 본 사이다 보니 그 정도는 이제 잘 알아듣는다. 


어쩔 수 없이 한자 사전을 좀 더 뒤적거렸다. 이번에는 좀 더 그럴싸해 보이도록, 말할 수 없이 빼어나고 훌륭하다는 의미의 묘할 묘(妙) 자에, 서쪽으로 하늘이 넓게 열린 집이니 노을 하(霞) 자를 써서 묘하당(妙霞堂)이라고 지어봤다. 노을이 아름다운 집이라니 가(可)능 할리 없다고 생각했던 거 치고는 엄청 그럴싸한 결과물 아닌가? 


나의 자화자찬과는 무관하게 당연하게도 여전히 반대 의견이 강하다. 하긴 "묘하당에 삽니다" 하면 누군들 두 번 묻지 않을까. 어디 공동묘지로 오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다보니 묘하당은 글을 쓰는 공간의 이름이자, 필명이 되었다. 집에는 쓰지 못하는 당호이지만, 여기에는 내 마음대로 써야지. 자꾸 보다 보면 정이 들어 집의 이름이 될 수도 있으려나?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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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0. 가구 가전 사이즈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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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4. 마지막 세입자분의 이사 

2021.11.05. 세 번째 디자인 미팅

2021.11.19. 네 번째 디자인 미팅

2021.12.01. 별채 돌아보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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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설계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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