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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Jun 20. 2024

매혹적인 오락거리라는 난적 상대하기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지난 글에 이어 틱낫한의 <고요히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의 2장 <고통을 알아차리고 안아 주기>를 읽고 제 삶을 위해 쓰는 글입니다.


매혹적인 오락거리

35~36쪽은 <매혹적인 오락거리>라는 소제목을 붙이고 있습니다. 2021년 <초집중>이라는 책을 읽고 처음으로 SNS의 폐해에 대해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1]

하지만, 그 심각성을 잘 모르다가 최근에는 아내의 행동을 보면서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SNS가 아니라 '오락거리'로 넓히면 아내에게서 보던 모습이 저에게도 그대로 투영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우리 삶에 굉장히 강력한 습으로 침투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책 내용으로 돌아가 봅니다.

자신에게 돌아오지 못했던 이유는 우리가 고통을 무시하고 관심을 돌릴 다른 오락거리에 이끌려가는 데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지만 수긍합니다. 그런 듯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내면으로 향하기

바로 '외면(外面)'이 떠오릅니다.

내면의 아픔으로부터 마음을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것이지요.

'외면(外面)'이란 낱말은 다시 <외면(外面)하기와 직면(直面)하기>를 썼던 기억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당시의 어리석음과 욕망을 동시에 깨닫습니다. 어리석음은 외면하는 다른 사람을 향한 글이었다는 점입니다. 일단, 스스로 부단히 노력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향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죠.


한편, 나도 모르는 속마음이 제목에 담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인지하지 못하는 저에게 하는 말이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죠. 아니, 그러니 그런 글을 썼을 듯합니다. 책 속의 다음 말도 어쩌면 남의 얘기가 아닌 듯합니다.

하지만 내면의 고통은 우리의 관심을 원하기에, 자기를 바라봐 줄 때까지 곪아가며 마음속을 마구 휘저을 테지요.

아침에 어머니가 근거 없는 민주당 비난을 담은 카톡 메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퍼 나르던 것과 유사한데, 교회가 아니라 절에 다니는 친구가 왜 이런 것을 보냈는지 의아해하셨습니다. 칠십이 넘어도 내용도 이해하지 못하는 영상을 열심히 퍼 나르는 어머니 친구분의 모습이 앞서 본 포기말(문장)의 예시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저 역시 그러한 모습에 갇혀 있으니 이 포기말에 끌리는 것이란 추측입니다.


아픔이라는 그리 즐겁지 않은 에너지

에너지라는 낱말이 무척 반갑습니다.

아픔이란 그리 즐겁지 않은 일종의 에너지입니다.

저는 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지나치게 불교적인 세계관에서만 생각하는 일은 불편합니다. 틱낫한 님을 글은 이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읽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에너지'란 표현은 앞서 두 개의 글을 쓸 때 배운 내용과 경험을 활용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욕심과 다스림: 추진력인 욕심을 바로 알기

시행착오가 보여주는 지도 그리고 추진력을 찾는 질문

최봉영 선생님 말씀을 인용하면 살아있는 동안 계속 우리 몸과 마음에서 무언가 납니다.

내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나의 몸과 마음에서는 끊임없이 힘, 김, 땀, 화, 성, 불, 병, 욕심, 심술 따위가 나고 또 난다. 그리고 나의 밖에 있는 모든 것들도 끊임없이 함께 일어나고 있다.

欲(하고자할 욕)자를 보면 선조들도 (일부는)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아픔도 그렇게 계속 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막막한 길을 볼 때 두려움과 불안함이 느껴지는 동화 장면처럼 아픔도 비슷한 유형의 일상에 주어지는 감각에 대한 내 판단 결과물이겠죠.  


스스로에게 돌봄을 아끼지 말라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내용이지만, 과연 그랬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스스로 돌볼 시간과 의지조차 없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어찌 돌봄을 제공할 수 있겠습니까?

의지를 앞세우며 스스로의 상태를 무시하는 일이 아예 강력한 습관이 된 듯도 합니다. 다행히 희망을 주는 구체적인 방법이 등장합니다.

첫 단계의 수행이, 밖으로 내달림을 멈추고 육체로 돌아와 자신의 고통과 마주하는 것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분노나 불안이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고통의 느낌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마치 메시의 발놀림처럼 더 정교하게 내 상태를 인지하면 다른 발놀림이 가능하다는 이치일까요?

고통이 하나의 에너지라면 마음챙김 또한 다른 종류의 에너지입니다. 고통을 어루만지게끔 불러낼 수 있는 에너지요.

일단 이렇게 하라고 합니다.

나는 너희들이 보인단다. 나 여기 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

<당신이 옳다>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나 자신의 현재 상태를 긍정하는 일이겠죠. 그게 아픔이든 질투든 과욕이든 인정해 주는 것 말이죠.


매혹적인 오락거리라는 난적 상대하기

그런데, '매혹적인 오락거리'라는 소제목 하에서 왜 이런 내용만 다룰까요? 이유도 없이 뉴스를 보고, 인스타나 쇼츠를 보기 직전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부터 하라는 것일까요?


주석

[1] 책을 읽을 여력이 없지만 폐해가 궁금하신 분은 이 유튜브 영상 청취로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연재

(26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26. 문제의 근원은 대부분 당신 안에 있다

27. 지금 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게 하는 힘

28. 어떻게 내가 무엇을 모른다는 것을 알 것인가?

29. 문제의 궁극적 근원은 대부분 어떤 사람의 욕망이다

30. '어디'라고 쓰고 '누구'라고 읽는다

31. 문제의 인식과 문제의 정의는 전혀 다른 일이다

32. 필요로 하는 것을 갖기 전에는 뭐가 필요한지 모른다

33. 내가 정말로 해결안을 원하는지 보지 못하고 하는 일들

34. 고통에 먹이 주기를 피하기 위한 직시(直視)

35.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하기 위한 가장 작은 실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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