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의 주기율표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재개에 이어서 3월 이후 6개월가량 쉬었던 <한국말의 주기율표>를 재개합니다. 한가위를 맞아 최봉영 선생님이 페북에 쓰신 《한국사람과 ‘우리’에 대한 꿈》에서 한국말의 중추가 될 씨말 후보를 꼽는 시도를 해 봅니다.
첫 번째 후보는 바로 '저'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따로 하는 낱낱의 것을 ‘저’라고 말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와는 사뭇 다릅니다.
「1」 말하는 이가 윗사람이나 그다지 가깝지 아니한 사람을 상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는 일인칭 대명사. 주격 조사 ‘가’나 보격 조사 ‘가’가 붙으면 ‘제’가 된다.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던 뜻은 아마도 이것일 겁니다.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는 말'로 대명사로 분류하죠. 두 번째 뜻도 있습니다.
「2」 앞에서 이미 말하였거나 나온 바 있는 사람을 도로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 ‘자기’보다 낮잡는 느낌을 준다. 주격 조사 ‘가’나 보격 조사 ‘가’가 붙으면 ‘제’가 된다.
설명을 보면 '이런 뜻도 있었나?' 싶다가 '제 갈 길'과 같은 용례를 보면 익숙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예 다른 어휘로 구분한 또 다른 '저'의 뜻을 보면 최봉영 선생님의 풀이에 무게가 실립니다.
「1」 말하는 이와 듣는 이로부터 멀리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
'이도 저도 다 싫다.'라고 할 때 바로 그 저입니다. 그런데 같은 뜻인 데 굳이 관형사로 구분한 경우도 있습니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로부터 멀리 있는 대상을 가리킬 때 쓰는 말.
'저기 저 여자.'라고 할 때의 저입니다. 바로 이 경우가 최봉영 선생님의 책 <한국말 말차림법>을 통해 문법보다 말차림법을 제시하는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국어 문법은 영어를 중심으로 한 서구언어에 어울리는 언어 분석 결과를 그와 맞지 않는 한국말에 억지로 끼워 맞춘 느낌인데 관형사를 도입하여 같은 뜻의 낱말을 나누는 경우를 보니 근거가 된다 하겠습니다.
같은 단어를 굳이 다른 어휘로 나누고 심지어 불필요하게 품사까지 구분해서 파편화시켜 놓은 것이죠. 파편화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냐고요? 처음 본 정의이지만, 최봉영 선생님의 포기말이 바로 그 대안일 수 있다고 느낍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따로 하는 낱낱의 것을 ‘저’라고 말한다.
물론, 최봉영 선생님의 정의를 따르려 한다면 믿음이 필요하고, 어쩌면 소수자의 길이라 용기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빈약하기 짝이 없는 정의를 비난하면 국어 관련 종사자들이 쌓아온 많은 것들의 대안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네이버 사전의 유의어를 보니 상황을 개선한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를 대신하는 수많은 한자어와 계급까지 드러나는 낮춤말이 보여서 그렇습니다. 조선이라는 계급 사회가 사대주의에 물들어 한국말을 오염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과한[1]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여하튼 파편화된 국어사전 대신에 최봉영 선생님 정의를 따르면 통합적인 '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따로 하는 낱낱의 ‘저’가 모두 같은 노릇을 한다고 여겨서 자기(自己)와 타인(他人)을 모두 ‘저’로 일컫는다. 이를테면 “저 가볼게요.”에서 ‘저’는 자기(自己)를 가리키는 말이고, “저 갈 길을 가면 된다.”에서 ‘저’는 타인(他人)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기(自己)를 말하든 타인(他人)을 가리키던 저마다 따로 하는 낱낱을 칭하면 '저'가 됩니다. '저마다' 나 '저절로'는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따로 하는 낱낱의 저를 바탕으로 ‘저마다’, ‘저절로’, ‘저 혼자’, ‘제 나름’, ‘제각각’, ‘제대로’, ‘제 멋대로’ 따위를 말한다.
또한, 이렇게 받아들이고 나면 다음 단어들은 그냥 이해할 수 있습니다. 통합된 '저'의 힘이고, 씨말로 작용해서 원자가 분자가 되듯 의미를 확장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쓰는 '한국말의 주기율표'에도 제격인 말이죠.
한편, '저'는 담담하고 '나'는 또렷하게 내세운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담담하게 바라보는 ‘저’를 바탕으로 ‘저 혼자’, ‘저 나름’, ‘저희’, ‘저희들’ 따위를 말하고, ‘저’를 또렷하게 내세우는 ‘나’를 바탕으로 ‘나 혼자’, ‘나 나름’, ‘우리’, ‘우리들’을 말한다.
처음 듣는 설명이라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를 꼽아 조금 더 살펴봅니다.
한국말에서 ‘우리 마을’, ‘우리나라’, ‘우리 겨레’에서 말하는 ‘우리’는 ‘저’와 같은 것들로 이루어진 ‘저희’를 뜻하는 ‘우리’이다.
종종 논란이 되기도 하는 우리와 저희의 차이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람들이 ‘엄마’, ‘동생’, ‘마누라’를 두고서 ‘저희 엄마’, ‘내 동생’, ‘제 동생’, ‘저희 동생’, ‘내 마누라’, ‘제 마누라’ 따위로 말하는 것은 나름으로 특별한 까닭이 있을 때 그렇게 한다. 이를테면 ‘저희 엄마’는 형제들이 함께 하는 엄마라는 뜻을 또렷이 드러내는데 쓰는 말이고, ‘내 동생’과 ‘제 동생’은 ‘나’를 내세우거나 낮출 필요가 있을 때 특별히 가려서 쓰는 말이고, ‘내 마누라’나 ‘제 마누라’도 ‘나’를 내세우거나 낮출 필요가 있을 때 특별히 가려서 쓰는 말이다.
우리와 저희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쓰임새가 있군요!
‘우리 은하’는 은하계에서 볼 수 있는 온갖 것들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 은하’, ‘제 은하’, ‘저희 은하’와 같이 말할 수 없다. ‘나’는 은하에 속해 있는 하나의 쪽으로서 다른 모든 쪽을 함께 어울러서 ‘우리 은하’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선생님이 만든 도표를 기준으로 제, 저희, 저희들의 쓰임새를 살펴봅니다. 더불어 내와 우리와의 차이도 살피게 됩니다. 코는 신체 일부로 공유할 수 없기에 '우리 코'와 '저희 코'와 같이 쓸 수 없습니다. 반면 몸은 각자의 몸을 말하니 '우리 몸'은 가능하지만, '저희 몸'과 같이 우리 안에서 저희를 다시 구분할 수 없으니 쓸 수 없는 모양입니다. 저희 마누라도 같은 경우네요. 제 나라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반면에 혼자서는 성립이 불가능한 학교와 마을에는 '내/제'를 붙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경우도 제, 저희 따위를 붙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는 분별이 없습니다. 어릴 적 다니던 개신교는 '이단'이라는 말을 가르치며 종파를 이념 수준으로 엄청나게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한국말 '하느님'과 개신교가 강조하는 '하나님'은 다른 바탕을 지닌다 하겠습니다.[2]
다음 다발말(=단락)을 보니 저희와 달리 저들은 '저와 같은 것들'을 뜻합니다. 한국말은 참 신묘합니다.
‘우리 마을’에서 ‘우리’는 ‘나’와 같은 주민으로 이루어진 ‘우리’를 말하고, ‘우리나라’에서 ‘우리’는 ‘나’와 같은 국민으로 이루어진 ‘우리’를 말하고, ‘우리 민족’에서 ‘우리’는 ‘나’와 같은 겨레로 이루어진 ‘우리’를 말한다. 이때 ‘나’라는 이쪽의 ‘남’과 ‘나’를 넘어선 저쪽의 ‘남’은 노릇을 같이 하기 때문에 하나의 ‘저들=저와 같은 것들’로 묶일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저들=저와 같은 것들’을 하나로 묶어서 ‘저희’라고 말한다.
이상 살펴본 저에서 파생한 말들을 유의어 사전 모양을 본 따 그려 봅니다.
[1] 근거가 빈약한데 느낌 만으로 평가한 것이라 '과하다'라고 썼습니다.
[2] 마침 이 글을 막 썼을 때, 눈에 띈 정현주 님의 글이 인상적이라 인용합니다.
'하나님/하느님' 은 우리 고유명사입니다. 'God(신 神)'를 '하나님'이라 번역하면 안됩니다. 'White house'를 청와대나 경복궁이라고 번역하면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야훼'는 'God'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야훼가 유대교 신앙의 고유명사이듯, 하나님은 우리 민족 고유 신앙의 고유명사입니다. '천지신명' 같은 겁니다. 아무도 야훼를 '천지신명'이라 번역하지 않듯, 하나님이라 번역해서도 안됩니다. 야훼는 동일 인물로 보이는 '알라'와도 별개의 신이라고 선을 그은 신입니다. 하물며 한민족 고유의 하나님, 천지신명으로 둔갑해서는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