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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Sep 23. 2024

줏대가 없다면 모든 것이 완벽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앞선 글에서 인용한 <인연생기, 인연법이란?>이란 글에서 인상 깊은 구절을 조금 더 다뤄보겠습니다.


물의 순환 비유는 인상 깊습니다.

또 다른 비유로 물의 순환을 들 수 있는데, 물이라는 것이 인연 따라 여름철 장마를 만나면 비로도 내렸다가, 겨울에 추운 조건이 형성되면 눈으로도 내리고, 또 때로는 우박으로도 내린다.

다음 포기말(=문장)을 보면 인연화합을 설명하기에 물이 적절한 대상이란 단서를 제시합니다.

특정하게 물이 어떤 실체가 있었다면 그렇지 않겠지만 물 또한 실체 없이 다만 인연 따라 변화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물이 실체가 없다는 표현은 어딘가 비과학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렇더라도 의미는 통하는 설명입니다.

이처럼 대지 위를 내린 비는 산과 숲을 만나 인연 따라 나무의 수액도 되었다가,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피나 땀이 되기도 하고, 지하수도 되었다가, 호수나 계곡물로도 되고, 나아가 강이나 바다로도 흘러든다. 또한 뜨거운 햇살이 내리쬘 때면 수증기로도 증발하고 다시금 하늘에 구름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름이 다시 인연을 만나면 비나 우박이나 눈 등으로 다시 쏟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서 인연 따라 물은 이 지구상의 모든 존재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

훌륭한 비유입니다.


근본 원인(因)과 어떤 조건 혹은 연(緣)

뒤이어 인과 연을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이름도 비, 눈, 우박, 서리, 이슬, 구름, 수증기, 수액, 피, 땀, 강, 바다, 계곡물 등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바뀐다. 이처럼 물이라는 근본 원인(因)이 어떤 조건, 어떤 연(緣)을 만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돌고 돌며 순환한다.

因(인할 인)을 씨말로 쓰는 인에 비해서 緣(인연 연)을 씨말로 쓰는 연은 확실히 불분명한데, 조건과 나란히 쓰니까 솔깃합니다. 그럼 연(緣)을 조건이라고 보아도 되나 해서 말이죠.


그리고 다음 다발말(=단락)에 도달하면 앞서 비과학적으로 여겼던 부분들도 해소가 됩니다.

물론 그 물이라는 분자 또한 수소원자와 산소원자로 나뉘면서 변화해 가고, 수소나 산소 또한 그것을 쪼개면 원자핵과 전자로 나뉘는 등 어떤 실체적인 것 없이 끊임없이 인연 따라 변화해 갈 뿐인 것이다. 이처럼 그 모든 것은 인연화합의 이치를 따르며 변화해 간다.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 따라 바뀌어 갈 뿐이다. 그래서 무아이고, 공이며, 무상이고, 그 모든 것을 연기 혹은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어 공이며, 무아이고, 무상이며, 연기이다.

모든 존재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고 하니까요. 더불어 그것이 공, 무아, 무상, 연기라고 하니 시골 농부 님을 통해 만났던 '무아'에 대한 기록(?)이 다시 살아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만큼의 기억으로 남겨져 있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이 글을 쓰는 지금이 과거보다는 조금은 더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뿐입니다.


현상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구분하기

어릴 적 창조에 대한 성경이야기를 들으면 단군신화와 비슷한 수준이라 생각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소멸된다는 이치이다.

그에 반해 막연하게 불교 교리는 기독교 교리에 비해 성숙한 느낌이었는데, 과학이 발견한 사실과 대립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런 막연한 느낌의 단서가 되는 듯합니다.

본래부터 존재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모든 것이 텅 빈 무이며, 공이었고, 무아였지만, 다만 인연이 화합하는 순간 인연 따라 신기루처럼,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다.

우주의 이치도 그러하지만, 우리의 인식의 공간 역시 환영처럼 만들어진다 하겠습니다. 저는 이를 <현상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구분하기>를 쓰던 때에 박문호 박사님 영상을 보며 이해했습니다.


<인연생기, 인연법이란?>을 소개한 페벗님이 인용했던 포기말입니다.[1]

보통 사람들은 똑같은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혹은 더 많은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남보다 더 못살고, 더 잘 살지 못했을 때 세상을 원망하고 부처를 원망하며 이 세상에는 진리가 없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인연법이라는 진리를 올바로 깨닫지 못한 탓이다.

저는 '콩 심은 데 콩이 난다'는 말을 철썩 같이 믿기 때문에 인용한 구절과 같이 세상을 원망하며 진리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의 진리는 무엇일까요? 대체로 누군가 말해준 내용을 진리라며 철썩 같이 믿는 경우가 많을 듯합니다.


생명은 의미이고, 각자의 가치는 스스로 정할 수 있다.

세상에 진리가 없다고 탓하는 사람들을 위한 조금 더 쉬운 설명이 있습니다.

공부를 잘 한 사람은 무조건 회사도 좋은 곳에 들어가고 잘 진급하며, 못 한 사람은 나쁜 회사에 들어가 진급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공부를 잘 한 사람은 공부만 한 대신 인간관계를 잘 못 지었지만, 공부를 못한 어떤 사람이 대신에 인간관계를 잘 지었다면 오히려 공부를 못 했던 사람이 또 다른 ‘연’으로 인해 진급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진리에 대해 누군가에게 잘못 배웠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A라는 근본 원인이 그대로 a라는 결과만을 똑같이 가져다주는 곳이 아니다.

한때 서양 철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플라톤의 이상사회에 대해 도올 선생이 통쾌하게 평가한 영상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유치하고도 유치한 말입니다. 도대체 누구 입장에서 완벽하다는 것일까요?


그래서 요즘 읽고 있는 <Why>의 내용 그리고 지난주에 발견한 페벗 님의 글에서 힌트를 얻어 각자의 답을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주석

[1] 아쉽게도 페북 검색으로는 도저히 어떤 기록이었는지 찾을 수가 없네요.


지난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연재

(8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81. 떨림과 울림, 어울리다 그리고 매력

82. 차림과 알아차림 그리고 헤아림과 어림

83. 정신이 팔리면 NPC처럼 휘둘리기도 한다

84. 사람이 마음 그릇의 울림판을 통해 함께 떨고 운다

85. 몸과 마음을 통해서 대상에 대한 느낌과 앎을 갖는다

86. 열린 우리주의(홍익인간)와 닫힌 우리주의(집단이기주의)

87. 나도 알 수 없는 내 마음: 밑바탕 마음에 대해서

88. 믿음에 바탕을 두고 꿈을 꾸거나 일을 꾀한다

89. 글 내용에서 내 경험과 공통점을 찾는 일은 대칭적인가?

90. 대칭과 대응의 흐릿한 경계를 묻고 따지다

91. '스스로 하는 나'에서 '위하는 나'로의 전환

92. 쪽인 나로 일을 인식하는 과정을 풀어 보기

93. 사물과 사태는 인과 연의 일어남에 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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