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지난 글에 이어 최봉영 선생님께서 페이스북에 쓰신 <나도 알 수 없는 내 마음: 밑바탕 마음에 대해서>를 읽고 스스로 묻고 따지고 풀어낸 글입니다.
포기말(문장) 단위로 보기로 하겠습니다.
02.
사람은 머리로 알고 있는 어떤 것이 실제로 그러하다고 녀길 때, 그것을 마음으로 믿게 된다.
<마주해야 보인다, 본 것에 마음이 가면 녀긴다> 내용이 떠오르는 포기말입니다. 마음이 가는 것을 마주합니다. 눈앞에 있다고 모두 보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내 마음이 가는 곳은 내 믿음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다고 녀길 때'란 매듭말[1]을 눈(을 포함한 감각기관)으로 본 내용이 생각 속의 알음알이와 같거나 알음알이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면 녀기게 된다 할 수 있습니다.
다음 포기말을 보면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연관성이 드러납니다.
이를테면 사람이 자전거를 배우는 경우에 머리로 안다는 것은 그가 자전거를 어떻게 타는 줄 아는 것을 말하고,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가 자전거를 어떻게 탈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얼핏 보면 둘은 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포기말은 믿는 일과 '당연하다'는 낱말이 연관성이 드러나는 말입니다.
자전거를 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전거를 타는 일을 당연하게 여겨서 그렇게 하려고 할 것이다.
사전에서 '당연하다(當然하다)'[2]를 찾아보았습니다.
일의 앞뒤 사정을 놓고 볼 때 마땅히 그러하다.
믿으니까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군요. 자전거를 예로 들어서 그럴 수 있지만, 몸으로 겪어서 아니 믿을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다음 포기말로 갑니다.
03.
사람이 어떤 것을 아는 것은 그냥 아는 것에 그칠 수 있지만 어떤 것을 믿는 것은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냥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요? 생각에 알음알이는 있으나 실제로 헤아려 보지 않아서 '맛'을 모르는 상태를 이르는 것일까요?
하지만, 확신에 차서 천국을 믿는 신앙인들을 보면 꼭 '맛'을 보아서 그렇게 믿는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다음 포기말을 읽을 때 취미로 공부하는 뇌과학 지식이 섞입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꾀하는 것은 실제로 그러하다는 믿음이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가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나도 모르게 예측이 작동한다고 합니다. <제정신이라는 착각>에서는 이를 '예측 기계'라고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예측하는 능력을 지능과 연결하지만, 사실 이런 예측 능력은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능력이다. <중략> 우리의 뇌는 곧 예측 기계인 것이다.
예측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 판단 혹은 녀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포기말까지 이어서 읽다 보면 '꾀함'이 예측과 비슷한 말인가 싶기도 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이 어떤 것을 믿는 것은 어떤 것을 꾀하는 일의 바탕이 된다.
하지만, 분명 다른 말입니다. 다음은 '꾀하다'의 사전 풀이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려고 뜻을 두거나 힘을 쓰다.
행동을 위해서 (유전자 혹은 생명체인 나에게 위험하지 않다는) 예측이 필요한 것처럼 꾀하기 위해서는 이와 유사하지만 (인간의 욕망이나 욕구에 바탕을 둔) 믿음이 필요할 듯합니다.
여기까지 풀이한 후에 이전에 묻따풀 했던 <머리로 알고 마음으로 믿고 용기를 내어 몸으로 행한다>을 읽었습니다. 믿음과 기억이 판단을 지배한다고 했던 박문호 박사님의 말씀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러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무언가 꾀하게 되는 일은 실제 물리 세계가 아니라 생각 속에서 만들어진 현상적 세계의 구현일 수 있다는 점을 다시 배우는 듯했습니다.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어구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매듭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한자사전도 찾아보았습니다.
(76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76. 한국인은 상황을 즐길 때 '살맛 난다'라고 말한다
77. 맛보는 과정을 통해 본성이 습성으로 드러나는 배움
78. 생각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키우는 다양한 맛과 문화
84. 사람이 마음 그릇의 울림판을 통해 함께 떨고 운다
85. 몸과 마음을 통해서 대상에 대한 느낌과 앎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