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덕후의 탄생
이 글은 수학책을 읽고 썼던 <극한과 연속 그리고 내 삶의 연속의 의미 생각하기>를 바탕으로 페북을 통해 이순석 님이 남긴 댓글을 두고 제 생각을 기록하는 글입니다.
페벗님 글에서 밑줄 친 부분을 먼저 보겠습니다. 지난 5월 틱낫한의 <고요히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의 일부 내용을 기초로 그린 그림에 대한 해석(?)입니다. 내용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지점에서 '해석' 행위와 그 개념이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애초에 수학의 한 분야인 해석학의 영어 이름이 analysis라는 익숙한 단어인 점에 주목했던 경험을 세포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 실천으로 사전을 찾아봅니다.[1] 해석의 결과는 다양할 수 있지만, 일단 씨말을 보면 해석이란 풀어 보고 쪼개 보는 일이네요. 하지만, 이를 쪼개고 푼 후에 이를 재구성할 수 있어야 효용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페벗님은 제가 책을 보고 그린 그림을 나름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놀라운 점은 그 해석을 바로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 추론과정을 보면 글을 채 다 읽기도 전에 느낌으로 알거나 믿는 바가 더 큽니다. 그렇다 보니 분명 편향이 작동하겠지만, 여하튼 해석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저 역시 해석한다고 하겠죠.
여기서 다시 흥미로운 일이 발생합니다. 애초에 저는 페벗님 의견을 수용하여 그림을 다시 그려보려고 그림의 출처를 찾았습니다. <고통을 다루는 방법: 욕심과 고통과 임자를 연결시키기>로 간 것이죠. 그랬더니 페벗님 해석이 그림의 반론이 아니라 조화롭게 엮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글귀를 만납니다. 당시 <고요히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을 읽고 제가 느낀 점을 기록하며 붙인 소제목만 순서 대로 열거해도 의미의 차이가 메꿔지는 듯합니다.
내 경험 속에 내가 현존하기 위하여
행복의 기술이자 고통을 잘 겪어내는 기술
고통과 행복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욕심과 불편과 임자를 연결시키기
그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글귀는 <고통과 행복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입니다. 아래 사진에서 정혜신 선생님은 고통을 이겨내는 법을 말합니다. 이제부터 하면 되는 내 일상으로 말이죠.
책을 통해 저를 가르쳐 온 현자들의 말씀에 더하여 페벗님의 가르침도 더하여 그림을 수정해 봅니다. 간단한 일입니다. 그럼 애초부터 고통을 쓰지 않으면 될 텐데 왜 당시는 고통이었을까요? 원래 맥락이 몸과 마음을 함께 하여 바라는 바를 행하지 않는 상태를 나타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환 즉, 고통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어 내는 힘은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페북에서 발견한 지인의 글 <사람은 무엇을 향해 사는가>에서 욕망을 다듬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의 힘이 나타나 있습니다.
무엇을 향해 살지? 나를 드러내기 위해 살지. 내가 드러나는 지향점을 향해 살지.
아니, 저는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또 <줏대가 없다면 모든 것이 완벽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에서 인용한 글귀에도 유사한 느낌을 주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생명은 의미이다. 우리는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 의미가 사라지면 생명도 다한다.
[1] 한자사전에서 씨말도 찾아봅니다.
8. 늘어나는 AI 고용주(?)와 생각의 자동화라는 부작용
9. 상대의 의견을 받아들일 때, 옵션(선택권)을 인식하다
11. Value Object 이전에 Object란 사실
12. 생성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리다
13. <AI 미래>로 배운 집필, 소통의 이면, 작명 모순
14. 생명의 위대함에 대하여...
15.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똑같은 가치를 지닌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