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과 가까워지기
지난 글에 이어서 9장 '해석의 엄밀화'에서 밑줄 친 내용을 토대로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학창 시절 들었던 용어가 당시와 달리 의무감이 아니라 의미를 지니고 반갑게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볼치노는 극한 개념을 이용하여 연속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한 최초의 수학자였다. 즉 함수 f(x)가 있을 때 한 구간 내의 임의의 값 x, 양이든 음 이든 관계없이 충분히 작은 Δx에 대 해 f(x+Δx)-f(x)가 주어진 임의의 값보다 항상 작을 때, 볼차노는 이 함수 f(x)는 '이 구간에서 연속'이라고 정의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다발말(=단락)입니다.
1905년 프랑스의 수학자로 해석학 연구에 업적을 남긴 피카르(Emille Picard)는 "만약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연속 함수가 반드시 미분 가능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미분학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엄밀한 아이디어는 때때로 창조를 방해하기도 한다.
첫 번째는 개방적인 태도나 포용성의 가치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다음으로 미분과 해석학 그리고 연속 함수의 연관성에 대한 호기심이 생깁니다. 관련 포기말(=문장)이 또 있습니다.
오일러는 '해석학의 화신(化身)'으로 불렸다.
부족한 배경 지식을 고려하여 먼저 인공 지능 3 총사의 힘을 빌어 봅니다[1]. 먼저 제미나이의 답을 봅니다.
답변 내용에는 앞서 의문이 들었던 '미분과 해석학 그리고 연속 함수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부분도 있습니다.
다른 두 인공지능의 답변도 함께 보니 유익합니다. 책의 9장과 10장에 다뤄진 문제들의 바탕에 대한 배경 지식입니다. 이들을 읽는다고 바로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조금은 친해진 느낌입니다.
퍼플렉서티의 답변에도 나오지만 책을 통해 '수학적 해석학'의 영어 표현이 'mathmatical analysis'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다음 포기말도 퍼플렉서티 답변에 나오는 문구(실수와 복소수를 포함한 다양한 수학적 공간에서 함수의 성질)와 대응하는 듯합니다.
실수 체계를 정립하려는 노력은 형식화의 논리적 정의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한편, 데데킨트의 질문은 멋집니다.
데데킨트는 '연속성의 본질'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제가 왜 그렇게 여겼을까요? 뻔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질문하는 모습은 어딘가 짜릿합니다.
이 방향으로 연구를 거듭하면서 데데킨트는 직선의 연속성을 한 군데 모여 있다"는 말로 모호하게 설명하지 않고, 그 대신 "점을 이용하여 직선을 구분하는 성질"로 이해하게 되었다.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제가 만남을 점과 선으로 묘사한 일이 떠오릅니다. 점 아래에는 거대한 빙하가 있다는 생각도 함께 했었죠.
이런 가정 속에서 '연속성의 본질이 무엇인가?' 스스로 물어봅니다. 흥미롭네요.
수학과는 많이 벗어난 이야기지만, 이에 대한 생각으로 글을 마칠까 합니다. 마침 우연하게 페북에서 지인의 글 <사람은 무엇을 향해 사는가>를 발견했는데, 이를 연결시켜 봅니다.
무엇을 향해 살지? 나를 드러내기 위해 살지. 내가 드러나는 지향점을 향해 살지.
제 기준으로는 '드러낸다'는 빙산의 일각을 떠오르게 합니다. <만남은 기회이니 기회를 여는 대화를 준비하라>에 기초한 것이죠. 수면 위에 드러난 빙산의 일각이 환경을 인식하고 상호작용하는 나에 대응한다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칭으로 깊어 갔더니 발견한 객체의 대칭 그룹>을 쓰며 발견한 생각을 더해 봅니다. 만일 우리의 복잡한 일상을 아루는 다이내믹스를 그대로 두지 않고,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 보겠습니다. 이를 지인의 표현에 대응시키면 '내가 드러나는 지향점을 향해'가 될 것입니다. 마치 이전 글에서 그렸던 아래 그림에서 '품질' 자리에 '내가 드러내는 지향점'이라고 쓰는 격이죠.
그 지향점을 공간에 투사하여 모양을 바꾸면 지인이 삽입한 다음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2]
지인의 긴 글에서 꿈이라는 지향점을 향해 가는 과정을 생각할 때 가장 도움이 된다고 느낀 포기말을 두 개만 골라 보았습니다.
때로는 온인 나로, 때로는 쪽인 나로의 지향이 드러냄에서는 기가 막힌 합주를 해.
우리 족속이 가져왔던 가치가 우리말 안에 있다.
첫 포기말은 다름 아닌 <'스스로 하는 나'에서 '위하는 나'로의 전환>에서부터 따지기 시작했던 '쪽인 나'에 대한 인식을 다룬다고 하겠습니다.
때로는 온인 나로, 때로는 쪽인 나로의 지향이 드러냄에서는 기가 막힌 합주를 해.
누구나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우리는 '사회적 동물'로 살아갑니다. 한자어이지만 한국말이기도 한 人间에 사이 간(间) 자가 들어간 이유도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과 같은 이치를 공유한다고 짐작합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테니스 이너게임>에 배운 바에 따르면 판단하는 마음에 나를 빼앗기면 현존하지 못하고 판단으로 스스로에 주어진 시간을 고통으로 바꾸는 어리석음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하기 위한 가장 작은 실천부터> 해야 한다는 일침을 끊임없이 떠올려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정신을 차리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때 한국 사람은 한국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지혜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다음 말이 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 족속이 가져왔던 가치가 우리말 안에 있다.
[1] 사용한 프롬프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학의 한 분야인 해석학에 대해 평이한 한국말로 요약해 주세요.
[2] 회전시켜서 다르게 묘사할 수도 있습니다.
3. 수와 숫자의 기원